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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후 다시 응급실로

수술이 잘못된 걸까?

2021년 10월 27일 수요일


퇴원 후, 집에서 하루를 잤다.


병원 침대는 상체 쪽을 올렸다 내렸다 해 주는 덕에, 침대서 일어나기가 좀 수월한 편이었는데, 집에는 그런 침대가 없으니 통증 때문에 침대에 눕는 것도, 다시 일어서는 것도 고역이다.


밤에 침대에 누웠으나, 똑바로 눕는 것이 녹록지 않아, 거실에 있는 뒤로 젖혀지는 일인용 소파까지 이불을 갖고 가서 새벽 역 겨우 잠을 취했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신랑의 점심 도시락 만드는 소리에 눈을 뜨니 몇 시간이나마 겨우 잠이 들었나 보다.


일어나 학교 가는 애들을 배웅한 뒤, Oat meal을 만들어 먹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다. 결국 몇 숟갈 뜨다가 먹기를 포기했다. 걷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배에 통증이 심하다.


앉아서 자는 게 너무 힘들어 침대에 '끙끙' 거리며 몸을 눕혀본다. 살콤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다.


옷을 갈아입고, 얼굴도 대충 닦아 보았다. 점심으로 누룽지를 물에 불렸다. 몇 숟갈 뜨다가 또 먹기를 포기했다. 속이 좋지 않다.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부풀어 있는 기분이다.


조심스럽게 만져본 내 배가 너무 단단한 느낌이 든다. 마치 임신해서 배가 불러온 것처럼 단단하다. 배가 아파서 힘을 줄 수가 없다.


오후 4시 30분경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것을 자각했다. 열을 재보니 38도가 넘었다. 타이레놀을 먹고 다시 힘겹게 누워보았다. 잠이 든 것일까?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 목소리와 신랑의 전화 통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다시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배가 너무 아파서 누워있는 상태가 갑자기 버거워진다. 다시 침대 옆 옷장을 부여잡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앉았다.


오후 9시경 몸이 다시 추워진다. 열을 재보니 다시 38도를 향하고 있다. 그대로 잠바를 걸치고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이제 아이들은 자러 갈 시간이다. 잠자리 준비를 끝낸 막내를 보며, 불편한 마음을 접어두고 집을 나섰다.


오후 9시 40분경 

응급실에 도착해서 월요일에 와서 했던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옆에 신랑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Check-in을 하고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내 이름이 불리자, 어기적 어기적 걸어서 booth로 가 앉는다.


다시 질문이 시작된다. 언제나처럼 응급실 방문 이유를 물으며 혈압과 심박수 그리고 체온을 체크한다.


"I had the appendectomy on Monday night and was discharged on Tuesday. I have diarrhea from Tuesday afternoon and still have it. I got developed high fever in this afternoon and have been dealing with too much pain"


"Where did you get your appendectomy?"


"여기, 이 병원"


나의 대답에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는 그녀의 손이 빨라지고, '삑' 소리를 내며 검사를 끝낸 기계음을 들으며 기계 속 숫자를 확인한 그녀의 행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월요일과 다르게 순식간이었다. Check-in booth에서 나를 체크한 간호사는 다급히 나를 응급실 진료대기 장소로 바로 안내를 해 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급하게 피검사를 하는 사람을 찾더니,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채혈을 하기 시작했다.


"We have to take some blood sample for the blood culture test for you."


그렇게 설명을 해 주면서 간호사와 lab 간호사는 커다란 혈액 컬렉션을 위한 병 4병을 갖고 왔다. 정말 컸다. 지금까지 보통 피검사를 한다고 갖고 오던 병의 5개는 쑤욱 안에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Blood culture test에 대한 설명
출처 인터넷 검색: blood culture bottle

인터넷에 찾아보니 혈액 배양검사는 핏속에 감염 반응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행된다고 한다.


피검사와 동시에 내 팔에는 또다시 IV 주사 바늘이 끼어졌다. 그리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날 위해서인지, 간호사가 휠체어를 끌고 왔다.


응급실 담당 의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고, 나는 심장 ECG test를 받았다. 그냥 간단한 검사였다.


