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로 가는 길

진도 여행 이야기 (4)

by memory 최호인

1.


진도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이 왔다.

향숙은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해야 한다고 나에게 일찍 오라고 했다. 그날 아침 나는 여행 숙소를 옮기기 위해서 일찌감치 여행 가방들을 챙겨서 숙소 건물 지하실에 있는 창고로 옮겨 놓았다. 여행 후에 나는 같은 건물의 다른 방으로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그래서 여행 기간 동안 가방을 창고에 보관했다가 여행이 끝나는 일요일 밤에 새 숙소로 가지고 올 예정이다. 지하실에는 캐비닛들로 이뤄진 창고가 있어서, 딸의 물품과 내 가방들을 충분히 넣어 둘 수 있었다.


등에 멜 작은 여행 배낭 하나만 달랑 챙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딸과 함께 테헤란로 4길에 서 있으려니까 이모님이 오셨다. 작년에도 대학 동기 친구들과 주말여행을 갈 때 나는 이모님에게 딸을 맡겨 둘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여행 기간 동안 딸은 이모님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이모님은 내 딸과 함께 가족 모두 강원도로 여행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굳이 강남에 숙소를 정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모님 댁이 숙소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이런 부탁을 드리기도 편하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이모님은 딸을 예뻐하셨다.


8월 2일 오후 1시.

나는 향숙과 작은 희선을 코아 백화점 1층에서 1시에 만나기로 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먼저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여행 멤버들은 2시에 백화점 지상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2호선 고속 터미널 역에서 내린 나는 코아 백화점이 의외로 매우 먼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하상가를 통해 거의 1킬로미터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지하철 밖으로 나가면 무덥고 가는 길이 더 복잡할 것 같기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지하상가에는 수많은 가게들이 즐비해서 걷기에 심심하지 않았다. 지하상가의 통로가 좁지는 않지만 금요일 낮이라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갔기 때문에 통로는 좁게 느껴졌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는 서민들을 위한 쇼핑 매장으로서 서울에서 유명한 상가 중 하나라고 한다. 지하상가에는 옷 가게가 가장 많아 보인다. 내 눈에 모두 비슷해 보이는 옷들이 그 많은 가게들에서 비슷하게 진열되어서 저렴한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의 가게들을 보니까, 한국에 있는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또 느껴졌다. 가게도 많지만 사람도 많은 만큼, 장사가 잘 되는 가게는 정말 잘 되고, 안 되는 가게는 금세 망할 것만 같이 보였다.


향숙이 카톡에서 미리 나에게 연락한 대로, 나는 식품 매장으로 갔다. 향숙은 백화점 식품 매장 과일 코너에서 과일들을 고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차 안에 싣고 가야 했기 때문에 보관하기 쉽고 먹기 쉬운 복숭아와 자두 정도를 샀다. 향숙은 가능하면 현지 상권을 위해 현지에서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지방 상권을 위해 좋은 생각으로 들렸다. 거창한 구호나 정치적 헛소리보다 이런 작은 배려가 모여서 사회를 밝고 명랑하게 하는 법이다. 우리는 카트를 준비해서,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담았다. 과일과 과자와 빵과 물 등이 카트에 실렸다.


원래 1시까지 오기로 했던 작은 희선은 늦게 출발한 데다 버스가 예상보다 느려서 제시간에 올 수 없다고 했다. 향숙과 나는 먹을 것을 담은 카트를 가지고 백화점 1층 주차장으로 갔다. 2시가 다 되어 희선과 재관과 정상이 나타났다. 진태는 규범의 차를 몰고 나타났다.


희선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진태는 대학 시절 이후 처음 보았다. 희선은 말이 빠르지 않아서 그런지, 차분하고 친근한 성격을 가진 듯했으며 붙임성도 좋았다. 진태는 대학 다닐 때와 성격이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며, 앞 머리가 벗어진 것만 빼고는 여전히 젊어 보였다. 재관은 내가 이번에 서울에 왔을 때 다른 친구들과 이미 만났었다. 진태는 차 주인인 규범이 없이 그의 차를 운행해야 하기 때문에 임시 자동차 보험을 얻었다고 했다. 준비성이 참 대단하다. 이번 여행에는 진태와 재관이 교대로 운전하기로 했다. 백화점 지하실에서 산 물건을 차에 싣고 나서 우리는 곧바로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2.


하늘은 비교적 맑았고, 우리의 여행은 드디어 시작되었다.

