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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r 13. 2024

진도로 간 이유

진도 여행 이야기 (6)

진도는 꽤 넓은 섬이다.

나는 진도가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섬임을 다시 깨닫는다. 한국에서 커봤자 섬인데 얼마나 되겠나 하면서 진도를 과소평가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진도대교를 건넌 후 간간이 가로등이 비치는 어두운 밤길을 따라 20여분 정도 지나서야 정상의 집에 도착했다.


정상의 집은 진도 안에서도 남단에 있었다. 어둠 속을 달리던 우리는 이윽고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어촌 마을은 도시와 달리 토요일 밤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조용했다. 마을 도로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깊은 시골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시골 거리에는 밤이 찾아오면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이라곤 별빛과 달빛뿐이기 때문이다.


바닷가 어촌 마을 안에 있는 정상의 집은 본래 새마을금고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의 정면 입구는 여전히 새마을금고 입구처럼 유리문이 있다. 그 이중 유리문 앞은 쇠창살로 막혀 있다. 입구 오른편에는 동백나무가 있고, 그 옆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남파랑색 넓은 철문이 닫혀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그 밤에 새마을금고의 주차장 입구는 하필 웬 트럭이 가로막고 있었다. 오랫동안 주인이 오지 않는 집이라 여긴 마을 주민이 트럭을 주차한 것이었다. 다행히 트럭 앞부분에 전화번호가 있었다. 재관이 전화를 하자, 트럭 주인이 서둘러 나와서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차를 옮겼다. 시골이고 이웃이라서 그런지 순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양쪽으로 여는 철문으로 막혀 있었고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주차장은 차 한 대가 들어가고도 양옆에 공간이 넉넉하게 남을 정도로 넓었다. 주차장 왼편에는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집 뒤로는 작은 언덕이 바투 붙어 있었다.


그 집은 정상이 지난봄에 샀다고 한다. 그가 진도로 은퇴할 것을 염두에 두고 샀으며, 현재 천천히 진행 중인 서울 생활을 정리하면 갈 집이라고 했다. 정상이 하필 진도에 집을 산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진도에다 집을 샀다는 말을 듣는 사람마다 모두 궁금해했다.


”진도? 어디에 있는 진도? 전라남도 진도?”

“아니 제주도도 아니고 거제도도 아니고 웬 진도?”

“진짜 진도? 아니 왜 그렇게 먼 데로 간대니?”

“진도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나? 거기 가서 뭐하고 산대?”

“섬에 가서 물고기 잡아먹고살려고 그러나? 역시 정상이 답네.” 등등.


친구들은 저마다 놀라움 속에 여러 의문을 가졌다. 정상이 샀다는 새 집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마다 거의 자동적이고 반사적으로 이 같은 질문과 감탄을 입에 올렸다. 나 역시 그랬다.


진도가 어딘가.

서울에서 진도까지 직선거리로만 350킬로미터. 요즘은 진도까지 다리가 놓여서 자동차나 고속버스로 쉬지 않고 간다면 5시간 반 정도 걸린다. 하루생활권에 들어갔다는 한국이지만 서울에서 진도까지 하루에 다녀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예전처럼 배를 타고 진도로 들어가야 했다면 훨씬 더 오래 걸릴 곳이었다. 그만큼 정상이 오랫동안 살던 서울에서 멀다는 말이다. 진도와 더욱 낯설고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은… 정상이 태어난 곳이 경북 상주이고, 내가 아는 한 그는 대학 시절부터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정상은 왜 진도로 가려는 것일까.


여러 사람이 반복해서 묻는 질문에 지친 듯, 정상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다른 친구가 정상에게 물었고 나는 그 옆에서 들은 내용이다.


정상이 대학 시절 혼자서 호남으로 여행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우연히 진도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보았던 진도의 이미지가 좋았다고 한다. 그 경험과 호감이 지금까지 수십 년간 그의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남아 있었다. 그래서 은퇴 시기가 다가오면서 정상은 서울을 떠나서 살 곳을 찾기 시작했는데 결국 진도로 정했다는 것이다.


입이 무거운 정상이 그렇게 간단하게 한 대답에 관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여지는 없었다. 역시 생각이 깊고 범상치 않은 그 다운 발상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정상이니까 진도지, 다른 사람 같으면 어디 진도를!’ 하는 생각이 남았다.


경주 출신인 재관이 정상의 말을 듣고 말했다. “나도 바닷가가 좋아. 그런데 나는 서해보다는 남해 쪽이 좋더라. 여수나 통영도 좋아.” 그래서 사람의 인연은 참 묘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과 지역 간에도 인연이 있다. (재관이 진도가 서해에 있다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오해를 막고자 진도의 위치를 확실히 하는 게 좋겠다. 진도는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 즉 서해와 남해의 경계선에 있다.)


