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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Apr 10. 2016

클로버필드 10번지

영상으로 푸는 수수께끼

박지원의 수필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 보면 낮에는 휘감아 도는 강물줄기가 무섭더니 밤에는 강이 우는 소리가 무섭다고 했다. 보일 때는 눈이 무섭고 들을 때는 귀가 무섭다고 했다. 눈과 귀가 큰 병을 만든다고 했다. 그러더니 물에 빠지면 물로 옷을 삼으리라 생각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고, 그것은 보고 듣는 기능을 마비시킨다고 했다. 우리의 감각은 외물에 의하여 지배적 영향을 받게 되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사물의 정확한 실체를 살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허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과 그것에 의하여 움직이는 감정과 절연된 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말에 본 ‘무한도전’에서도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강풍과 소리를 내세워 멤버들이 승합차를 탄 것인지, 헬기를 탄 것인지 혼동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참가자들은 눈을 가린 채  외부의 영향을 받으며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오로지 감각에 의지하여 판단했던 현실 상황이 잘못된 것임이 밝혀지는 순간, 현실 상황의 인식 오류에서 생기는 웃음은 큰 재미를 주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소리 내어 웃으면서도 과연 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제대로 상황 판단을 할 수 있었을 하는 의문이 생겼다.


댄 트라첸버그 감독의 ‘클로버필드 10번지’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오감을 동원하여 영화 속 상황을 판단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대사 한 마디, 오브제 하나, 등장인물의 행동 등을 통해 관객들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추리해 본다. 하지만 그 추리가 그리 쉽지는 않다. 감독이 밀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납치, 감금, 핵전쟁, 외계인 등의 요소들을 다양하게 섞어 넣어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존의 영화들에서 봐 왔던 전형적인 플롯과 클리셰, 캐릭터 등은 관객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하나를 맞추면 또 다른 것이 어긋나면서 긴장과 이완이 교차한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공포와 쾌감이  ‘클로버필드 10번지’의 매력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은 주인공 미셸(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분)이 처한 상황을 쇼트의 나열로 제시하고 있다. 인물의 대화나 설명은 없다. 나는 몇몇 장면들을 조합하여 미셸이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하고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는 중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 판단이 맞았음을 확인하고 잠시 뿌듯했다. 영상 언어를 해독하는 나의 능력은 훌륭했다. 그런 자신감이 들 때쯤 감독은 진짜로 던지고 싶었던 수수께끼를 풀어놓았다. 미셸은 의문의 차량 충돌 사고를 당하고, 어느 밀실에서 눈을 뜬다. 한쪽 다리가 묶여 있는 그녀의 앞에 등장한 사내 하워드(존 굿맨 분). 그는 미셸이 있는 곳이 자신이 만든 지하 벙커라고 한다. 그리고 바깥세상은 핵전쟁으로 인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미셸은 정말 납치된 것이 아니라 하워드에 의해 구조된 것일까? 연습 문제 이후에 본시험을 치르는 학생처럼 나는 본격적으로 영화 속에 몰입하게 되었다. 관객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무척 센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알기 위해 나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되었다. 영화 속 하워드는 우리의 도처에 널려 있다. 통치자들을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 자본들이 교묘하게 유포하는 상업주의, 정치가들이 부르짖는 구호 등이 바로 하워드의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갇혀 내 주변의 일들을 보이고 들리는 대로만 판단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클로버필드 10번지’를 보면서는 나의 판단이 틀리는 지점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나의 판단은 내가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을 선사할 테니까.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은 외계의 영향을 배제한 순수한 이성적 판단에 의하여야 한다는 ‘일야구도하기’의 가르침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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