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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11. 2017

택시운전사

이웃 속으로 유턴하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5·18 민주화운동을 알게 되었다. 선배의 손에 이끌려 보게 된 영상과 자료들. 그 안에는 매질에 터져 나오는 선혈이 가득했고, 이웃들의 주검이 넘쳐났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역사 교과서 한 권을 고스란히 머릿속에 집어넣고 온갖 시험을 치러왔던 나였다. 하지만 내 지식의 영역 안에 5·18 민주화운동은 없었다. 이제까지 믿어 왔던 세계의 뼈대가 일시에 무너져 버렸다. 그 무게에 질식해 버리는 것도 잠시, 진실을 조작하고 은폐해 버린 권력의 민낯에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 엄청난 일을 치른 피해자들이 곁에 있었지만, 그들의 아픔을 나누기는커녕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통사람의 의식 변화 양상을 다룬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가해자, 피해자, 객관적 비판자, 주관적 관찰자의 관점이 충돌하고 전이(轉移)되면서 보통사람 ‘만섭(송강호 분)’이 각성(覺醒)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진실의 왜곡과 언론의 역할에 관한 문제이다. 죄 없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현실을 ‘가짜 뉴스’로 포장하는 권력의 폭력성. 거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진실을 전하려는 언론인의 사명감. 그 두 가지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을 고민하게 된다.


     

택시운전사 만섭은 대다수의 소시민, 우리 자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만섭과 우리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영업 행위에 지장을 주는 시위대를 향해 배부른 대학생들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 불평하는 만섭. 세상의 정의보다는 오늘 일용할 양식이 더 소중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에게는 11살의 어린 딸과 밀린 사글세라는 현실의 짐이 있다. 자신들의 삶이 바쁘기에 일일이 세상일을 자세히 알아가면서 생각할 여유가 없는 우리들과 비슷한 처지이다.

     

이처럼 만섭은 현실에 찌들어 먹고사는 일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감독은 만섭이 각성하게 될 것이라는 단초를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단초는 바로 ‘휴머니즘’이다. 출산에 임박한 임산부를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택시비를 받지 못했지만, 순산을 기원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웃에 대한 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성이 광주의 이웃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그는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광주의 시위대는 폭도가 아니라 피해자인 이웃이라는 사실을.

     

이미 전작인 <의형제>, <고지전> 등에서 장훈 감독은 남북의 인물들에게 휴머니즘을 불어넣으면서 그들 모두가 이념에 의한 피해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택시운전사>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폭도로 매도된 광주의 시민들과 그런 이웃을 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려는 만섭 모두는 군사 정권이 낳은 피해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확인된 동질성은 만섭의 변모를 유도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새벽 만섭의 고백. 그는 죽어 가는 아내의 병시중을 중도에 포기하고 남은 돈으로 개인택시를 마련했다. 아내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하며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아내에게 진 마음의 빚은 죽어 가는 광주의 이웃들을 두고 떠나려는 만섭의 발목을 붙잡는다. 광주를 벗어난 도로 위. 신호 대기 중인 택시 안에서 만섭은 혜은이의 노래 ‘제3한강교’를 부르며 눈물을 흘릴 듯 말 듯 갈등한다. 그리고 급작스런 유턴. 만섭은 자기 생활 중심의 주관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관찰자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상황 맥락과 일반적 상식 하에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 분)는 눈에 띄는 기사거리를 찾는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갖게 된 이슈는 남한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험천만한 사건이었다. 그는 계엄령이 내려지고 일체의 취재 행위가 금지된 곳에 들어가 감추어진 사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어렵게 광주에 도착한 그는 카메라에 그림을 담는 일에만 몰두한다. 영문도 모르고 함께 간 만섭이 위험에 처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채로. 금광을 발견이나 한 듯이 거리의 장면들을 빠짐없이 주워 담으려고 애쓴다. 그에겐 취재 자체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런 피터를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온 세상에 알려 줄 의인으로 대접한다. 그래서 시민들은 피터의 취재에 함께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광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돕는다. 그런 과정에서 피터는 자신을 돕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게 된다. 이 대목에서도 휴머니즘은 피터를 성숙한 기자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된다.

     

함께 식사하고 웃고 도망 다니던 이웃의 죽음 앞에서 피터는 카메라를 들지 못한다. 취재에 대한 욕심보다는 이웃을 상실한 아픔이 더 컸기 때문에. 그런 그에게 다시 카메라를 쥐어 주는 사람은 만섭이다. 만섭은 말한다. 이제는 이웃들의 아픔을 전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이 광경을 다 찍으라고. 이윽고 정신을 차린 피터는 기자로서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 책임감과 함께 이웃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으로 카메라를 든다. 이제 그에겐 이웃을 구하기 위한 진실의 전달이 가장 큰 목적이 되었다.

     

만섭과 피터, 두 인물의 변모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이 영화에서 ‘휴머니즘’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황태술(유해진 분)의 거실에서 있었던 저녁 식사와 여흥의 자리는 그래서 명분을 얻는다. 극 중의 상황만 놓고 봐서는 그 엄중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이질감까지 느껴지는 시퀀스였지만, 이는 이질적인 입장의 존재들을 하나의 이웃으로 연결하는 장치로 기능한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휴머니즘이 진하게 느껴지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실탄 사격을 하는 군인들 앞에 놓여 있는 시민들을 구조하기 위해 택시운전사들이 택시를 몰고 들어가 바리케이드를 치는 장면이었다. 실탄의 위력 앞에 온몸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만섭의 표정은 위기에 처한 이웃을 구조하는 만섭의 굳건한 몸짓과 교차되면서 휴머니즘의 숭고한 위력을 증폭시켰다. 두렵지만 이웃을 구해야 한다는 휴머니즘의 발로(發露). 이러한 감동은 광주 택시운전사들이 만섭 일행을 구하기 위해 사복 군인들과 벌이는 카체이싱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광주의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언론의 작태는 반인륜적이었다. 신문사가 문 닫을 것이 걱정돼서,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거짓으로 전달한 언론. 그리고 그런 언론의 가짜 뉴스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실어 나르는 수많은 입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하고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이다. 거창하게 정의나 사명감을 부르짖을 것까지도 없다. 저 일이 나의 일이라면, 이웃의 일이라면, 하는 식의 공감 능력만 가지고 있더라도 휴머니즘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가? 자신들이 원하고 알고 싶은 것들만 알려고 노력한다. 내 일이 아니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은 애초에 클릭도 하지 않고 넘기기에 균형 잡힌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런 우리이기에 매번 언론에 농락당하고, 쉽사리 선동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현실이 아직도 그러하기에 만섭은 ‘김사복’이라는 가명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뜨거웠던 광주에서의 시간 동안은 피 끓는 가슴으로 이웃들과 함께했지만, 다시 서울이라는 현실로 돌아와서는 딸아이와 자신의 생존을 걱정해야 했으니까. 피터와 만섭이 해후하는 세상, 태술과 만섭의 가족들이 함께 소풍 가는 세상. 그리고 우리가 이웃들과 가슴으로 만나 서로 보듬어 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제는 우리가 핸들을 꺾을 차례다. 우리 모두, 이웃 속으로 유턴!


* 출연진 무대 인사 영상 (7. 10.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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