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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Sep 05. 2024

김훈 소설, '흑산'에 나오는 기도문에 관하여

'기도'에 관한 작은 생각 (2)

4.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정약현은 일찍이 집안의 노비들에게 언문을 가르쳤습니다.

육손이는 언문을 쓰지는 못했지만 읽을 수는 있었지요. 그 육손이가 황사영의 집으로 와서 일하다가 밤이 되면 중얼거리면서 노래하는 소리를 황사영이 듣게 됩니다. 황사영이 그 노래를 캐묻자, 육손이는 자기 어미에게서 얻어온 기도문이라면서 창호지 조각을 내밀었습니다.


삐뚤삐뚤 글씨로 적혀 있는 그 기도문이 바로 홍 00의 친구가 소개한, 전라도 서망의 오동희의 기도문입니다. 육손이의 어미가 노비이니, 성이 있을 리가 없지요. 상전인 오 씨 집안 노비로서 이름이 동희인 듯합니다.


황사영은 그 기도문을 보고 놀라서 바로 꿇어앉았습니다. 그는 (노비들도 금세 배워서 사용할 수 있는) ‘언문’의 무서움을 깨닫게 되고, 육손이에게 기도문을 외우니까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육손이는 노래를 부르니까 기분이 좋고, “주님의 나라”가 올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황사영은 “금방 올 것이다. 오래지 않는다.”라고 응답했지요.

그리고 육손이에게 “너를 풀겠다. 면천하고 나가거라.”라고 말합니다.


한 달 후에 육손이는 황사영을 떠나게 되는데, 정씨네 집에서 함께 종살이를 하던 김개동을 찾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개동은 제천에서 꼬불꼬불한 산길로 삼십 리 들어가는 ‘배론’이라는 마을에서 질그릇을 구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배론이 훗날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도피하여 백서를 썼던 곳이고, 오늘날에는 충북 제천에 있는 천주교의 성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5.


황사영(1775-1801)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1790년(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조 앞에서 뛰어난 학식을 과시했는데, 그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정조는 황사영에게 20세가 넘으면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그 약조를 잊은 듯, 황사영이 20세가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정약현은 정조가 혹시라도 자신을 조정으로 부를까 걱정했습니다. 자기 집안이 천주교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785년 3월에 을사추조적발사건, 일명 ‘명례방 사건’이 벌어졌지요.


이 사건은 서울 명례동 (지금의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이승훈과 정약전-정약종-정약용 3형제, 권일신 등이 미사를 집전하고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다가 적발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김범우는 투옥됐다가 밀양으로 유배된 후 곧 죽었고, 다른 사람들은 양반이라고 석방됐습니다.


이 명례방 모임을 두고 천주교에서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회라고 하며, 다른 호칭으로 ‘명례방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113년이 지난 후인 1898년 명례동에 명동성당이 건립됐습니다. 조선 기독교의 상징적 건물이 세워진 겁니다.


1787년에는 성균관에 딸린 반촌 (지금의 명륜동과 혜화동 자리)에 있는 김석대의 집에서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성경을 강습하다가 또 발각됐습니다. 이를 ‘반촌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천주교 사건들로 인해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1788년 정조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전국적으로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성리학이 융성하면 천주교가 자연히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던 정조는 이 금지령을 발표하면서, ‘사람은 교화하되 서학서는 단속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까지도 정조는 천주교에 관해 유교를 해칠 종교로 해석하기보다 서양의 학문으로 보는 관점이 강했던 듯합니다.


하여간 이런 이유로 인해, 정약현은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것을 염려하여 조정에 나가기를 두려워했고, 사위인 황사영에게도 출시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황사영도 처숙부인 정약종으로부터 천주 교리를 배웠으며, 1791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세례 직후 신해박해가 발생했고, 이후 황사영은 출시를 단념했습니다.



1801년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섭정을 통해 천주교 탄압령을 내립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신유박해입니다. 이때 정약용도 국문을 받게 됐는데, 황사영이 천주교인임을 고하게 됩니다.


