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가는 길 - 향수 (2)

걷거나 타거나 (22)

by memory 최호인

3.


서울 집을 떠난 지 보름도 더 지났을 때였다.


나는 문득 엄마와 누나들과 친구들이 몹시 보고 싶어졌다. 며칠 전부터 밤마다 서울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지만 딱히 입에 올릴 만큼은 아니었다. 애당초 시골에 올 때부터 아버지는 한 달 정도 내가 시골에 머물 것이라고 했었다.


엄마와 누나들을 떠나서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복작거리는 집에서 나와서 서울과는 전혀 다른 시골에서 머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으므로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러나 막상 시골에 와서 지내다 보니 한 달은 너무 긴 것 같았다. 엄마와 누나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대방동 동네 친구들도 보고 싶었고 그들이 여전히 재미있게 놀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는 그들이 몹시 그리워서 매우 슬퍼졌다. 낯선 타향에서 너무 오래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돌연히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서울이 마치 다른 나라에 있는 것 같았고, 큰 바위가 가슴에 얹히기라도 한 듯 답답해졌다.


문풍지를 뚫고 방안을 은근히 휘젓는 웃풍으로 인해 호롱불이 흐릿하게 깜빡거리고 춤추던 그 밤에 아랫목에 발을 뻗고 누워 있던 나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솟아났다. 눈물 어린 눈으로 호롱불을 바라보면 노란 불빛이 긴 직선들이 되어 나의 눈으로 밀려들었다. 젖은 눈으로 노란빛줄기들을 보면서 말했다.


“고모.”

“왜?”

“아버지는 언제 와요? 나를 데리러 언제 와요?”

“글쎄, 한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지나면 오시겠지.”

“앞으로 일주일이나?”


호롱불 밑 침침한 어둠 속에서도 바느질을 하고 있던 고모는 나의 젖은 목소리를 듣더니 옷을 옆으로 내려두고 내 곁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손을 들어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엄마 보고 싶구나?”

“네. 엄마 보고 싶어요. 누나들도.”

“아빠가 곧 오실 거야.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으라는 고모의 대답을 듣고 나서 나는 더욱 슬퍼졌다. 방금 전에는 일주일이나 열흘이라고 하더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하니, 정말 조금만 참으면 아버지가 오시려나.


조금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일까.




호롱불이 와닿은 나의 눈에 새로 눈물이 맺혔고 그 눈물 속에 엄마와 누나들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의 냄새가 그리웠다. 누나들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러자 눈물이 더 많이 났고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고모에게 떼를 써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고모는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갈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오셔야만 나는 서울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나를 시골에 두고 간 것에 야속한 마음이 생기면서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고모는 엄마처럼 우는 나를 품에 안고 달랬다. 아버지가 오실 거라고. 곧 오실 거라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고모를 탓할 수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울다가 잠들 때까지 고모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나를 안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의 슬픔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울다가 지쳐 잠들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는 언제 오시려나.

나를 데리러 아버지는 언제 오시려나.

그리운 서울, 보고 싶은 가족, 정다운 친구들

나는 언제 다시 그들을 볼 수 있으려나.

TV도 보고 싶고 방학숙제도 해야 하는데

서울 집에는 언제 갈 수 있으려나.

이틀 밤 사흘 밤 나흘 밤만 자고 나면 오시려나.

아버지는 나를 데리러 오시려나.


그때부터 나는 밤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가 오실 날을 하루하루 헤아렸다. 다음날 밤에도, 또 그다음 날 밤에도 나는 아버지가 오실 날이 언제인지 헤아렸고 고모에게 되물었다. 고모는 매일 밤 열흘에서 하루씩 감해주면서도 나에게 정확한 날짜는 알려주지 못했다.


사실은 고모도 그 날짜를 모를 것이었다. 아버지가 오실 날을.


그래도 잠잘 때마다 나는 손꼽아 날짜를 헤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는 영영 안 오시는 듯했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함박 웃으면서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면서 하루를 보냈다.





4.


