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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Aug 06. 2015

위플래쉬(Whiplash)

오직 예술을 위하여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위플래쉬’에 대한 해석은 ‘스승과 제자의 대결’이라는 큰 틀에서 논의되어 왔다. 주로 폭력적인 교사의 행위와 그에 대한 제자의 통쾌한 복수극에 초점이 맞춰졌다. 충분히 가능하고 의미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핵심인 음악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살펴보려 한다. 모든 것을 바쳐 예술적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젊은 예술가의 성장기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되짚어 보겠다.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는 ‘생명(인간)을 위한 예술’에 대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예술은 인생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미(美)에만 봉사하여야 하며, 그 자신의 미적 완성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하는 예술의 자율성(自律性)을 극단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이다.


이청준의 ‘서편제’에서 이런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소리꾼 아버지는 자신의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넣어 딸을 맹인으로 만든다. 앞을 못 보는 한을 예술로 승화시켜 애달프고 구성진 소리를 완성하려 한 것이다. 인륜의 관점에서 보면 금수(禽獸)만도 못한 끔찍한 행동이지만, 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의 완성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 되는 셈이다.


이제 앤드류(마일즈 텔러 분)와 플렛처(J.K. 시몬스 분)를 살펴보자. 음악대학의 신입생인 앤드류는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최고만이 들어갈 수 있는 플렛처 교수의 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최고 그룹 안에 들어가게 된 기쁨도 잠시. 그는 혹독한 플렛처 교수의 지도에 눈물까지 흘리고 만다.

이전까지의 앤드류는 어땠을까? 드럼을 좋아하고, 잘 친다는 소리를 꽤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드럼을 즐기면서 자기만족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예술가의 세계로 진입하려면 이런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냉엄한 예술적 기준에 따라 스틱 잡는 법부터 기본 박자까지 제대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앤드류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플렛처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적 기준을 폭력적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는 인물이다.


플렛처는 말한다.

“너희가 한계를 넘어서는 걸 보고 싶었어. 루이 암스트롱이나 찰리 파커 같은 뮤지션이 나오기를 말야. 하지만 너희 중에 제2의 찰리 파커는 없었어. 찰리 파커가 존스가 던진 심벌즈에 맞지 않았다면, 존스가 심벌즈를 던지는 대신 ‘Good job~!’이라고 말해 주었다면 버드(찰리 파커가 유명한 연주자가 된 후에 붙여진 별명)는 세상에 없었겠지. 생각만 해도 그건 비극이야.”

플렛처가 추구하는 것은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만하면 잘 했어(Good job~!)’라는 말을 혐오한다. 그런 말은 연주자를 배려할 때나 쓸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겐 연주자의 인격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예술적 아름다움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는 밴드의 연주자들에게 폭언을 하고, 폭력까지 행사하며 아름다운 소리를 뽑아내려고 한다. 플렛처가 자신의 제자 션케이시의 죽음을 알리며 그가 남긴 연주 CD를 틀면서 눈물을 보이는 장면이 있다. 그때 그가 애도한 것은 인간 션케이시가 아니라, 션케이시가 남긴 음악이었다. 인간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기리는 그의 모습. 미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예술지상주의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앤드류는 플렛처의 채찍질을 맞으며 점점 광기를 드러낸다. 음악에 몰두하기 위해 사귀던 여자 친구를 차 버린다. 다른 사람은 최고가 아니라며 다 무시해 버리는 오만한 태도로 주변 친지들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경연대회 레귤러 자리에 앉기 위해 교통사고를 당한 채로 피 흘리며 연주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앤드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플렛처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밴드, 혹은 학교에서 제일가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프로 연주자로 데뷔하기 위해서? 앤드류가 보여 준 극단적인 행동들의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앤드류는 자신의 소리를 완성하기 위해 그 혹독한 길을 걸은 것이 아닐까? 예술가는 예술적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영혼까지 쏟아 부으면서 고통스럽게 예술적 행위를 하고, 그 결과에 행복해하기를 반복한다. 그 고뇌와 행복이 교차하면서 예술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앤드류의 모습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 결국 앤드류는 자기 예술의 미적 완성을 위해 광기 어린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플렛처는 완성적 경지에 오른 예술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앤드류의 내면에 존재하는 예술적 자아다. 예술적 자아는 끊임없이 인간적 자아를 채찍질(Whiplash)하여 음악의 완성에 앤드류가 기여하게 한다. 이러한 두 자아의 관계는 엔딩부에 잘 드러나고 있다. 플렛처의 도발에 무아지경의 연주로 응수하는 앤드류. 앤드류와 파국까지 치달았던 플렛처는 앤드류가 드럼 솔로를 하는 순간에 햇이 풀리자 다가와서 햇을 다시 감아주면서  완성을 돕는다.


망망 창해에 탕탕(蕩蕩)한 물결이라,

백빈주 갈매기는 홍요안에 날아들고…….


여자가 마침내 소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내는 그 여자의 오장이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 속에서 자신도 문득 그것을 본 것이다. 사립에 기대어 눈을 감고 가만히 여자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사내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온 옛날의 그 비상학이 서서히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소리가 길게 이어져 나갈수록 선학동은 다시 옛날의 포구로 바닷물이 차오르고 한 마리 선학이 그곳을 끝없이 노닐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사내는 여자의 학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청준, ‘선학동 나그네’ 중에서


소리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없던 학이 날아들고 포구에 물이 차오른다. 예술적 완성이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순간이다. 그 순간 속에 있는 사람들은 꿈을 꾸듯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을 보는 눈. 그 눈이 바로 엔딩씬을 장식한 플렛처의 시선이 아닐까? 영화 내내 갈등하던 인간적 자아와 예술적 자아는 미적 완성이라는 예술의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환희에 찬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고뇌와 행으로 범벅이 된 무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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