박해가 시작됐을 때 황사영은 정동에 숨어 있다가 제천에 있는 김귀동을 찾아가고, 앞서 육손이가 면천 후에 간다고 했던 배론으로 가게 됩니다. 그가 배론에서 숨어 있던 토굴이 지금은 성지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황사영은 천주교 신자 마을인 배론에서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명주천에다 신유박해의 참상을 깨알같이 적었고, 그것을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지요. 두 자 정도 되는 명주천에 깨알 같은 글씨로 1만 3,311자를 썼다고 합니다.


신유박해의 참상 외에도, 청나라가 종주권을 발휘해서 조선을 하나의 성으로 편입하는 것이 좋으며,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오륙만을 보내서 조선 정부를 협박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이었지요.


이 백서를 음력 10월 청나라로 가는 동지사 일행에 끼워 보내려고 했으나 발각되었고, 황사영은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황사영은 혹독한 고문 후에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6세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 당했고, 그의 아내인 난주는 노비가 되어 제주도로 갔습니다. (이후 난주의 여생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 '난주'에 사실과 상상이 뒤섞여 적혀 있습니다.)


황사영 사건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황사영이 백서에 적은 생각이 당시 천주교 지도부에 만연한 생각이기도 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천주교 지도부 내부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서양의 힘을 통해 앞당겨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여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 천주교 탄압은 더욱 정당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6.


또 소설로 돌아가서…


황사영은 명련과 사랑을 나누고, 명련의 부드러운 몸을 느끼고, 잠이 든 명련 곁에서 천주의 증명에 관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처숙부 정약종이 가르쳐준 대로, 천주의 증명이며, 그 증명이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이 천주의  권능일 터였다. 황사영은 산과 강에서 두루 천주를 느꼈는데, 명련에게서 느끼는 천주는 제 몸처럼 분명했다.”(93-94쪽)


나는 황사영이 생각한 천주의 증명과 천주를 느꼈다는 문구에 주목합니다. 김훈이 황사영의 생각을 상상해서 쓴 이 문구는 언뜻 “주의 나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황사영이 산과 강에서 두루 천주를 느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손에 실체로 잡히는 명련의 몸에서 특별히 천주를 분명히 느꼈다는 겁니다.


앞서 육손이와 황사영의 대화에서도 나왔지만,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올 것이라는 말은 육손이가 노래했던 기도문에도 적혀 있지요.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그러니, 이 기도문에 관한 단톡방 논의에서 서 00이 나중에 물었던 바, “19세기 조선 노비들이 사후 천국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희망했다는 그 어떤 객관적 증거가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런 객관적 '증거'는 예를 들면, 육손이의 기도에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믿음과 희망으로만 그쳤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사후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조속히 지상으로 다시 돌아와 주님의 나라를 구현할 것이라는 '현실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기독교인은, 시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또 누구인가에 관계없이,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주의 나라가 임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사후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돌아올 것을 약속한 대로,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가 돌아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가 현실세계로 돌아오지 않자 열광적으로 예수를 기다리던 교인들은 실망하게 되었겠지요.


그때 바울은, 가령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보낸 서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강림 문제를 이 세상의 연대기에 따라서 해석하지 않고 믿음과 거듭남의 영역으로 치환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은, 현실적인 지상으로의 재림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자들에게 신앙의 거듭남으로 재해석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신앙의 내적 믿음과 현실적인 재림 사이를 오가며 논쟁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것은 또한 주류 기독교단과 이단 종파 사이를 오가는 중요한 쟁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자신이 살아 있는 시기에 그리스도가 지상으로 재림하지 않는 문제에 관해, 교회 지도자들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라는 문구를 비롯하여 신약 여러 곳에 있는 묵시록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바울의 이론과 전통에 따른 기독교 성립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주님의 나라”가 그를 믿는 자의 마음 안으로 세워진다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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