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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Aug 31. 2024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관하여

비판적 시선으로 해석하기

1.


피천득의 [인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로 그 수필에 감정이 동화하여, 오랜 그리움의 인연과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을 애써 헤아린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살다 보면, 충분히 그런 인연이 있을 수 있다.

어릴 때 보고 나서 그때의 아름다운 기억에 사로잡혀 마음속에 오래 두고 그리워하는 것.

[인연]은 그런 그리움을 향수처럼 자극한다.


(이 수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 인터넷에서 조사하여 먼저 읽어보기 바란다. 5분도 안 걸릴 테니!)


2.


그런데 그 그리움 속에 있는 ‘어릴 때’라는 것이 당신의 기억 속에서는 구체적이고 지속적이고 상대적일 수 있고 그러기를 바란다. 누군가 구체적인 대상과 구체적이고 지속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었으며, 그로 인해 서로 간에 확정적 기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그러나 피천득의 수필에서는 '나'가 열일곱 살에 만난 일곱 살 아이 아사코와의 기억이 구체적이지도 않고 지속적이지도 않고 상대적이지도 않다. 매우 피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수필에서는 아사코와 '나', 두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추억이 서로 간에 지속적이거나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또 그런 추억에서 살아나는 감정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에, 주인공인 '나'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상대방을 그리워하는지 또는 그리워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물며 아사코는 오죽하랴!

그때 그녀는 겨우 일곱 살이었는데!


그 수필에서 처음 등장하는 ‘나’는 열일곱 살에 불과하니, 아직 사춘기가 채 끝나지도 않은 소년이었다. 주변에 보이는 소녀들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나이였다. 그런 소년이 조선을 강제병합하여 무단통치하던 식민제국의 수도 도쿄로 유학하여 정착한 집에서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어린 일본 여자아이인 아사코를 만났다.


아사코는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사코가 얼마나 귀여워 보였던지, (약간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들게도) ‘나’는 혼자서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르"는 아사코를 좋아하게 된다. 일곱 살 외동딸인 아사코도 '나'를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그 어린아이의 감정이 어디 열일곱 살인 '나'가 좋아하는 감정과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라도 할까.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아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잊지 말기 바란다. '나'의 뺨에 입은 맞춘 사람은 ''나'와 같은 열일곱 살이 아니라 일곱 살 어린아이였다. 그렇게 아사코와 이별한 '나'는 아사코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데 당신이 아사코의 부모라고 상상하면서 생각해 보라.

열일곱 살 남자 유학생이 당신의 집으로 와서 잠시 기숙할 때 잘 대해주었는데, 그가 당신의 일곱 살 어여쁜 딸을 이렇게 좋아하고 그리워한다면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3.


두 번째로 아사코를 보게 된 것은 그녀가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을 때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로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나'는 아사코의 집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그러니 아사코는 아마도 스물한 살 정도였고 '나'는 서른한 살 정도였을 것이다. (또는 각각 한 살 차이 날 수도 있겠다.)


'나'는 그날 저녁 아사코와 대화를 나누면서 성심 여학원 캠퍼스를 두루 걸어 다녔다. 그리고,


아사코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이 짧은 하룻저녁 재회에서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 아사코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냉정히 말해서, 아사코의 시선으로 상상해 본다면, 일곱 살 때 보았던 열일곱 살 '남자사람오빠'를 십삼사 년이나 지난 후, 대학교 3학년이 된 현재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당신은 일곱 살 때 보았던, 그래서 한동안 당신과 재미있게 놀면서 지냈던, 당신보다 열 살 많은 남자를 잘 기억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당신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형제자매가 없는 당신과 같은 집에 살면서 함께 놀아주었던,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 오빠를, 그로부터 십삼사 년이나 지난 후 당신이 대학교 3학년 학생이 되어서도 잘 기억할 수 있겠는가.


