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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r 31. 2024

추억과 희망

진도 여행 이야기 (20)

우리는 광주를 뒤로 두고 서울로 향했다.

2박 3일 여행의 마지막 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이번 여행에 참여하지 못한 재근이 분당에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고 정상이 전했다. 그를 만나서 저녁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정상은 목포에서부터 서둘렀던 것이다. 재근은 우리가 8시까지 분당에 오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나는 그를 만나서 저녁을 함께 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재근은 지난해 여름 안동과 삼척을 여행했을 때 동행했던 친구다.


5.18민주묘지에서 오후 5시 무렵 출발한 우리는 정읍과 전주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충청도 어귀로 접어들자 고속도로에 차들이 심한 정체 현상을 보였다. 차 안에서 정상은 핸드폰을 통해 서울 도착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목포와 광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데다 차가 너무 막히기 때문에 분당 부근에 이르면 밤 9시가 넘을 듯했다.


"재근아,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을 같이 하기는 힘들겠다. 우리가 목포와 광주에서 늦어지기도 했고, 고속도로 정체가 심해. 분당에서 너를 만나서 식사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온화한 성격의 재근은 많이 아쉬워하는 듯했다. 뒤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나도 매우 아쉬웠다. 그는 저녁을 살 요량으로 이미 식당에 예약을 해놓았다고 한다. 작년에 그와 함께 여행했던 경험을 돌이켜볼 때, 그는 대단히 유쾌하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다. 내가 보기에 그는 대학 시절부터 부유한 귀공자의 모습을 아직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울이 가까워지자 누군가 저녁 식사 겸 뒤풀이를 어찌할까 물었다. 늦기는 했어도 남자들은 식사하는 데 문제없다고 했지만, 향숙과 희선은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아쉽지만 저녁 식사를 생략하기로 했다. 나도 이틀 전 금요일 아침에 이모님에게 맡긴 딸이 걱정되었다. 더구나 나와 딸의 서울 숙소가 주말에 바뀌어서, 새 숙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부담되었다. 서울에 도착한 7월 중순부터 머물렀던 숙소는 이틀 전 금요일에 체크아웃했고, 비록 같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일요일 오후부터 다른 방으로 들어가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이모님께 연락해서 내가 강남역에 도착할 시간을 알려주었다. 결국 우리는 거의 10시가 되어서 강남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작은 희선이 그냥 헤어지려니 아쉬웠나 보다. 그녀는 우리에게 잠시라도 한 잔 하고 가자고 했다. 물론 남자 친구들은 좋다고 수락했다. 그 바람에 나부터 먼저 숙소 앞에서 내리고 그들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나는 잽싸게 새 숙소로 들어가 보았고, 다행히 딸도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나는 지하실 보관함에 두었던 여행 가방들을 새 숙소에 들여놓자마자  곧바로 친구들이 있는 식당으로 뛰어갔다.


식당 안에는 희선, 정상, 재관, 진태가 둥그런 테이블 주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강남역에서 집이 먼 향숙은 이미 가고 없었다. 일요일 늦은 밤이라 그런지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식탁에는 김치찌개와 소주와 맥주 등이 있었다. 나도 맥주를 시키고 찌개국물을 떠먹었다.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그렇게 뒤풀이를 하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밤은 사정없이 깊어갔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 두 분은 우리가 언제 가나 기다리는 눈치였다.

누군가 물었다.


"이제 문 닫을 시간인가요? 언제 닫나요?"

"손님들이 계실 때까지는 열어야지요." 주방 앞에 앉아서 쉬는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참 철저한 서비스 정신이다. 곧 닫는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갈 때까지 라니...

"우리가 빨리 가야겠네요, 집에 가시려면... 어디 사시는데요?" 재관이 물었다.

"대림동이요. 우리 데려다주시게요?" 그 아주머니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아이고, 우리가 갈 방향과는 반대쪽이네요. 미안합니다."