오후 2시에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는 중간에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진도로 바로 가기로 했다. 전라남도 끝에 있는 진도까지는 먼 길이었다. 진태와 재관은 운전사들이라 앞 좌석에 앉았다. 중간과 뒤에 앉은 네 명은 재잘재잘 떠들면서 과자와 빵을 먹었다. 여럿이 가는 여행에서는 이런 재미가 쏠쏠하다. 진도로 가는 고속도로는 경기도에 이어 충청남도와 전라도 등 한국에서는 가장 넓은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산들이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보였다. 작년에 안동~삼척 여행에서 산들이 도로에서 가까워 보였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눈이 더 시원했다는 말이다.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고속도로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들어차 있었다. 6인승 차에 6명이 모두 타면 버스 전용 차선을 이용해도 된다고 정상이 말했다. 규범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는 그의 정보가 정확한지 아닌지는 불분명했다. 그 헷갈림은 그 교통 규칙이 맞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시작했지만, 곧바로 확신으로 변했다. 우리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버스 전용 차선으로 들어섰다. 우리 차는 옆 차선에서 답답하게 움직이는 차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내달렸다.


첫 휴게소에 들어섰다.

한국의 휴게소는 먹거리로 유명하다. 언젠가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를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먹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 적도 있다. 물론 작년 여름에도 고속도로 휴게소에 여러 차례 들렀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도 휴게소에 익숙한 편이다. 다양한 음식들이 있는 휴게소는 여행을 즐겁게 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한식 중식 분식은 물론이고 각종 군것질거리까지 다양하다. 종류가 많아서 어떤 것을 먹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정도다.


한국의 휴게소에서 특이한 것은 휴게소 입구에서부터 음악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노래 CD 등을 파는 가게에서 노래를 계속 크게 틀어놓기 때문이다. 작년에 휴게소를 들를 때마다 자주 들었던 그 큰 음악 소리는 그새 규제 대상이 되었는지 이번에는 모두 사라졌다.


휴게소에 들어서자마자, 진태는 점심시간이라면서 다짜고짜 혼자서 자장면을 사 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커피를 사서 나누어 마셨다. 무더운 8월 초의 날씨임에도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재관이는 4천 원이나 되는 비싼 커피를 사 마실 수는 없다고 했다. 커피값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는 그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한국에서 커피를 살 때마다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한다.


이 휴게소에서 커피는 4천 원이지만, 어떤 카페에 가면 6천 원도 한다. 내가 이번 한국 방문에서 본 최고 가격은 6500 원이었다. 그냥 커피 한 잔이었는데. 그렇다고 그 커피 맛이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물론 카페 주인은 자기 집 커피 원두가 좋은 것이라는 시답잖은 설명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나 같이 커피 맛에 둔감한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 미묘한 커피 맛의 차이를 모르는 것에 대해 미안해야 할 느낌이 들 정도다.


커피가 비싸다고 불평한 재관이는 잠시 사라졌다가 강냉이 한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천천히 오래 씹어먹을 수 있는 강냉이가 봉지 안에 한가득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성비가 갑이다. 경주 출신인 그는 말도 느릿한 편인데, 말의 첫머리가 낮게 시작하는 그만의 독특한 사투리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대학 시절부터 재관이 조선 시대 양반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작은 희선은 그새 어디선가 요구르트를 사 왔다. 액체 요구르트였는데 맛은 있지만 아주 진했다. 결국 모두 한 모금씩 그 건강 액체를 나눠 마셨다.


3.


더운 여름에도, 웬만하면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습관이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아메리카노 (americano)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단어가 언제부터 한국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다 뜨거운 물을 섞어서 주는 음료이다.


유럽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든지 아니면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거품 우유를 섞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2차 대전 때 이탈리아에 온 미군 병사들이 에스프레소의 쓴 맛이 싫다고 해서 거기에다 물을 부어서 마셨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고급스러운 커피를 마실 줄 모르는 미국인들이 에스프레소를 물로 희석시켜서 연하게 만들어 물 마시듯 마신다고 해서 '아메리카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아메리카노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커피머신에서 드립 된 커피를 '블랙커피 (black coffee)'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런 커피를 자주 마신다. 요즘은 가정용 에스프레소 기계가 많이 보급되어서 점차 다른 경향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여간 만약 한국인들이 자주 마시는 커피라고 해서 '코리아노'라고 부른다면 약간 이상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일반적인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나 다이너 같은 식당 등에서는 아직도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로지 스타벅스 같은 곳에 들어가서야, 그곳에 있는 메뉴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할 수는 있겠다.


