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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r 30. 2024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진도 여행 이야기 (19)

목포 유달산에서 출발한 우리는 시간이 없다면서 광주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광주 시를 우회해서 곧바로 5.18 묘역으로 직행했다. 일부 친구들이 전남도청을 봐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반론에 묻혀버렸다.


8월 4일.

맑은 날이었지만 대단히 습하고 무더운 날이었다. 대한민국 휴가철의 정점을 이루는 날이기도 했다. 햇살은 너무 강해서 그늘이 아니라면 잠시도 걷기 어려운 날씨였다. 우리는 5.18 묘역에 들어가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정상이 후배들로부터 묘역에서 가까운 한정식 식당을 추천받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식당은 오후 2시가 넘었는데도 매우 바빴다. 식당 입구에는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서 인절미 같은 떡과 마실 수 있는 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를 잡고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자 푸짐한 반찬들이 등장했다. 음식은 매우 정갈하면서 맛있었다. 입이 짧고 까다로운 나로서는 이번 진도 여행 기간 중 가장 맛있는 식사였다. 역시 여행 중 맛있는 음식을 접하는 것은 즐겁고 큰 행운이다.


'국립5.18민주묘지'는 광주광역시로부터 동북 쪽 외곽에 있다. 이 묘지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희생자들을 처음 모셨던 망월동 묘역이 아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들어 광주민주화 항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5.18민주유공자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항쟁 희생자 묘역을 민주화 성지로 개발하여 1997년에 국립5.18민주묘지가 조성되었다. 이로써 망월동 묘역에 있던 영령들은 17년 만에 새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민주묘지는 2002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망월도 묘역은 민주 성지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민주묘지 입구에는 기와지붕을 이고 '민주의 문'이 서 있다. 그 문에 들어서자 추모탑을 비롯한 묘지 전체가 저 멀리 한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나타난 장엄한 전경에 우리의 마음은 사뭇 비장해졌다. 민주의 문에는 방문객들을 위해 안내원들이 있었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묘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5.18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시대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설명은 중요할 것 같았다.


극도로 무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외에 여러 사람들이 묘지를 찾아왔다. 우리는 민주의 문 아래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호리호리한 중년의 남자가 차분한 말씨로 친절하게 묘지 내역과 발전 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나의 이마와 등에서는 계속 땀이 흐르고 있었다.



국립 5.18 민주묘지 입구인 민주의 문



민주의 문을 통과하면 넓은 광장이 있다. 그 광장 끝에 계단들이 있고, 그 위에 추념문이 있다. 추념문을 들어서면 높이 4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추모탑이 서 있다. 추모탑은 두 개의 기둥이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상단 중앙 부분은 두 손을 감싸 쥔 듯 튀어나와 있다. 그 안에 5.18 희생자들의 부활을 소망하는 알 모양의 조형물이 들어가 있다. 그 탑을 올려다보는 우리의 마음은 사뭇 숙연해졌다.


여기가 5.18 묘역이구나!

말로만 수없이 들었던 광주 항쟁 발생 39년 만에 드디어 와 보는 곳이었다.


국립 5.18 국립묘지 추모탑


추모탑 앞에는 방문객 누구나 참배할 수 있도록 향과 향로가 놓여 있다. 우리는 그 앞에 모여서 간단하게 묵념을 했다. 지나치게 밝고 너무나 무더운 날, 넓은 공간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했다. 멀리서 매미 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기억을 집중하면서 의도적으로 광주항쟁에 관해 뭔가 떠올려보고자 했으나 하얘진 머리가 멍멍해진 가운데 거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거친 호흡소리와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들만 감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시신이 담겨서 태극기로 감싼 관들과 전남 도청에서의 마지막 항쟁 장면 정도만 흐린 잔상처럼 흐물거렸다.




거의 40년이나 지난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이미 선진국 문턱을 넘어서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정말로 발생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분명히 푸르렀던 우리의 젊은 날에 발생한 일이었고, 우리 모두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가해자이면서 또한 희생자였음에도 말이다.


모든 일은 우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데, 역사가들은 계속 기록을 통해 우리의 망각에 저항한다. 성실한 역사가의 기록은 분명 부분적으로나마 역사의 진실을 보관하고 드러낸다. 그러나 아무리 성실한 기록이라 해도 그것은 어차피 진실한 현실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극도로 제한된 기억의 파편 무더기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나는 갑자기 우리 후세들이 1980년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로 알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설사 역사가들이 성실하고 부지런히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을 남긴다 해도 우리 후세들이 우리가 느꼈던 감정과 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할 듯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파편적인 기록으로만 보고 들었지, 그 참혹한 현실을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자료를 본다 해도 그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합리적 이성과 역사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당시를 재구성할 뿐이다. 결국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은 과거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에 갇히고 만다.




추모탑 뒤편에는 깨끗하게 단장된 푸른 잔디로 덮인 직사각형 모양의 묘들이 양쪽으로 층층이 놓여 있었다. 그 묘지들에는 저마다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묘지 앞에 놓인 회색 돌 비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사진, 생년월일과 사망일, 그리고 그 뒤에는 묘비명이 하얀 글씨로 새겨져 있다.


그중 한 묘비명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순결하여 하얀 별과 같고 따뜻하여 봄 햇살과도 같아 우리는 그를 삶의 나침반이자 소외된 이들의 벗이라 일컬었다. 그는 다만 자신을 합수라 불려지기를 바랐다."


어떤 묘는 희생자가 누구인지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는지 희생자의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사진도 이름도 없는 비석 전면에 그저 '무명 열사의 묘'라고 적혀 있다.


국립5.18국립묘지에 있는 한 묘비명


줄줄이 기다랗게 놓인 푸른 묘지들과 회색 비석들 앞에 서 있노라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죽은 자들 앞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미어지는 아픔이 가슴을 스친다. 가리고 감추고자 했던 일들이 역사에서 그토록 죽지도 않고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보면 가끔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이성의 간계'가 정말 있는 것은 아닐까.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이며 이성의 의도에 따라 발전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결국 그 모든 총합은 역사를 이끄는 이성의 간계에 불과하며 이성의 합목적성에  따라 역사는 진전한다.)


그늘 하나 없는 그곳에서 우리 여섯 명은 각자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묘지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모두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젊은 날의 기억을 느닷없이 마주한 것도 같다. 우리는 5.18과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졌으며, 나름대로 그와 관련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 광주 출신이 아니라 타지로부터 왔기 때문에 공간적 이질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나간 39년을 압축하여 현재로 귀결시키는 시간적 감정적 일체감 같은 것도 있다.



국립 5.18 민주묘지의 한 구역


다행히 하늘이 약간 흐려져서 우리는 살을 태울 것 같았던 뙤약볕만은 피할 수 있었다. 천천히 묘지를 둘러보던 내 귀에 어디선가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리다가 이윽고 사위가 조용해졌다. 갑자기 너무나 조용해져서 놀란 나는 문득 머리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무더운 공기에 풀냄새만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민주의 문으로 돌아가고 나만 묘지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비로소 무거워진 마음을 추스르고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민주의 문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뙤약볕을 피해 민주의 문 그늘에 서 있었다. 민주의 문 앞에 있는 드넓은 광장 양옆에는 고인돌 형태로 만들어진 유영봉안소5.18 추모관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들을 모두 뒤로 남기고 서울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이제는 꿈같은 여행에서 서울의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내일 아침에는 또다시 월요일의 해가 떠오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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