차를 운전해야 하는 재관은 진짜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날 밤 재관은 규범의 차를 가지고 갔다가 다음날 규범에게 갖다 주어야 했다. 그 식당 아주머니들 집이 가까운 곳에 있거나 재관과 정상이 가는 방향에 있었다면 재관이 기꺼이 함께 갈 수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대림동으로 가는 방향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강남역 주변에 있는 식당가에서 나는 중국 출신 동포 여성 노동자들을 자주 본다. 서울 시 대림동 일대에 매우 큰 중국동포 타운이 있다는 것은 언론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바다. 이 아주머니들도 그곳에 살고 있다. 내가 강남역 숙소에서 자주 가는 식당에도 중국에서 온 동포들이 일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 식당의 주인 남자만 토박이 한국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식당 아주머니들은 보통 1주일에 6일, 하루에 12시간씩 일한다. 나는 밤에 숙소로 돌아오면서 가끔 그 아주머니들이 함께 퇴근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한 번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자주 보는 아주머니에게 내가 "열심히 일하시네요."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힘들지 모르지만 힘내라는 의미에서 했던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는 "그래도 한 주에 하루는 쉬는데요."라고 대답하면서 웃었다. 약간 겸연쩍어하면서 수줍게 웃는 그 얼굴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삶은 그렇다.

고된 노동과 힘든 환경 가운데서도,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다면 삶은 그리 절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단한 인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어디선가 작은 줄기의 서광이라도 비친다면 그들의 삶은 그리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매일 열두 시간씩 일하면서 한 주에 하루 쉬는 날이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삶의 비극이 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삶의 기쁨이 된다. 일터가 있으며 한 주에 하루라도 휴식이 주어지는 것이 그 아주머니에게는 삶의 행복이자 희망일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 그 희망의 빛은 어디에서 얼마나 비추고 있을까.

빛이 있어도 빛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있는 것일까.




드디어 여행은 끝나고 작별의 시간이 왔다.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헤어지는 아쉬움의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뉴욕으로 돌아갈 때까지 일주일 정도 더 남았지만 나는 친구들과 그 사이에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한 작별의 인사를 해야 할 듯했다.


우리의 여행 마지막 순간에 먼저 집으로 갔던 향숙에게 나는 이틀 후 여행 경비를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물을 겸 연락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 여행의 전체 경비 가운데 나에게 할당된 비용을 자신이 내겠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내가 책이라도 사는 데 보태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도 여행 경비는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그녀의 따뜻한 성의만 받기로 했다.


향숙아, 다음에 올 때 따뜻한 밥이나 사 주라.


추측컨대, 그녀의 역사 지식으로나 성품으로나 향숙은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님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정말로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 아직도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은퇴 시기가 점차 가까워도 계속해서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미 좋은 선생님이라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는 젊은 교사들 가운데 '늙은' 교사로서 존재감과 정체성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스로 퇴물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극복하는 것 말이다. 언제나 나이를 들먹이는 대한민국에서 그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그런 걸 보면 향숙은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교사 본래의 모습을 참으로 좋아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미 3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교사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지식과 역사의식을 가르치는 것에 숭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정상은 식당 앞에서 "내년에 오면 또 여행 같이 갈게. 몸 건강하고..."라고 말했다.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그의 듬직하고 두툼한 손으로부터 힘이 전해졌다. 그는 6년 전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함께 여행한 친구다. 모두 그가 계획해서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다음에 다시 내가 서울에 오게 되면 그는 또 여행을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진도로 내려간다면 내가 서울에 왔을 때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정상이 진도로 가면 혹시 더 외로워하지 않을까. 하긴 어디에 갖다 놔도 잘 살 것만 같은 강인함을 가지고 있는 그이기에 그런 염려는 기우에 불과할 듯하다.


진태는 편의점과 학원에서 자기의 일상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자녀 없이 부부가 열심히 일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이는 그는 자신이 세운 목표액이 모이면  은퇴할 것이라고 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그 목표는 조만간 달성될 것처럼 들렸다. 그는 은퇴하면 한동안 세계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은퇴자들의 꿈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조만간 이루어질 현실일 것 같다.


그는 비록 약간 대머리가 되기는 했지만, 나이에 비해서 대단히 민첩하고 건강해 보인다. 학원 강의를 많이 해서 목소리가 쉬었을 법도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낭랑하다. 그래서 내가 물었었다. 무슨 비결이 있냐고? 그는 대학 시절에 합창단에서 활동했을 만큼 노래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목청 좋은 것도 타고났나 보다.


