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물병편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재우 May 30. 2017

'첫사랑'을 죽도록 때리다

마흔이 넘어서야 제주도엘 가 봤습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죠. ‘그 좋은 데를 이렇게 갈 순 없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갈 거야.’ 그만큼 제주도는 제 머릿속에 아름다운 곳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냉면의 삶은달걀을 제일 마지막에 먹는 것처럼 아끼고 아꼈습니다. 제주도로 가는 것을.

     

자기들 빼고 반 아이들 모두가 비행기를 타 봤다는 아이들의 불평에 제주도 여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껴 두었던 곳이니 아이들에게도 큰 선물이 되겠다 싶었죠. 몇 달 전부터 준비해서 3박 4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동경의 ‘낙원’에 가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제껏 다녀 본 곳들과 다르지 않았고,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허탈한 기분도 들더군요. 아예 오지를 않았더라면, 제 마음속에 ‘낙원’은 계속 남아 있었을 테니까요.

    

제주도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남들은 좋아서 주말마다 찾기도 한다는데요. 문제는 저에게 있었을 겁니다. 현실의 불만족스러움이 부지런하게도 제주도를 이상향으로 만들어 갔던 것이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제주도를 찾지 않았나 봅니다. 환상을 현실로 끌어들임으로써 일상의 탈출구를 잃기 싫었던 것입니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제 마음대로 상대를 규정해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환상이 깨져 버릴 때, 그 사람이 ‘배신했다’라고 단정 짓는 것이죠. 그 사람은 자기 모습 그대로 자기 삶을 산 것뿐인데 말입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이 지독한 오해의 낙폭이 더욱 큽니다. 박남철 시인의 <첫사랑>이라는 시에서 느낄 수 있듯이.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박남철, <첫사랑>    


‘나’는 ‘첫사랑’을 죽도록 때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대답은 알랭 드 보통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 속의 ‘나’는 자신이 흠모하는 대상이 ‘나’ 따위를 사랑하는 일에 분노를 하고, ‘포항여고 그 계집애’를 죽도록 때렸나 봅니다.  

   

‘나’는 자신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지 말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신부터 소중한 존재로 사랑했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포항여고 그 계집애’의 욕망도 온전히 그녀의 것으로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아마도 그랬다면 ‘나’의 ‘첫사랑’은 더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로 기억됐을 겁니다.

    

제주도에 다시 가 봐야겠습니다. ‘내가 기대한 게 이만큼인데, 고작 이 정도 만족밖에 못 돌려주는 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제주도의 풍경을 보고 ‘제주도의 하늘과 바다는 이런 색이구나’ 하고 와야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제가 만나는 사람도 사랑도 더욱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겠지요?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게 만나고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레이크 밟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