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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r 23. 2024

진도여 안녕

진도 여행 이야기 (16)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여행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여전히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연속되는 무더운 나날이 지속된 진도의 텁텁한 바닷물 냄새가 밴 공기가 방안을 휘감고 있었다. 부지런한 정상과 향숙은 모두 자는 사이에 일어나 바닷가로 나가서 기어이 일출을 보고 돌아왔다. 나는 자느라 그들이 밖으로 나갔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떠들기 시작해서 조용했던 거실이 갑자기 부산해졌다. 저절로 모두 눈을 떴다. 우리는 그제야 일어났다.


이번 여행에서 원래 정상은 진도에 남고 다른 사람들만 서울에 돌아가기로 계획되었었다. 하지만 정상은 계획을 바꾸었고, 우리 모두 함께 서울로 올라가게 됐다. 여행 사흘 째. 중간에 들를 곳도 여러 곳이고 갈 길이 머니 우리는 잽싸게 씻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컵라면과 컵 누룽지, 그리고 간밤에 먹고 남은 매운탕에 만 밥 등.


정상도 서울로 가기 때문에 냉장고에 두어도 되는 식품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먹어 치우든지 버려야 했다. 식재료를 썩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 함께 쓰레기를 정리하고 방을 정돈했다. 비가 올 수도 있으므로 창문도 잘 닫았다. 우리가 이틀 밤을 보낸 집은 다시 집주인이 장기간 비우게 되면서 길고 외로운 침묵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버스 전용 차선을 달리다가 단속 카메라에 찍혀도, 우리가 분명히 여섯 명이며 모두 한 차에 탔음을 인증하기 위하여 우리는 차 안에서 사진을 다시 찍었다. 혹시 교통위반 티켓이 날아오면 그 사진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드디어 집을 나섰다.


이틀간 정든 동백나무집이여, 안녕.

눈에 아직도 삼삼한 진도와 접도의 바닷가도 안녕.




진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를 무심히 보냈다.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는 진도대교를 건넜다. 8월의 아침 바다는 여전히 거대한 호수처럼 잔잔해 보였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좀 더 차분하고 자세히 진도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다리를 건너면서 옆에 높이 서 있는 진도 타워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거센 물살이 소리를 내는 울돌목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 보지 못했지만 진도 남서쪽 끝에 진도항(팽목항)이 있고, 또 그 앞 어딘가에 세월호가 가라앉았던 곳도 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제한된 시간 내에서 그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차 안에서 팽목항이나 세월호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정상으로부터 팽목항 사정에 관해 들었다. 비록 직접 가보지 못했지만 TV에서 자주 보았던 모습은 우리 마음속에 항상 있었다.


나는 TV와 컴퓨터 화면에서 보았던 팽목항 장면들을 마음에 떠올렸다. 배가 가라앉았던 먼바다를 향해 이름을 부르다 부르다 지쳐서 그저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를 키운 우리가 모르는 바 아니었다. 직접적으로는 자녀의 죽음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나중에 그들을 더욱 아프고 힘들게 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지난 수년간 한국에서 발생했던 여러 사고를 보면, 어쩌면 한국에서는 사고 자체보다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공무원들과 고위 관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사고는 어느 때고 발생할 수도 있지만, 국민에게 더욱 중요하게 비치는 것은 사고에 대처하는 정부와 공무원 등 사고 수습 책임자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바다에서 가라앉고 있던 순간 나는 마침 뉴욕에서 TV를 보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 수백 명이 탄 거대한 배가 잔뜩 기울어져서 위태롭게 보일 때였다. 세월호는 절반 이상 쓰러져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최대한 서둘러 탈출해야 할 때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배는 무서운 속도로 뒤집혔다. 조금 후 화면에는 배가 이미 뒤집힌 모습이 나왔다. 배의 바닥 선미만 물 위에 겨우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놀라서 TV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도대체 구출하러 와야 하는 배들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뉴스는 빠르게 바뀌었다.

다행히도, 내가 잠들기 바로 전까지 YTN 방송은 세월호에 탔던 승객을 '전원구조'했다는 속보를 내보냈다. 그 속보까지 보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비록 불행하게 배는 가라앉았지만 "전원구조"한 것을 보면 역시 한국이 이제 선진국이 다 됐구나.'


그러나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허위사실인 것을 그다음 날 아침에 알게 되었다.

그때 느끼는 허탈함이란!


살다 보니, 사람의 일이라 사고는 으레 발생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뭐든 급하게 하다 보니 이런저런 안전사고가 더 자주 발생하는 것도 알고 있다. 빠르게 성장하려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수습 책임자들이 사고가 난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정직하게 밝히고 그에 따른 처벌과 대책을 공정하게 진행하는 것은 중요하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뒤통수치는 것을 한국민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진도대교를 건너서 북쪽으로 가면 목포이고, 서쪽으로 가면 해남이다. 원래 우리가 가려고 했던 녹우당에 가려면 해남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목포에도 가고 싶었다. 두 갈래 길에서 우리는 결정을 해야 했다.


정상은 서울까지 멀고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므로, 두 군데 다 갈 수 없다면서 녹우당을 포기하자고 했다. 녹우당으로 갔다가 목포로 가는 길은 한참 돌아서 가는 길이라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목포와 광주를 보고 가려면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 녹우당을 포기하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는 녹우당에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제한된 시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녹우당은 해남 윤 씨의 종가일 테고, 거기에 저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그림을 직접 보지 못해서 안타깝기는 했지만, 그날 우리는 매우 늦게 서울에 도착했으므로, 정상의 판단과 결정은 올바른 것이었다.


차 안에서 인터넷을 통해 녹우당을 조사했다. 고산 윤선도의 고택이고 해남 윤 씨의 종가다. 인터넷 사진에는 오래된 커다란 한옥의 모습이 나온다. 전라남도 민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비록 진품은 아니겠지만 공재 윤두서의 그림도 있다. 나는 그림보다는 그의 커다란 고택을 보고 싶었다. 아쉽기는 하다. 해남까지 왔는데. 땅끝마을도 보지 못하고 가다니. 하지만 목포 또한 오래전 나의 추억이 있는 곳이고 내 죽마고우의 고향이라서 꼭 가 보고 싶은 곳이다.


여행은 으레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것이고, 떠날 때는 아쉬움도 남는 법이다.


진도를 떠나 목포로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을 내 생애에 다시는 못 올지 모른다.

내 눈에 담기는 이 풍경이 내가 보는 이곳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과연 내 생애에 이곳에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정상은 나중에 친구들이 오면 언제든지 자기 집에서 재워주고 진도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그의 진심을 믿는다. 그는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위인이다.


하지만 인생은 때때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거나 잊어서 그렇지, 많든 적든 누구나 자신의 생애에 그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지난 이틀간 우리 여섯 명이 보냈던 진도에서의 시간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언제나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던 것을 다시는 갖지 못하고,

언제나 찾아올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장소를 다시는 가 보지 못하며,

언제나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

우리는 그렇게 삶을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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