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mory Mar 29. 2024

목포의 눈물

진도 여행 이야기 (18)

목포근대역사관에서 나온 우리는 특별히 어디로 가야 한다는 정해진 목표가 없었다.

서울로 가는 길에 광주 5.18 묘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진태가 유달산에 가서 해상 케이블카를 타자고 외쳤다. 잠시 고민되었지만 목포에서 딱히 뭘 해야 한다는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자고 동의하고 유달산으로 향했다.


나는 잽싸게 인터넷으로 유달산 케이블카를 찾았다.

아뿔싸! 케이블카가 있기는 한데, 점검 중이라는 공지가 나왔다. 3.23킬로미터나 되는 국내 최장 해상 케이블카는 가을에나 개통된다는 것이었다. (뉴욕에 와서 이 글을 쓰다 보니까 목포 해상 케이블카가 9월 6일에 개통식을 했다. 요금은 왕복 기준 어른은 22,000 원, 아이는 16,000 원. 바닥이 투명한 크리스털 캐빈은 일반 캐빈에 비해 요금이 5천 원 비싸다고 한다. 진태야, 나중에 다시 기회가 오면 같이 케이블카 타자.)


유달산은 참으로 돌산답다.


유달산 정상에 오르면 목포 시내는 물론이고 다도해 전경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유달산은 높이가 228미터에 불과하지만 목포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이 산은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이 남서해로 뻗다가 무안반도 남단 끝에 세워 올린 마지막 봉우리다. 예로부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해서 영달산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정상인 노적봉 아래로 수많은 기암괴석과 절벽 등이 있어서 '호남의 개골'이라고도 하였다.


유달산의 서쪽은 바다에 접해서 육지가 좁기 때문에 목포 시는 그 산의 동쪽으로 발전되었다. 우리는 유달공원 주차장으로 갔다. 거기서 수십 미터만 오르면 산 중턱에 전망 좋은 누각들이 있고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기념비도 있다.




우리가 주차장에서 그 누각 쪽으로 오르려고 할 때 향숙과 희선은 "우리는 안 올라간다"라고 말했다. 날이 무척 더운 데다 다리도 아파서 산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께부터 시작한 여행이 무더위 속에서 강행군되고 있으니 힘들 만도 했다. 이렇게 계속 움직여야 하는 여행은 육체적으로 강해야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굳게 버티려는 의지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여성들이니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성들의 취향도 존중해야 했다.


우리는 두 편으로 나뉘었다. 여자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미술관으로 가고 남자들은 유달산에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향숙과 희선이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운전사가 필요했으므로 친절한 재관이 자진해서 그들을 데려다주고 돌아오기로 했다. 결국 정상과 진태와 나만 먼저 산으로 향했다.


눈짐작으로 보니 산 등성이를 따라 오르면서 세 개의 누각이 보였다. 나는 힘들고 더워서 첫 번째 누각에 오르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첫 번째 누각으로 오르니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맞았다. 누각에 서니 목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정상은 반드시 이난영 기념비 앞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 앞에 가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술이라도 한 잔 따르는 예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두 번째 누각까지 갔고 그 길 중간에 있는 '목포의 눈물' 기념비 앞에도 갔다. 그러나 더 높은 곳에 있는 누각까지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목포의 눈물 기념비 앞에는 이난영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온종일 계속 흘러나왔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는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가수 이난영(1916~1965)은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에 유명했던 가수다. 1935년 발표한 '목포의 눈물'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당대에 5만 장에 이르는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녀는 1936년 가수 김해송과 결혼했으며, 1939년부터는 가극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활동한 '김시스터즈' 멤버 세 명 가운데 두 명은 난영의 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조카이다.


정상과 진태는 '목포의 눈물 기념비'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그런 취향과는 거리가 있어서 그냥 누각에서 머물렀다. 재관이 이내 돌아와서 우리는 누각에서 땀을 식히면서 목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맑은 날이어서 멀리까지 보였다.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 기념비


나는 수십 년 전에 왔던 유달산과 목포를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목포는 옛날의 목포가 아니었다. 유달산에서 바라보니, 영산강이 도시를 휘감아 흐르고 그 앞에 아주 작게 삼학도가 붙어 있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죽마고우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


2019년 8월 유달산에서 내려다보는 목포 시내


호남의 아들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한 도시, 목포.

내 죽마고우의 고향인 목포.

오랜 세월 지역 차별을 겪었던 전라도 최남단 도시, 목포.

영화에 단골로 등장했던 서울 조직 건달들의 본향, 목포.

나에게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여행 왔다가 얻어먹은 한겨울의 차가운 막걸리와 닭똥집의 추억이 서린 도시, 목포.


유달산 누각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목포의 평화와 발전을 기원했다. 그것은 어쩌면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내 죽마고우의 고향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오래전 겨우 한 번 방문했던 전라도의 희미한 추억, 그 후 부산이나 수도권에 비해 발전하지 않은 역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수없이 발생한 호남의 수난과 역경을 겨우 글로써나마 간신히 이해하는 타지 사람으로서 느끼는 마음의 빚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희선과 향숙이 있는 미술관으로 갔다. 목포 방문은 그게 전부였다. 시내를 자세하게 볼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이제 우리는 빛의 고을 광주로 향해야 했다.


목포여, 언제 다시 볼지 모르지만... 안녕.



이전 17화 목포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