수필에서는 대학생이 된 아사코가 '나'에 관해 어떤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냥 그날 밤, 영문과 학생인 아사코와 문학에 관해 대화했을 뿐이다.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여기서 아사코는 꽃다운 스물한 살 일본인 여학생이고 '나'는 이미 서른한 살인 조선인 '남자'이다.


또 상상컨대, 당신은 대학교 3학년, 그래서 가령, 스물한 살 아리따운 여학생이었을 때 서른한 살 남자가 나타나서 "나 기억하지?" 하면서 '문학'에 관해 대화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그날 밤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면, 오래전 함께 놀았던 그 남자임을 기억해 내고 그리워할 만한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좋게 상상해 본다면, '나'라는 사람이 식민지였던 조선으로부터 일부러 찾아온 손님이니까, 친절한 일본인 영문학도였던 아사코는 '나'에게 성의껏 대해주었던 것 아닐까. 개인적으로 보면, 예의 바르고 친절한 언행을 하는 일본인들은 정말 많으니까.


오래전에 자기 집에 기숙했던 남자라고 하니, 아사코는 아마도 거의 기억나지 않겠지만 그런가 보다 하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을 뿐인데, 서른한 살 남자인 ‘나’는 혼자서 또 착각한다. (당대의 문화적 개연성을 가지고 상상해 볼 때, '나'가 서른한 살이라면 아마도 식민지 조선에서 이미 적어도 혼인은 했을 테고 어쩌면 자녀까지 있는 남자가 아닐까.)


성심 여학원까지 산보 한 번 같이 다녀오고 그날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이별하더니 '나'는 또 혼자서 어여쁜 여대생 아사코를 그리워한다.


4.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십여 년은 20세기에서 가장 격동적인 세월이었다.

'나'는 나대로 해방과 분단과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겪었다. 아사코는 몰락하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급속히 패망하는 전쟁과 동경 대폭격과 치욕적인 항복과 사회적 대혼란과 무소불위의 미군정 지배시대와 한국전쟁에 기반한 경기회복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겪었다.


"1954년 미국 가던 길"에 도쿄에 들른 ‘나’는 또 아사코를 찾아갔고,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아사코를 만나러 간다. 아마도 일곱 살이었던 아사코를 만난 지 거의 삼십 년 정도 지난 시점이다.


그러니 예를 들면, 아사코의 나이는 서른일곱, '나'의 나이는 마흔 일곱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보다 두세 살 아래일 수도 있지만 이 수필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약간이나마 페미니스트적 독자라면 그야말로 매우 놀라게 하고 기분 좋지 않게 만드는 문장들이 나온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아, 갑자기 이 무슨 망발인가.


‘나’는 일곱 살 예쁘고 귀여운 아사코를 기억하고 있다가, 또 아름다운 스물한 살 여대생이 된 아사코를 혼자서 그리워하고 있다가, 드디어 ''나'가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아내가 된 서른일곱 살 아사코를 기별도 없이 찾아가서, 마당으로 느닷없이 들어서는 "나"와 마주친 아사코를 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다.


부디 잊지 말고 놀라지도 말기 바란다.


이런 글을 적는 사람은, 수필에 등장하는 마흔일곱 살의 '나'가 1954년에 경험한 것을 다시 수십 년이나 지난 후에 회상하는 피천득이다. 이미 미국에서 돌아와서 춘천에 있는 성심여자대학에서 강의했었고, 오는 주말에 다시 춘천에 가보려는 피천득이다.


하여간 다시 그 시대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보면, 1954년 미국에 가기 전에 '나'가 도쿄에 들렀다가 아사코를 찾아갔던 그때, '나'는 이미 오래전에 혼인하고 어쩌면 스무 살도 넘은 자녀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사코 역시 그 시대의 혼인 풍습을 생각해 볼 때 이미 열 살도 넘은 자녀들이 있었을 확률이 높다.


그때 아사코의 집 마당에서 갑자기 아사코와 마주친 인연을 두고 '나'는 이런 헛소리를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느닷없이 찾아가서 갑자기 마주친, "세 번째"를 두고 '나'는 '만남'이라고 표현하지만, 적어도 아사코에게는 그것이 어디 '만남' 축에 들기나 할까. 느닷없이 마당으로 쑥 들어와서 마주친 중늙은이 마흔일곱 살 조선인 남성을 아사코가 '세 번째 만남'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 되냐 이 말이다.


