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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거리, 성장의 깊이

<세계의 주인>

by 박재우

주요섭의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가 시대를 넘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여섯 살배기 ‘옥희’의 시선이 가진 독특한 힘 때문이다. 옥희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기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저 현상들을 순진하게 관찰하고 전달할 뿐이다. 바로 이 ‘이해하지 못하는’ 화자 덕분에 독자는 행간의 여백을 스스로 채워 넣으며 인물들의 내면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게 된다. 미성숙한 관찰자의 제한된 시야를 통해 오히려 더 깊은 진실을 보게 만드는 이 영리한 서사 전략은 윤가은 감독의 작품 세계를 여는 중요한 열쇠였다.


윤가은 감독의 전작 <우리들>과 <우리집>은 바로 이 ‘옥희의 시점’을 스크린에 성공적으로 구현해 냈다. 영화의 카메라는 주인공인 아이들의 눈높이에 철저히 머무르며 그들의 감정선에 완벽하게 밀착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뒤흔드는 사건의 표면만을 인지할 뿐, 그 이면의 복잡한 맥락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은 아이의 혼란스러운 눈빛 뒤에 숨겨진 진짜 아픔을 읽어내야 하는 적극적인 해석자가 된다. 이처럼 주인공의 내면에 깊이 공감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 제한된 시야 너머의 진실을 추리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윤가은 감독이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6년 만의 신작 <세계의 주인>에서 윤가은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하던, 그리고 관객이 가장 사랑했던 이 익숙한 화법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더 이상 주인공의 등 뒤에 바짝 붙어 함께 숨 쉬지 않고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3인칭 관찰자의 자리를 택한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닌,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 필연적인 선택이다. 감독 스스로 전작들의 방식에 “매너리즘”을 느꼈고 이 이야기는 한 개인을 넘어 “세계가 그런 개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함께 다루는 것이 중요했기에 새로운 연출적 모색을 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관객의 역할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전작에서 우리가 아이의 감정에 동화되어 함께 아파하는 ‘공감자’였다면 <세계의 주인>에서 우리는 주인공 ‘주인’과 그녀를 둘러싼 세계를 동시에 지켜보는 ‘목격자’가 된다. 영화는 더 이상 주인공의 편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활기차고, 때로는 모순적이며, 이해하기 힘든 주인의 행동들과 그녀를 향한 주변의 시선들을 그저 나란히 제시할 뿐이다. 이로 인해 영화를 보는 경험은 하나의 윤리적 실천이 된다. 우리는 흩어진 정보의 파편들 속에서 ‘이주인, 뭐가 진짜 너야?’라는 영화 속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섣부른 판단의 유혹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시선은 과연 공정한가. 영화는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에 내재된 책임과 가능성을 묻는다.


이처럼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의 무게는 스크린 밖으로까지 이어진다. 얼마 전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의 모임에 나갔다가 뜬금없이 <세계의 주인> 홍보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말문이 막혔다. 줄거리를 설명할 수도, 인상적인 장면을 묘사할 수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스스로 검열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영화는 관찰자인 관객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가 감상의 핵심이라는 것을.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처럼, 이 영화는 “함부로 명명하거나 헤집는 대신 온전히 맡기고 보듬는 연출의 넓고 깊은 품”을 가졌다. 영화는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관객은 2시간 동안 자신의 시선과 편견을 시험대에 올리며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그렇게 관객의 체험이 더해져야 비로소 영화의 가치가 완성되는 작품인 것이다. 감독의 간곡한 ‘스포일러 금지’ 요청은 바로 이 관람의 과정을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 뜻에 동조하기에 나의 홍보 활동은 “꼭 보세요.”라는 한 마디를 전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진귀한 영화적 체험을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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