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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28. 2015

소수의견

우리 모두가 '소수'인 것일까?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에서



“이 영화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며 인물이 실존하지 않습니다”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은 위의 자막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에 펼쳐지는 내용에서 관객들은 세세하게 닮아 있는 현실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우리 주변에 소외된 자들의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국가 권력의 실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 국가 권력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개인 욕망의 민낯까지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영화 하나로 세상이 양심의 평형을 찾아 뒤집힐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크린 앞에 앉아 우리의 추악함을 스스로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오프닝의 자막은 극대화된 풍자의 효과를 거둔다. 관객들은 자막을 본 뒤 ‘정말 허구야?’라는 생각을 하게 될 텐데, 이후의 내용에서 현실의 모습을 보고서는 허구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게 되지 않을까? 씁쓸하지만 통렬한 풍자의 맛이다.



비주류와 소수의 지질한 만남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 박재호(이경영 분). 그는 강제 철거 현장에서 열여섯 살 아들을 잃고 경찰을 죽인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지방대 출신의 국선 변호사 윤진원(윤계상 분)은 박재호의 변론을 맡게 되는데, 박재호는 뜻밖의 사실을 밝힌다. 아들을 죽인 건 용역깡패가 아니라 경찰이라고. 자신은 경찰로부터 아들을 지키려 한 것이므로 정당방위에 의한 무죄라고 주장한다. 

법조계에서는 비주류에 속해 있는 진원은 결국 소수 철거민 재호의 무죄를 입증하려 한다. 주류와 다수에 대항하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탕수육보다는 짜장면


“중국집은 탕수육 때문이 아니라 짜장면 덕분에 산다.” 

이혼전문 변호사 대석(유해진 분)의 신조다. 일찍이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운동권의 삶을 살던 대석은 이제 먹고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탕수육의 풍미를 즐기기보다는 짜장면으로 주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하면서. 

우리네 삶은 다를까? 

정의와 양심의 가치를 지키는 것보다 생존을 위한 돈을 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아닌가? 범죄자의 인권 따위는 엠네스티가 알아서 하겠지 하며 무심히 넘기는 대석처럼 우리에게 남의 일은 관심 밖의 것이 아니었던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파동을 겪으며 누구나 내 손톱 밑에 가시가 더 생생한 아픔이고 절실한 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태의 당사자가 되기 전에는 한 발 물러서 다수의 대열에서 머무르기를 바란다. 그래서 소수는 더 외롭고 힘겹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국가: 일정한 지역·영토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그 구성원들에 대해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치단체이자 개인의 욕구와 목표를 효율적으로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큰 제도적 사회조직으로서의 포괄적인 강제단체이다.

사전의 정의대로라면 국가는 ‘개인의 욕구와 목표를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내용대로라면 이때의 ‘개인의 욕구와 목표’는 ‘탕수육보다는 짜장면’을 외치는 우리들의 욕망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소수가 희생되는 일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나 보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희생과 봉사를 기반으로 하지. 박재호는 희생을 했고, 난 봉사를 했어. 근데 넌? 넌 대체 뭘 한 건데?”

엔딩부의 홍재덕(김의성 분) 검사의 대사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욕망이 박재호의 희생과 홍재덕의 봉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묵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고 부끄럽다.



나는 소수일까?


의사결정이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지는 합의체(合議體)에서 다수의 의견에 포함되지 않아 폐기된 의견을 소수의견이라 한다. 따라서 결정에 대한 반대의견 혹은 채택되지 않은 의견을 말한다. 

이 영화에서는 배심원들이 내린 정당방위에 의한 무죄의 의견이 폐기된 소수의견이다. 배심원들의 만장일치 의견에도 불구하고 판사(권해효 분)는 3년의 실형을 선고한다. 

앞선 맥락에서 논하자면, 이 영화에서 국민참여재판은 욕망화된 개인이 사태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판례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권력에 의해 깡그리 무시된 것이다. 결국 다수의 대중들도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주류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소수였단 말인가?



영화를 보고 나니 생각이 꼬리를 문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소수의 희생 앞에 침묵하는 욕망의 카르텔이 두려워진다. 이 정도의 고민이라도 하게 해 주어서 이 영화는 값지고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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