'나'는 아무 기별도 없이 갑자기 남의 집에 찾아가서 마당에서 마주친 여인의 얼굴을 보고 이런 소리를 하고 싶을까. 아사코는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가 '나'를 마주쳤을 수도 있고, 광폭했던 2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힘들어하거나 곤경에 처했을 수도 있다. 그런 아사코에게 '나'는 굳이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사코와 대화 한 번 없이 갑자기 마주친 겉모습만 보고 이렇게 표현하고 싶을까.


[인연]을 읽으면서 심장을 간지럽히는 애틋함이 없지 않지만, 거기에 나오는 ‘나’를 시간 순서에 따라 조금 과도하게 비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아사코의 외모만 보고,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볼 생각도 없이, 이렇게 속물적이고 저속한 독백을 하는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5.


‘나’가 피천득의 실제 과거인지, 아니면 가공된 인물인지 나는 모르며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수필 속의 '나'와 저자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피천득 자신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찌 됐든, '나'와의 만남은 아사코 입장에서는, 전혀 의도하거나 계획된 만남도 아니고 결단코 마음 졸이는 연애도 아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고등학생 때 예쁘고 귀여운 초등학생 여자애를 보고 오랫동안 기억했던 적이 있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예쁘고 귀엽게 보았던 또 다른 어린 여고생을 비교적 자주 본 적이 있다. 가슴 봉긋한 여성만 봐도 가슴이 설렜던 나이에 내가 보았던 여학생들은 피천득의 '나'가 만난 아사코처럼 일곱 살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단 둘이 따로 만난 적도 없지만, 그들은 나와 만난 경험을 훗날까지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든 여학생들이었다.


나도 사회인이 된 후에 예뻤던 그 여고생을 십여 년이나 지나고 나서 딱 한 번 만났던 경험이 있으며, 그 여학생의 변화를 보고 나서 만남을 약간이나마 안타깝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귀엽고 예뻤던 고등학생때와는 달라진 여인의 외모를 보고 나서, 나는 피천득처럼 “시들어가는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얼굴과 외모가 내 마음에 들지 않게 달라졌다 해도, 또 그녀의 현실이 내가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친다 해도, 그런 식으로 표현할 만큼 여성비하적이지도 속물적이지도 않다.


그런 여인을 두고 "시들어가는" 또는 "싱싱하여야 할" 따위의 표현으로 나와 인연이 있었고 친했던 여성을 비하해서 말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사실은,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나보다 훨씬 젊은 그 여인이 나를 보면서 내가 그간 얼마나 늙었는지 의식할까 봐 우려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새 훨씬 더 늙어버렸으니까.


나는 그 후에 피천득의 '나'처럼 남편이 있는 아사코를 의도적으로 찾아가는 세 번째 만남까지 추진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상상한 적도 없다. 어쩌다 생각나면, 어딘가에서 잘 살겠거니 할 뿐이다. 또 그렇게 무리해서 만난다 해도 피천득의 '나'처럼 겨우 딱 한 번 마주치고 대화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싱싱하여야 할" 따위의 헛소리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6.


[인연]의 ‘나’는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저자는 글 안에서 한 번도 아사코 입장에서 나를 어떻게 볼까에 관해 표현하지 않았고, 그런 상상력도 없어 보인다.


일곱 살 아사코가 열 살이나 많은 ‘나’와 재미있게 놀았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스물한 살 여대생 아사코가 나와의 하루 저녁 만남을 의미 있게 기억이라도 하겠는지, 그 후로 아사코가 '나'를 어쩌다 생각하고 그리워하기라도 했는지 등에 관해 저자는 아무런 상상력도 없고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감정에 빠져 있을 뿐이다.


