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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Aug 04. 2015

이중 간첩

누구를 위해 규칙은 지켜지는가?

어느 사과 농장의 숙소에는 노동자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적혀 있다.


1. 침대 위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 것
2. 술을 먹고 기계를 작동하지 말 것
3. 지붕 위에서 자지 말 것
4. 지붕 위에서 점심을 먹지 말 것, ……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흑인 노동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 주인공 청년이 그 곳에 와서 벽에 쓰여진 규칙 하나하나를 읽어 줄 때, 그들에게 그 규칙은 실생활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규칙은 오직 규칙을 만든 사람들의 것일 뿐이다.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사이더 하우스(The Cider House Rules)’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여러 가지 규칙들이 있다. 그리고 규칙 안에 존재하는 자들과 그 밖에서 떠도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대개 전자의 위치에서 보장된 삶을 원하며, 후자를 배척한다. 규칙이라는 울타리 안의 사람들에게 울타리 밖의 사람들은 안정을 위협하는 아웃사이더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서 가장 선명하고 두터운 울타리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에 놓여 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 국가인 우리의 상황을 돌아볼 때, 그 울타리는 아직도 견고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규칙의 허위성으로 볼 때, 이 견고한 울타리도 사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무의미하다. 이미 울타리가 그 곳에 있기에 어느 한 편에 삶의 둥지를 틀기는 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가져다 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 이러한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이 땅에서는  고통받아 마땅한 시절이 있었으니, 그 이념이라는 망령의 폭력성은 실로 위력적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 ‘이중 간첩’은 이러한 이념의 허위와 폭력성을, 개인의 죽음과 그로 인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타이틀백에서는 김일성 광장을 행진하는 인민군의 기계적 모습이 부각된다. 이념화의 결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무리 지어 작동하는 그들에게서 개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주인공 림병호(한석규 분)가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귀순한다. 우리가 매스컴에서 본 것처럼 따뜻한 자유 세계의 환영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림병호는 남한의 정보 기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울타리 밖 사람이 울타리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거쳐야 할 통과의례는 바라보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 낸 그는 드디어 남한의 일원이 되고, 서서히 그의 삶도 안정을 찾아간다.

그런 즈음, 그는 남한의 고정 간첩인 윤수미(고소영 분)을 만나며 위장 간첩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임무 수행을 위해 만난 그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정치적 아버지인 청천강(송재호 분)>가 같은 이념적 남매였다. 그런 그들의 관계는 윤수미가 림병호에게 라이터를 선물하면서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청천강의 신분이 노출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림병호는 당과 조국을 위하여 그의 정치적 아버지인 청천강을 각목으로 후려친다. 그리고 당의 지령에 따라 그를 제거하려고도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윤수미의 배신으로 그의 결심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그는 당을 배신한 윤수미를 제거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를 죽이려는 순간에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랑 속에서 그는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울타리의 허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진실과 대면한 그는 이제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제3국행. 일찍이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죽음을 인식하며 광장을 꿈꾸며 바다로 투신한 것처럼 림병호 또한 죽음을 각오하며 사랑이 존재하는 광장을 찾아 제3국으로 떠나게 된다. 결과는 예상대로 타국에서의 허망한 죽음. 그 뒤로 이어지는 슬프도록 평온한 윤수미의 기다림. 죽음과 사랑의 미완성으로 본다면, 너무도 비극적인 결말이다. 하지만 ‘이념의 개’가 아닌 순수한 개인으로서의 삶에 초점을 둔다면, 그 짧았던 순간은 림병호나 윤수미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리라…….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엔딩 크레딧이 거의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가볍게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80년대의 어두웠던 시대상이 가슴에 묵직한 추로 매달린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당시의 만화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이북 사람들은 모두 눈이 빨간 탐욕스러운 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믿는 순진한 철부지였다. 삐라를 주워 선생님께 칭찬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반공’을 유행가 가사처럼 부르짖던 아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절을 생각하면 몸서리치게 무서워진다. 울타리의 견고함을 믿으며 한 아이가 평화를 느끼고 있을 때, 어느 이념의 밀실 속에서는 울타리의 훼손을 막기 위한 진실의 조작에 한 개인이 피 흘리며 쓰러져 가던 그 이중적인 시절. 영화를 통해 그 흔적과 마주치고 말았다.

인간은 강한 동시에 약한 존재이다. 그러한 양쪽 이유 모두로 인해 인간들이 어울려 사는 곳에 울타리는 꼭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울타리는 오히려 개인을 그 안에 가둬 버리고 만다. 개인의 불합리한 희생을 제물로 더욱 높아져 가는 울타리는 이제 우리 손으로 거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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