정상이 진도에 집을 샀다고 해서 당장 이사를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인생 말년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둔 듯했다. 그는 오랫동안 대학생들을 상대로 원룸식 숙소를 운영해 왔다. 나는 거기에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형태의 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거주 형태를 뭐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원룸텔인지 고시텔인지 또는 임대 하우스인지.




이미 접었다고 하지만, 정상은 임대 하우스를 운영하는 것에 더해서 프랜차이즈 편의점도 운영했었다. 대학원 졸업 후 일찍이 남다른 노력으로 한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사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너무 고루하고 지루한 옛 자료에 파묻혀 지내다가 점차 회의를 느끼고 제도권 학문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것은 대학에 들어올 때부터 우리가 꿈꿔온 학문의 길을 포기하는, 또는 샛길로 빠져나가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학문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연구할 과제를 설정하고 일생을 통해 학문을 가까이하는 사람이다. 그는 한학 외에 영문에도 능통한 편이다. 그는 자기 연구소를 두고, 거기에서 스스로 정한 연구에 몰두하고, 이따금 사적인 모임을 통해 중국 고전도 가르쳤다. 스스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알지만, 학문은 언제나 학문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준다.


나는 재야 학자로서 정상이 독자적으로 쌓아온 지식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그가 공부하는 내용은 나의 관심사와는 영 다르다. 나는 그저 그가 특히 한문과 한학에 능통하여 그냥 썩히기 아깝다고 생각했다. 아닌 말로 정 안 되면 서당 훈장이라도 해야 할 판 아닌가. 향숙은 그런 정상을 늘 “선비”라고 부른다. 선비. 정상에게 어울리는 별명인 듯하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한문을 배웠다. 내가 아주 어릴 때는 신문이나 책에서 주요 명사들이 한자로 적혀서 나오곤 했다. 한자를 모르면 그런 것을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당시의 사회문화가 전체적으로 한자 친화적인 상황이었으므로 한문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며,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때 학교에서 그렇게 배운 한문 덕분에 한자뿐 아니라 한국어까지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 한자가 너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요즘 학생들은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보다 한문을 충실하게 배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친구들은 한문을 충실히 공부하지 않는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을 토로했다.


한글의 중요성과 역사적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 전용 정책이 강화될 경우 한국 역사와 전통문화를 연구조사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이다. 한문을 알지 못한다면 한국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어떻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람은 한문으로 적힌 책들을 한글로 번역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어나 독일어로 된 책들을 한글로 번역해서 연구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말이다. 독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독일어를 공부해야 하고, 중남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페인어를 알아야 한다.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 문자로 적힌 문화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 친구들이 학교의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요즘 학생들은 우리가 어릴 때와 달리 나름대로 너무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해서 그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다. 그러니 학생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들대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비해 과학과 기술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고리타분한 한문이나 역사보다 현대 과학기술과 관련된 학문을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학교의 추세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가 한문을 충실히 공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친구들의 걱정이 정말로 의미 있는 우려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나이 먹은 사람들이 으레 갖게 되는 노파심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학생이었던 시절에도 우리 부모 세대는 우리를 보면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요즘 아이들은 버릇도 없고 한문도 모르고 옛것을 고물로만 취급한다'고.


세대 간 문화적 차이는 여전하거나 더욱 격심해졌다. 나는 미래에 어떤 현실이 도래할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기술 변화뿐 아니라 자연환경의 변화도 너무 빨라서 어떤 미래가 다가오는지 추측하기 어렵다. 아무리 상상해 봐도 그럴듯한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다. 우리의 자녀들이 또는 자녀의 자녀들이 어떤 사회에서 살게 될지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한문을 모르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어떻게 잘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 현대 과학기술 지식을 더욱 충실히 쌓지 않는다면 어떻게 국가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또한,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계가 있는데 그 두 가지를 어떻게 모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 학생들은 우리보다 더 잘 먹고 더 똑똑하고 더 풍부하고 더 편리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현대 과학기술 발전의 혜택을 입은 탓에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잘해나갈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하여간 나는 정상이 '제도 학문'에서 벗어난 것이 안타깝기는 하다. 종종 한심하다 싶은 교수들의 학문 및 성품 수준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더욱 든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면, 정상은 내가 수양이 덜 되었다고 탓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모든 것이 가격으로 매겨지는 교환가치에 충실한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학문적 가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지식을 상품화하는 물신주의에서 탈피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하릴없이 그러한 류의 시름에 잠길 때면 아래 구절을 스스로 되새기곤 한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사실 외부로 드러나는 결실이 아니라 해도 정상이 같은 사람은 스스로 배우면서 즐거워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그 점을 높이 산다. 상품화되지 않고, 사회제도 속에서 부와 명예로 드러나지 않아도, 스스로 쌓는 지식과 덕과 노동을 나는 진심으로 존중한다. 잘 되지는 않지만,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연구의 결과가 언젠가는 명시적으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나도 나름대로 수십 년 동안 스스로 공부하고 있지만, 교환가치로 상품화할 수 있는 명시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까닭이다. 그것이 또한 이렇게라도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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