내가 누울 자리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 휠체어에 앉아 또 다른 남자 간호사와 여기 온 이유를 다시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왜 매번 이들은 서로 다른 종이를 갖고 와서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답을 받아 적는 것인지 컴퓨터로 하면 간단한 것을)


그렇게 어느 정도 대기 시간이 지나자, 나를 위한 방이 준비되었다며 나를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한참 기다렸다. 또다시 기다림이라는 인내를 키워간다. 


그렇게 기다림이 지겨워 질 때쯤, ECG검사를 하기 전 잠시 만났던 응급실 담당 의사를 다시 만났고, 타이레놀을 처방받았다.  


잠시 후, 임시 방이 아닌 응급실에 있는 병실이 나에게 주어졌다. 새벽 1시를 향하고 있었다.


내 방은 15호실이었다. 방에는 환자 침대와 침대 옆에 놓을 수 있는 테이블(환자 식사용 및 물 등 물건을 놔두기 위한), 보호자를 위한 의자와 간이 변기용 의자가 함께 있었다.


가 건물을 만들 때 쓰는 철제를 연결해 만들어 놓은 방이었고, 문 한쪽에만 나의 얼굴 높이쯤, 창문이 하나 달려있었다.

방구석에 놓인 산소통과 옆에 설치된 바이탈 체크 기계를 보며, 혹시 코로나로 인한 환자들이 입원해 있던 공간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간호사는 내 왼팔에 혈압 체크 벨트를 채워주더니, 15분 간격으로 혈압을 체크했고, 화장실도 못 가게 하면서 병실에 있는 간이 변기용 의자를 사용하도록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응급실에서 바이탈 체크 당시 내 혈압이 저혈압으로 나와서, 내가 혼자 걷다가 실신할까 봐 간호사들이 날 꼼짝도 못 하게 한 것이었다.


새벽 2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 간호사 한 분이 휠체어를 끌고 내 방을 찾아왔다. CT를 찍으러 가야 한단다.


끙끙 거리는 나를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CT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있을 정도로 배의 통증은 응급실을 오기 전보다도 더 악화되어 있었다.


새벽 4시, 수술팀 레지던트라고 소개하며 의사가 왔다. CT 결과상 뱃속에서 pus(고름)이 발견되었단다. 사이즈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이즈가 크다고 판단될 시, 다시 배를 여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


'다시 수술'이라는 말에 한동안 넋이 나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계속 병원에 있어야 하냐"는 질문에 의사는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대답을 준다.  결국 난 오늘 이렇게 집에 못 가는구나..


옆에서 함께 지쳐 졸고 있는 신랑을 집으로 보냈다. 아침에 아이들 도시락도 싸야 할 안쓰러운 양반, 잠이라도 짧게나마 편하게 자라고.. 여기 같이 있어도 무슨 할 일이 더 있겠냐 싶어 집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얼마 있지 않아, 담당 간호사가 항생제라며 링거를 걸어주고 나갔다. 간호사는 더 이상 찾을 일이 없을 테니 잠을 좀 자라 한다.


진통제라며 건네 준 작은 알약을 먹었는데, 그 뒤로는 실신을 한 듯 잠이 든 거 같다. 간간히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발걸음 소리, 내 옆에서의 움직임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난 한 동안 정신을 잃고 눈을 뜰 수 없었다.


그 약이 그런 약이었나 보다.


오전 8시경

수술을 해 주었던 의사가 나를 찾아왔다.


다행히 고름 사이즈는 크지 않으니, 항생제만으로 치료가 가능하다며, 항생제 치료를 위해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한다. 오늘 나는 병실로 옮겨질 거라며 간단히 알려준 뒤, 그는 그의 갈 길을 갔다.


얼마나 남겨진 것일까?


유달리 배 위쪽, 위가 아파서 괴로워하는 나를 위한 배려인지, 병원식이 나왔는데 chicken broth와 젤로가 나왔다.

응급실에 머물며 받은 음식은 치킨broth와 젤로었다.

짠맛과 단 맛의 조화라니, 아무것도 없는 치킨 국물에 체리맛 젤로를 혀로 느끼며 먹는 것도 고통이 될 수 있구나 싶다.