일반적인 레스토랑과 다이너에서는 커피를 달라고 하면 웨이터가 블랙커피를 가지고 올 테고, 손님이 원하면 우유와 설탕을 따로 줄 것이다. 편의점에서 종업원에게 커피를 요구할 때는 (레귤러) 커피는 블랙 커피를 말하는 것이고, 우유나 해프 앤드 해프에다 설탕까지 넣고 싶으면 coffee with milk (또는 지방이 훨씬 많은 half and half) and sugar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맨해튼 거리를 걷다가 편의점에 들어가서 (레귤러) 커피를 주문하면, 종업원은 블랙커피만 컵에다 준다. 이것은 물론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커피메이커에서 만든 드립커피일 때가 많다. Coffee with milk and sugar를 주문하면 커피 기계에서 드립 되어 나온 블랙커피에다 우유를 들이붓고 손님이 원하는 대로 설탕을 한두 숟가락 퍼 넣을 것이다. 물론 드물게 설탕 봉지를 따로 주는 경우도 있다.


Coffee with milk and sugar는 한국의 '다방 커피'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민사회 한국인들끼리는 농담 삼아 coffee with milk and sugar를 '다방커피'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아메리카노가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이민사회에서는 블랙커피를 마시면 이민 온 지 오래된 사람이라고 장난 삼아 말했었다. 예전에 한국에서 갓 온 사람은 블랙커피에다 우유와 설탕을 넣고 마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타벅스가 유행하기 전 20세기의 일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아메리카노가 유행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갓 온 사람들이 오히려 블랙커피를 마시는 것을 당연시한다.


작년 여름 서울에서, 한 번은 내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서 따로 우유와 설탕을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나는 보통 블랙커피를 마시지만, 가끔 피곤해서 당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우유와 설탕을 섞어 마신다. 그랬더니 종업원은 그러려면 카푸치노를 시키지 그랬냐고 말하길래 머쓱한 적이 있다. 카푸치노는 다른 건데,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미국에서 카푸치노는 일반 커피에 비해 가격이 1달러 이상 비싸다. 한국에서는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의 가격 차이가 별로 없는 편이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인스턴트 커피 또는 커피메이커에서 만든 뜨거운 커피를 물처럼 마시다가, 스타벅스 같은 커피 전문점이 늘어나면서 커피 시장의 판도가 달라졌다. 스타벅스는 기존 식당들과 달리 커피를 세분화하고 높은 가격으로 블랙커피와 다른 차원의 아메리카노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로써 미국에서 일반인들에게도 아메리카노가 재탄생했다. 사실 과거에는 아이스커피 (iced coffee)라는 것이 없었다. 커피라면 으레 뜨거운 커피였다.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다. 커피에다 얼음을 섞어 마시다니!


블랙커피는 끓이든 (brew) 방울방울 흘리든 (drip) 커피 외에 아무것도 섞지 않는다. 이에 반해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espresso)에다 뜨거운 물을 섞는 방식이다. 에스프레소는 원두커피를 갈아서 압축한 후 뜨거운 물을 고압으로 통과시켜서 뽑아낸 진한 이탈리아식 커피다. 여기에다 급속히 끓인 우유를 넣으면 카푸치노가 된다. 요즘은 가정 내에도 과거의 커피메이커를 넘어 에스프레소 기계를 두고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이 늘었다. 과거처럼 커피 가루에다 뜨거운 물을 흘려서 나오는 드립 커피를 마시는 것과는 과정이 다르다.


하여간 블랙커피와 아메리카노는 다른 종류의 커피다. 하지만 나처럼 커피 맛에 민감하거나 까다롭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아메리카노나 블랙커피나 별로 차이가 없다. 그래서 서울에 와서 처음에는 아메리카노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블랙커피를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종업원이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실 나도 내가 왜 더운 여름에 계속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지 잘 모르겠다. 커피는 뜨거워야 커피지, 하는 마음으로 40년 넘게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와서 보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내가 보기에는 커피 맛이 나는 차가운 음료수 같이 보인다. 나는 강남역 숙소 건물 옆에서 아침마다 특별히 1500원에 파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했는데, 가게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다 보면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이상한 사람 같다.


하여간 결론은 한국에서 커피는 매우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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