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지난 9월 4일, 미국 조지아주의 한 공장. 군용 차량과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현장에 미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단속을 피하려는 노동자들은 하수 처리 연못에 뛰어들었고, 붙잡힌 이들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졌다. 한 작업자는 당시를 ‘전쟁터 같았다’고 증언했다. 체포된 475명 중 상당수는 한국 국적자였다.
이 장면은 디스토피아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들리지만, 2025년 가을 미국에서 실제로 한국의 노동자들이 당한 일이다. 그리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바로 이 서늘한 현실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전직 혁명가가 딸을 구하기 위해 다시 총을 드는 액션 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요란한 총성과 정신없는 추격전의 막을 걷어내면,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로 분열된 현대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질문이 드러난다.
영화는 이 거대한 혼돈 속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폭력적인 혁명이 아니라 혈연을 넘어 사랑과 책임으로 맺어진 ‘가족 공동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피보다 진한 아버지의 사랑
영화의 감정적 중심축은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과 그의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 분)의 관계다. 젊은 시절의 혁명적 열정을 모두 잃고 마약에 취해 편집증적으로 살아가는 ‘퇴물’ 밥은 결코 완벽한 아버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은 자신의 신념이 부정당할 때가 아니라 딸 윌라가 사라졌을 때다.
영화는 이 부녀 관계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한다. 윌라의 생모이자 밥의 옛 동지였던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 분)는 혁명 활동을 위해 가족을 버렸고 심지어 동료들을 배신하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영화는 윌라의 친부가 악당 록조(숀 펜 분)임을 밝히며 혈연이라는 전통적 가족의 근간을 흔든다.
이러한 설정 속에서 밥의 헌신은 더욱 빛을 발한다. 생물학적 연결고리가 희미해지는 극의 흐름 속에서 밥의 윌라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책임감은 더욱 처절하고 끈질기게 작동한다. 영화 속에 그려지는 밥의 무능함은 역설적으로 그의 부성애를 더욱 빛나게 한다. 그는 윌라를 키우고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소명으로 삼는다. 이는 피로 맺어진 관계만이 진정한 가족이라는 통념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영화는 밥의 절박한 여정을 통해 진정한 아버지를 만드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함께한 시간과 기꺼이 짊어지는 책임의 무게임을 증명한다.
조용한 연대의 힘, 공동체의 재발견
밥과 윌라의 개인적인 서사가 ‘사랑으로 연결된 가족’을 보여준다면, 세르지오 세인트 카를로스(베니치오 델 토로 분)가 이끄는 공동체는 그 개념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가라테 사범이자 지역 사회의 리더인 세르지오는 폭력적이고 과시적인 저항을 택했던 ‘프렌치 75’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는 ‘이민자들을 위한 지하 철도’를 운영하며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조용하지만 체계적으로 보호한다. 그의 저항은 요란한 구호를 외치거나 폭탄을 터뜨리는 방식이 아니다. 대신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위기 상황에 대비한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는 ‘조용하고 공동체 지향적인 활동’이다. 그의 공동체는 인종, 국적, 이념을 넘어 서로를 보호하고 지지하는 대안적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한때 모든 것을 불태울 듯했던 ‘프렌치 75’의 혁명이 내부의 배신과 시간의 흐름 속에 무력하게 와해된 모습과 고요하지만 굳건하게 유지되는 세르지오의 연대를 선명하게 대조한다. 이를 통해 감독은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은 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공동체에 뿌리내린 꾸준하고 실질적인 연대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가족을 위협하는 혐오의 화신: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영화가 제시하는 대안 가족의 가치를 위협하는 거대한 악의 축은 바로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라는 이름의 백인 우월주의 비밀 결사다. 이 집단은 겉보기의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이름과 달리 인종적 ‘순수성’을 광신하며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권력의 핵심부를 상징한다. 그들은 “위험한 미치광이, 혐오자, 쓰레기”들을 제거하여 세상을 “안전하고 순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순수성이란 곧 백인 우월주의일 뿐이다.