국물을 삼켜도, 젤로가 부스러져 내 목구멍을 넘어가도 내 위는 찢어질 듯 아파와서 괴롭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병실로 올라갔다. 분명 날 위한 병실이 있다고 했는데, 나를 위한 건, 방이 아니라 병동 복도 구석에 설치된 병원 침대..


저 창문 옆에 병동 입구가 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역할을 했다. 다들 쳐다본다.

토요일까지 이 복도에서 지냈다. 다행히 첫날밤 당직을 맡은 간호사 "Jenny"(수술 다음 날, 담당 간호사로 내 퇴원을 도와줬던 사람이다)는 친절하게도 날 위한 가름막을 2개 찾아와서 내 공간을 분리시켜 주었다.


침대 바로 맡은 편에 화장실이 있는 덕분에 화장실 쓰기는 힘들지 않았고, 항생제 투여로 몸을 조금 더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가름막만  젖히면 보이는 저 넓은 복도를 혼자 슬슬 걸어 다니며 운동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루 넘게 먹어야 했던 젤로 밥은 3일째 되던 때, 더 나은 음식으로 바뀌어서 조금 더 살만 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 병원식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젤로만 먹던 내가 먹을 수 있다는 사실민으로도 행복했다.

젤로만 먹인 위는, 통증이 슬슬 가라앉자, 배고프다며 발악을 해 댔고, 의사랑 상의를 한 후, 일반식으로 넘어가 보자는 의견을 듣고, 겨우 식사 다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전 8시, 오후 12시 30분 그리고 오후 5시면 나오는 병원식을 먹으며, 밥시간만 되면 배고프다 소리치는 위의 울부짖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게 얼마만인지..


정확한 시간에 주어지는 음식과 매 식사 중간 간식으로 위를 채우지 않는 일과는 위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던 거 같다.


치료받는 기간 내내 몸의 열을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고, 병원에서 달아주는 3번의 항생제 치료와 4~6시간마다 주어진 해열제와 진통제 약을 먹으며 견디어 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전보다 몸을 움직이기 수월한 게 느껴져서 다행이다 싶었다.


금요일 오전에 온 레지던트 말로는 혈액 배양 검사에서 박테리아가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한다. 결국 내 핏속에 있는 박테리아로 인해 나의 전체적인 컨디션이 무너지는데 한몫을 한 것이다.


매일 오전마다 시행되던 피검사에 더불어 또다시 혈액 배양 검사를 한다며 또 커다란 통에 채혈을 해 갔다.

매일 아침마다 체혈을 통한 피검사가 이루어졌다. 주사 바늘 덕에 팔에 여기저기 멍이 생겼다.

혈액 배양 검사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하루반~2일이 걸린다고 한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퇴원이 무리일까?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하며 병원에서의 긴 하루를 견디어 갔다.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 나에게 방이 생겼단다. 하지만 막상 방에 들어가니 복도에 있던 내 공간이 그리워진다. 답답하다. 오고 가는 방문자들의 변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니 시간을 보내주었는데, 그 마저도 사라지고 옆에 있는 젊은 남학생의 불평 가득한 소리와 간호사들의 실랑이 소리에 머리마저 아파오는 기분이다.


오히려 복도에 있는 시간 동안 나의 마음은 더 평안했었나 보다.


일요일 오전, 혈액 검사가 나쁘지 않으니 퇴원을 하라 한다.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수술 후에도 처방받지 않았던 약 처방전을 끌어안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찬란한 한 주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집에 가는 이 시간, 비는 안 내리는구나. 끊임없이 쏟아지던 비가 잠시 쉬어갔던 햇살 찬란한 주일, 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만한 큰 아이들이 주는 반가움의 포옹과 아직은 작은 어깨로 나로 힘겹게 끌어안는 아이들의 포옹을 함께 느끼며, 가슴속에 보고 싶었던 그리움의 감정을 녹여내었다.


이제 다시 건강해져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을 다시 살아나갈 준비를 하자한다.


덕분에 안쓰러운 아이 넷 아빠는 당분간 큰 마나님을 모시고 살겠지만, 나 이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는 거 같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안 보이는 척, 눈을 감고 회복의 시간을 지내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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