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관한 작은 생각 (1)
1.
얼마 전에 단톡방에서 한 친구가 보낸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개신교 장로라는 친구의 페이스북에 있는 내용이라고 전했다. 그 사진은 소설 ‘흑산’에 나오는 기도문과 일부 문구였다. 그 사진을 그대로 실을 수는 없어서, 아래에 옮겨 적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전라도 서망 과부 오동희의 기도문
(김훈, 흑산, 105-106쪽)
“노비들은 상전이 없는 밭이나 들에서 소리 죽여 노래했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 (104쪽)
황사영은 다른 집 종으로 있는, 어미에게서 받았다는 창호지 조각에 적힌 언문 기도문을 받아 읽고 그해 마흔셋이 된 육손이를 면천한다. (106-109쪽)
위에 소개한 기도문의 시대 배경은 18세기 후반이다.
조선에 천주교가 유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천주교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대가 심했으며 결국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다. 황사영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겨우 26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조선 후기 시대라 당쟁이 심한 시기였고, 노비를 사고파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어쩌다 해방된 노비도 따로 먹고살 방도가 없었으므로 호구책으로 자신을 노비로 되파는 일이 많았다.
이 페북 인용문을 놓고, 한 친구가 이 기도문의 배경에 관한 설명과 기독교의 기도에 관한 생각을 물었다. 나는 약간 난감한 기분이 들었지만, 결국 그 소설에 이러한 기도가 나오게 된 배경과 기도문 내용을 조사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이 글의 소설 내용에 관해서는 김훈 소설 [흑산]에서 ‘육손이’ 편(94-109쪽)을 참고하고 인용했다.
2.
홍 00가 올린 친구의 기도문은 심금을 울리는 참으로 절절한 내용입니다.
서 00이 지적한 대로, "전라도 서망"은 진도에 있는 서망이 맞습니다.
인용된 대로, 이 기도문은 소설 ‘흑산’에 등장하는 육손이의 어머니인, 전라도 서망 과부 오동희의 기도문입니다. 홍 00이 올린 사진의 내용에 관해 소설 ‘흑산’을 기초로 하여, 이 기도문의 배경에 관해 나의 생각을 조금 덧붙여 설명하겠습니다.
육손이는 황사영의 노비인데, 손가락이 여섯 개라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습니다. 재주가 많고 주인에게 충실한 노비입니다. 육손이는 원래 정약현의 노비였지요.
정약현(1751-1821)은 나주 목사였던 부친 정재원의 첫째 부인의 아들입니다. 정재원의 둘째 부인인 윤소온에게서 낳은 세 아들이 바로 정약전-정약종-정약용이지요. 가장 큰 형인 정약현의 딸인 난주 (소설에서는 ‘명련’)는 황사영과 혼인했고, 이들이 살림을 옮길 때 정약현은 집안의 남자 노비 중 믿을 만한 노비인 육손이를 딸려 보냈습니다. 육손이는 정약현의 부친 대에 사 온 매득노였습니다.
육손이의 아비는 전라도 흥양(전남 고흥의 옛 지명)의 천석지기 최 씨 집안 삼대 전래비의 자식이었습니다. 전라도에 흉년이 들면서 상전이 노비를 팔고자 했습니다만, 양식이 없어서 팔리지 않자 노비가 먹고살기 위해 도망가는 것을 그냥 풀어줬습니다. 노비들은 다른 곳에 가서 자매(스스로 판매)하여 다시 노비가 됐지요.
그때 육손이 아비가 열 살이었다고 합니다. 육손이 아비가 쌀 한 가마니 값으로 팔린 후, 삼십여 년 동안 세 번이나 전매됐고, 결국 두물머리 강 건너 말 목장의 목노로 팔렸습니다.
한편, 조안나루 (남양주에 있는 한강 나루) 마을의 오 씨는 연간 오륙백 석을 거두었던 상전이었습니다. 그 집으로 며느리가 시집올 때 17세 된 교전비도 함께 따라왔는데, 그 노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그 노비가 딸을 낳은 후에 임신독으로 이내 죽고, 그 딸은 잘 자라서 제법 계집티를 냈지요. 그러나 그 집의 상전 오 씨는 이미 늙어서 비첩을 둘 수 없었으므로, 그 계집을 강 건너 말 목장의 목노에게 붙여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육손이입니다. 육손이는 어미 옆에서 자라다가 12세에 정약현 집으로 팔려 왔습니다. 정약현은 육손이가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방문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 아비가 죽었을 때는 열흘 말미와 노자를 주어 아비를 곡하고 묻게 했습니다. 이후 육손이는 정약현에게 믿음직하고 충실한 노비가 되었습니다.
3.
1791년에 조선 최초의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가 발생했습니다.
‘진산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은 모친상을 천주교 방식으로 치르고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 또한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웠습니다. 남인에 속한 이들에 관한 소문이 퍼져서 조정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서인들은 이를 구실로 남인들을 공격했습니다. 남인 내부에서도 천주교를 묵인하려는 신서파와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로 분열했습니다.
이 같은 당쟁 격화로 인해,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체포됐고, 그들은 전주 남문 앞에서 참수당했습니다. 그때 윤지충의 피가 묻은 전주성의 돌을 주춧돌로 삼아서 전동성당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신해박해를 계기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심히 두려워하여 배교했지만, 정약종은 꿋꿋하게 천주 교리를 지키고 제사를 거부했고, 제사를 강요하는 집안에서 아예 이사 나갔습니다.
신해박해 이후 제사 철폐 문제로 인해 천주교인들 중 양반들은 거의 모두 배교했지만, 중인계층을 중심으로 신도 수가 계속 증가했습니다. 1795년 무렵 천주교 신도 숫자가 4천여 명에 이르자,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파견합니다.
포르투갈 태생인 구베아 주교는 1782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북경교구장으로 임명된 이후, 1785년에 북경에 도착하여,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총애를 받은 인물입니다.
이승훈은 그로부터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입니다. 이승훈은 정약전과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했으니, 그들의 처남인 셈입니다.
구베아 주교는 교황청 지침에 따라 이승훈에게 조선의 전례를 배척할 것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조선 천주교인들이 제사를 배척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1791년 신해박해가 발생하게 됐던 것입니다.
제사 문제에 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조상 제사와 천주교의 갈등 문제는 16세기말에 중국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예수회는 제사를 미풍양속으로 간주했으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은 미신 행위로 판단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내에서 100년간 제사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 그리고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선언하고 교인들에게 제사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신자들은 제사에 참례하거나 신주 또는 신위 등의 위패를 집안에 두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고, 시신에 절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지침은 1790년 북경에 전달되었고, 당시 천주교에 귀의한 청나라 사람들과 조선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조상 제사 거부는 천주교를 반대하고 탄압하는 매우 중대한 원인이 되었고, 조선에서도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던 양반들이 돌아서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나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아시아에서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칙서를 발표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됐습니다.
아무튼 주문모 신부까지 조선으로 잠입한 이후, 조선의 천주교 신도 수는 급증하여 순조 즉위 직후 발생한 신유박해 (1801) 전까지 천주교인은 1만 명 정도로 늘어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