재관 또한 역사 교사로서 일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다. 나는 교사들이 30년만 채우면 곧바로 은퇴하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도 언제 은퇴할 계획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몇 년 더 일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들은 국방의 의무로 인해 여자들에 비해 사회 진출이 적어도 2~3년 늦어진다. 향숙과 재관을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교사직을 바로 시작해도 남자는 보통 대학 시절에 군대를 다녀오기 때문에 교사 근무 기간에서 차이가 나게 된다. (이것은 참 불공평하다. 국방의 의무는 중요하지만, 어떻게든 사회적으로 보상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어느 정도 달관한 표정인 그는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일하면서 운명을 감내하는 스타일인 듯하다. 언제나 점잖고 말이 느려서 언행이 양반 같은 그는 웃으면 작은 눈이 더 잘 안 보인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웃을 때 하회탈의 웃는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이 좋다. 그에게 웃을 일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나는 작은 희선을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녀는 아주 다정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향숙과 재관과 희선 모두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온 교사들로서 말하는 데서도 공통점이 있다. 차분하고 분석적이고 설명적이며, 대화를 통해 일을 진행하고 처리하는 스타일 말이다. 희선은 참으로 친절하고 붙임성이 좋다. 그러니까 향숙과 친구로 잘 지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선은 이미 은퇴했지만 백수 백조가 과로로 쓰러진다면서 매우 바쁘게 지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과를 열거했다. 은퇴해서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것도 재주고 다행이다. 나는 그저 그녀의 여유로운 은퇴생활이 부러웠다. 내가 건강히 잘 지내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번 여행의 추억을 가지고 또 한 해를 잘 견뎌라.”라고 했다. 아마 내가 일 년 후에 다시 서울에 나올 것을 추측해서 한 말일 게다.




나중에 그녀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삶을 견디는가.

추억으로?

아직 그것만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될 것 같다.


미래를 향한 희망에 부풀 시기는 오래전에 지났지만, 아직은 추억으로만 삶을 견디고 이겨낼 시기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나 개인을 넘어서서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많다. 희망은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희망한다. 그리고 욕망한다.


지나간 시간은 즐거울 때도 괴로울 때도 있었다. 삶은 그리 만만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어렵지도 않다. 나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힘들어하기는 해도 대체로 무난하게 참고 살아내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가. 나는 삶에 있어서 남다른 행운을 받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운명을 최대한 선의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접도에서 일하는 베트남 여인과 강남역 식당가에서 일하는 중국동포 아주머니들에게도 삶이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님은, 그들에게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희망이 무엇인가는 각자의 몫이고, 그것은 그들의 과거 어딘가에서 발생한 추억에 기초해서 생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추억은 희망의 부모이다.


젊은 날 즐겁고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이 우리의 고단한 늙어감을 위로할 뿐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을지 모른다. 나 역시 서울과 한국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추억 속에 이민 생활을 버티고 살아왔다. 고향과 벗들에 대한 기억들이 이민 생활에 활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그것을 통해 다시 귀향의 희망을 품게 된다. 나는 그렇게 추억으로부터 희망을 얻어내고 있다.


뒤엉킨 추억과 희망 속에서 나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삶은 다시 약간 복잡하지만 지루하고 단조로워졌다. 서울이 서울대로 바쁘게 돌아가는 것처럼 뉴욕은 뉴욕대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여기나 거기나 오만하고 무례한 정치인들이 제멋대로 말하고, 무능하고 비겁하면서 권력만 가진 공무원들이 함부로 날뛰고, 탐욕에 찌든 부자들이 더 많은 부를 차지하기 위해서 기만과 사기를 일삼고, 한 푼 지식과 기술에 의존하는 각종 전문가들과 언론인들이 거기에 기생하면서 대중을 기만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그 기득권층 안에 있으면서도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꿈꾸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보통 사람들이 우매하게 빼앗기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견디기 힘든 고단함과 슬픔 속에서도 웃으면서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여전히 잘도 돌아간다. 나 역시 그 우매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이제 험한 일상에 다시 자리 잡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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