그맘때 나는 겨울방학 때마다 그렇게 시골에 갔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먼저 시골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나에게 겨울방학 때 시골에 머물게 했던 까닭을 설명해 준 적이 없고, 나 또한 그 까닭이나 배경을 물은 적이 없다. 나는 그냥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긴 방학을 맞아서 부모님은 복작거리는 집 안에서 나 하나만이라도 시골에 머무르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나 혼자서 나름대로 추측한 사실을 말하자면,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 집의 경제적 빈곤 문제가 있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는 비교적 잘되었던 아버지의 사업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후 무렵에 망했거나 기울어졌던 듯하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 눈에 띄게 가난해진 티가 났다. 내 기억으로는, 나의 가족사를 통틀어 볼 때, 특히 내가 2, 3학년이었던 시절에 가장 가난하게 생활했다. 우리 집에 입주하여 작은 방에 살면서 어머니를 도와 일했던 가사도우미 누나도 있었는데, 그녀도 어느새 떠났다. 아버지는 화단과 과실수가 있었던 앞마당과 옆마당을 모두 헐어내고 그곳에 각각 방 하나와 부엌을 지어서 세를 주었다. 또한,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이 사는 집 안에서도 현관방과 그 옆에 있는 작은 방까지 세를 주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그때 우리 집은 그야말로 한 지붕 세 가족이 아니라, 일시적으로는 다섯 가족까지 살았었다.


먹는 음식과 반찬은 전에 비해 형편없었고, 형이나 누나들은 등록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고생했으며, 나 역시 과자를 사 먹을 용돈이 전혀 없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에게도 가난하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는 정부 시책에 따라 학생들이 학교에서 매달 강제로 저금을 해야 했는데, 어머니에게 말해도 받을 수 없었으므로 나는 저금할 돈을 내지 못했다. 1학기 중에 두 번에 걸쳐 20원과 10원을 낸 게 전부였다. 2학년 1학기가 끝났을 때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내 저금 총액이 30원이라, "우리 반에서 꼴찌"라고 말해서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비가 오는 날 아침 학교에 갈 때는 그야말로 살이 부러지거나 찢어진 우산을 쓰든지, 아니면 그냥 비를 맞고 가든지 해야 했던 어둡고 음울했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나는 겨울방학이 되고 신정을 지낸 후에는 대체로 정월 내내 시골에서 지냈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입학 후 그렇게 두세 차례 시골에 갔던 듯하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겨울방학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해서 인천 인가로 독립한 큰누나 집에 가서 두 주간이나 있기도 했었다.


시골에 갈 때마다 나는 먼저 청주에 있는 고모들과 사촌들 집에 들렀다가 하루나 이틀 밤을 자고, 이후에는 지경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 가서 열흘 정도 있었고, 그다음에는 거기서 고개 너머 있는 괴실 고모 집으로 가서 지냈다.


동네 이름이 ‘괴실’이라 그렇게 불렀겠지만, 괴실 고모는 아버지의 바로 위 누나이자 셋째 누나이고, 아버지의 형제자매 가운데 우리 가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괴실 고모 집에서 별 불편함 없이 머무를 수 있었다. 괴실 고모부가 돌아가셨다고 한 건지, 그냥 고모를 버리고 떠났다고 한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괴실 고모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누나는 대학 시절 청주로 ‘유학’ 갔었고, 거기에서 교대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 사촌누나도 나를 보면 매우 반가워했었다.


그 당시에 우리 집과 시골 친척들은 아무도 전화가 없었던 때라, 아버지와 친척들이 서로 어떻게 연락하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내가 신길동에 있는 사촌형 집에 갈 때도 그랬지만, 친척들은 만날 것을 예약하고 찾아가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와야 온 줄 알고, 구체적인 약속을 하지 않고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시대였다.


아직 산업화가 제대로 전개되지 않았던 시대.

그래서 사회 전반적으로 핵가족 개념이나 개인주의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대.


가부장주의와 대가족제도의 문화와 관습이 여전히 강인한 인습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았던 그 시절에, 어떻게든 친척의 근황을 알게 된 사람은 으레 다른 친척을 만날 때마다 자기가 들은 소식에다 추측하는 내용까지 덧붙여 입으로 전하는 구전의 시대였다. 거기에는 요즘 핵가족과 1인가구 시대의 문화와는 달리, 친척들 사이에 서로 남이라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고, 넓은 의미에서 서로 ‘가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그러나 아주 급한 일, 이를테면 부고 같이 급한 소식을 전할 때면, 사람들은 우체국으로 가서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전보’라는 초급행 통지문을 보냈다. 비용 때문에 전보에 담는 글자 하나하나를 세면서…… 이런 식으로 말이다.


“000 폐병 사망. 장례 0월 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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