이 집단의 파괴성은 그들의 이념이 개인의 삶, 특히 가족 관계를 어떻게 억압하고 파괴하는지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핵심 악당인 록조가 밥과 윌라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신념의 대립 때문이 아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정식 회원이 되고자 하는 권력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 클럽은 인종 간의 관계를 엄격히 금지하는데 록조에게는 흑인 혁명가 퍼피디아와의 과거 관계와 그 사이에서 태어났을지 모를 딸 윌라의 존재가 자신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결국 록조 개인의 불안과 야망은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 전환되어 한 가족을 무자비하게 짓밟는다. 그의 개인적 불안이 마을의 공포가 되는 과정은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국가 시스템을 통해 개인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가족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단순히 만화적인 악당 집단을 넘어 혈연과 인종의 순수성을 강요하며 사랑으로 맺어진 모든 형태의 대안 가족을 위협하는 우리 시대의 제도화된 혐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혁명의 이름 아래 버려진 가족: 퍼피디아의 복잡한 유산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 외부에서 가족을 위협하는 제도화된 혐오라면 영화는 가족의 해체를 유발하는 또 다른 축을 내부에서 제시한다. 바로 윌라의 생모이자 혁명가인 퍼피디아다. 그녀는 ‘혁명’이라는 대의를 앞세워 가족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또 다른 형태의 이기심을 상징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혁명 활동을 위해 갓 태어난 딸과 밥을 버리고 체포된 후에는 동지들을 배신하여 조직을 와해시킨다. 그녀의 행동은 숭고한 이념이 어떻게 개인의 욕망과 생존 본능 앞에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록조와의 관계는 그녀의 복잡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녀는 단순한 피해자로 머무르지 않는다. 체포 과정에서 록조의 성적 약점을 간파한 그녀는 이후 록조의 권력 앞에 성을 착취당하게 되는 강압적인 관계 속에서 오히려 주도권을 쥐고 그를 심리적으로 압도하려 한다. 이는 굴복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전장(戰場)’으로 삼아 적을 통제하려는 냉철한 전술이다.
하지만 이 처절한 저항 방식은 결국 가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녀의 선택은 혁명의 ‘순수성’이라는 환상을 깨뜨리는 동시에 대의를 위해 개인의 행복과 가족의 유대를 희생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혁명이라는 거대한 명분 아래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한 그녀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밥과 윌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프렌치 75’라는 혁명 공동체마저 파괴했다. 이처럼 퍼피디아는 혐오를 조장하는 외부의 권력뿐만 아니라 대의에 매몰된 혁명가의 변질된 이기심 역시 가족 공동체를 위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인장: 대안 가족이라는 오랜 탐구
혈연을 넘어선 ‘유사 가족’ 혹은 ‘대안 가족’이라는 주제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모티프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망가진 생물학적 가족을 떠나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구원을 찾거나 혹은 또 다른 파멸을 맞이한다.
대표적인 예가 <부기 나이트>의 포르노 영화 제작 공동체다. 주인공 더크 디글러(마크 월버그 분)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로부터 도망쳐 포르노 감독 잭 호너(버트 레이놀즈 분)를 만난다. 잭은 더크에게 대안적인 아버지상이 되어주고 동료 배우 앰버 웨이브스(줄리안 무어 분)는 모성애를 채워주는 유사 어머니가 된다. 이들은 사회의 낙오자들로 구성된 집단이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혈연 가족보다 더 끈끈한 유대를 나눈다.
<매그놀리아>에서는 이 주제가 더욱 확장된다. 영화는 부모의 학대와 방치로 인해 망가진 인물들의 군상을 보여주며 이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얽히며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지를 그린다. 반면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이 주제가 비극적으로 변주된다. 석유왕 대니얼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는 죽은 직원의 아들(H.W.)을 입양해 사업의 얼굴마담으로 이용하면서도 진정한 애정을 보여주지만 결국 아들이 자신의 경쟁자가 되려 하자 “바구니에 담긴 사생아”라며 잔인하게 내친다. 이는 대안 가족 관계가 자본주의적 탐욕 앞에서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냉소적인 시선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가족 탐구가 다다른 가장 희망적인 결론처럼 보인다. 밥과 윌라의 관계는 <부기 나이트>의 유사 가족이 가진 따뜻함과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부자 관계가 마주한 시험을 모두 통과해 낸 가장 순수한 형태의 선택적 가족애를 보여준다.
사랑이 곧 혁명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분열과 혐오가 만연한 시대에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영화의 대답은 명확하다. 거대 담론과 이념의 전쟁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사랑과 신뢰로 맺어진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다.
밥이 피보다 진한 부성애로 윌라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세르지오가 묵묵히 이웃을 지켜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형태의 저항이다. 영화의 마지막, 밥의 축복을 받으며 자신만의 싸움을 위해 시위 현장으로 향하는 윌라의 모습은 이 희망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이 '끝없는 전투'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는 가족이며 서로를 사랑하고 책임지는 것이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