'나'가 1954년에 아사코를 '본' 후에 했던 독백은, 진정으로 아사코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깊은 대화와 성찰을 거친 후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저 자기 혼자서 '아사코'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놓고 상상하고 자위했던 것과 같다. 그러다가 자기가 얼마나 변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아사코에 대한 혼자만의 상상이 깨지면서 '나'는 마치 이뤄지지 않는 ‘인연’을 아쉬워하면서 ‘파기’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릇, 이런 종류의 글이라면, 구체적인 회상과 사려 깊은 성찰 후에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차분히 적을 일이다. 아무리 짧은 수필이라 해도, 작가는 부디 작중 인물에 대한 인간적 배려를 하면 좋겠다.


수필의 시대적 배경은 일본제국주의와 태평양전쟁과 2차 대전을 거쳐 가는데, 피천득은 그 안에서 식민지의 처참했던 사회상과 전쟁의 참혹하고 잔인한 시대상과 서민의 고된 일상을 전혀 표현하지도 고려하지도 않는다. 수필의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들의 생활 사이에 마치 투명한 유리벽이 놓여 있는 듯하다. 그 격동의 시대에 아마도 수많은 부침의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아사코의 고단한 ‘삶’에 대해 작가의 상상력이나 배려심은 전혀 없다.


피천득의 ‘나’는 그저 아사코의 겉모습의 변화만 훑으면서 혼자 행복하고 즐거워하고 그리워하다가 혼자 실망하고 후회하고 체념한다. 자기 자신의 주관적 관찰과 해석 말고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세 번째로 마주친 아사코의 "시들어가는" (이라고 평가한) 얼굴을 보고 나서도, ‘나’는 그녀가 견디어 냈어야 하는 인생에 대한 상상도 고민도 배려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아사코의 생김새의 변화에 실망하고 후회하는 모양새다.


7.


수필 [인연]이 이렇게 적힌 까닭은, ‘나’라는 사람이 워낙에 사람을 보는 눈이 그 모양이고, 상대의 내면을 보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수필 속의 ‘나’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눈물겹게 고생한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어 보이며, 고난과 역경 가운데 삶을 살아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존경도 전혀 없어 보인다.


그것이 ‘인연’이라는 수필에 나오는 ‘나’의 한계이고, 어쩌면 평생  금수저로 살았던 피천득의 한계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10년 피천득이 독자로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서울 종각에서 종로 5가까지, 강남으로는 강남 양재동까지 땅을 소유했던 거부였다. 비록 그가 순수한 열정으로 열심히 공부도 했겠지만, 그것이 일제강점기에 전혀 돈 걱정 없이 중국 유학을 하고, 귀국한 후에 미국계 회사에서 일하고, 경성제대 예과 교수에서 서울대 교수까지 재직하게 된 개인적 배경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그런 배경을 가지고 산 사람은 극히 아주 극히 일부였을 것이다.)


이런 수필을 놓고, 사람의 ‘인연’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헤아리는 것은 어딘가 너무 피상적이고 가볍지 않은가.


'인연'뿐 아니라, 피천득의 다른 수필들을 읽으면 정갈한 음식상을 대하는 듯하고 괜히 마음이 순수해지는 듯도 하며 어딘가 설레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구체성이 없이 매우 피상적이고 너무 단편적이며 도덕성이나 철학적 깊이가 없고 지나치게 가벼운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다.


영문학자이자 평론가인 이태동이 한 신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수필에는 참으로 '눈먼 과찬'이 주어진 듯하다.

("수필장르의 창시자인 몽테뉴의 고전적 수필이 정전(正典)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글 속에 담긴 깊은 도덕적인 울림과 철학적인 주제의식 때문이 아닌가.... 엄격히 말해, 피천득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인연’을 포함해 그의 작품 대부분은 주제의식이나 도덕성 측면에서 정전의 반열에 오르기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과공(過恭)이 비례(非禮)인 것처럼, 과찬(過讚) 역시 비례이기 때문이다.‘"(서울신문 2007년 7월 5일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705030008&page=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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