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묘지의 쓸모
1.
미국에 와서 산 지가 오래되다 보니 나는 한국의 민속문화에 친숙하지 않다. 한국의 민속문화와 전통적 미풍양속을 잘 알지도 못한다. 추석에 성묘를 가본 적도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독교인이었다. 어머니와 외가 친척은 모두 충실한 교인이었으며 절대로 제사 지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기독교리에 위배되는 우상숭배로 인식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친가 친척은 거의 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충북 괴산이라, 시골에서 제사를 어떻게 지냈는지 서울에서 자란 나는 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 시골에 갔을 때도 제사나 차례를 지낸 적이 없다. 그 시절에는 명절이라 해도 서울에 살고 있었던 내가 시골까지 가기는 어려웠다.
초등학생이 되던 무렵부터 나는 신림동에 살고 있는, 우리 집안의 장손인 큰 사촌형 집에서 치르는 제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골 괴산에서도 큰아버지가 따로 제사나 차례를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제사나 차례에 참여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나는 큰 사촌형 집으로 가곤 했다.
초등학생 시절 나에게 제사란, 단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순서에 맞춰 절 하라고 할 때 절 하고, 제사 후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사와 다름없었다. 물론 제사 전후에 나는 내 나이와 비슷한 조카들을 만나서 놀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육 남매 중 막내였고, 나 또한 오 남매 중 막내여서 나의 사촌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일부 조카들마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친족의 항렬 관계를 따질 때 나와 조카들은 서로 어울려 놀기가 다소 불편했지만, 아이들일 때는 조금만 자주 만나면 그런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조금 더 의식적으로 제사에 참여했다. 그때는 나름대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신앙심을 키우고 있었고 특히 사춘기를 지나면서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깊은 고민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저 나는 여전히 제사와 차례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이자 전통문화라고 인식했고, 그 문화는 충실하게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또한, 기독교인이라 해도 제사와 차례에 성실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단지 조상을 기리고 감사를 드리는 전통적 행사이므로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초등학생 시절에 겨울방학이 되면 나는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가서 할아버지 묘소까지 갔던 적이 있다. 눈이 많은 겨울 산을 겨우 올라갔으며, 찬 바람만 부는 황량한 곳에서 흰 눈으로 덮여 있는 여러 묘지를 찾아가 나는 아버지를 따라 찬 눈에 두 손을 묻고 절을 했다. 묘소에 가서 그렇게 절을 하는 것은 아마 그 시절에 시골에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듯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늑막염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부터는 나 또한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대입 공부를 위해 교회를 떠날 때까지 나름대로 성실한 기독교인이 되고자 했다. 교회에서는 물론 제사에 참여하지 말고, 그런 자리에 가더라도 ‘절’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큰 사촌형 집으로 가서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향을 피운 위패 앞에서 절을 했다. 거기에 조상귀신이 오든 안 오든, 내 눈에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 당시 나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았고, 또는 믿었다 해도 실제적으로는 의미 있는 체험을 하지 못했으므로, 교회가 강조하는 '우상숭배' 문제를 개의치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무조건 귀신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사실은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잘 몰랐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든 모르든, 제사나 차례가 우리 민족이 보존해야 할 중요한 미풍양속이며, 조상에게 감사하는 문화와 제도는 어느 국가 어느 민족에게나 당연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이 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확보한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3.
그러나 제사에 관한 한, 정작 큰일은 제사를 담당했던 큰 사촌형 집에서 벌어졌다. 그 부부가 갑자기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제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중1 가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수년 전부터 큰 사촌형 부부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제사 문제를 두고 내적 갈등을 겪었다는 것이다.
장손인 큰 사촌형이 느닷없이 제사를 거부한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집안에서는 큰 갈등과 다툼이 벌어질 만한 일이 되었다. 서울에 있는 친가 친척들 중 가장 웃어른인 아버지는 큰 사촌형 부부를 찾아가서 제사는 장손의 책임이라고 엄중히 타이르기도 했지만, 그 부부는 막무가내로 버티었다. 큰 사촌형의 두 남동생들도 형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제사를 거부하려는 형을 비난했다.
나 또한 큰 사촌형 부부의 신앙 해석과 전통문화 접근방식이 못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제사가 그저 전통문화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그와 별도로 스스로 잘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겨우 중학생에 불과한 내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외가 친척이 결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큰 사촌형 부부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후, 제사 문제는 ‘다행히’ 해결됐다. 큰 사촌형 대신 둘째 사촌형이 형 대신 제사를 맡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아버지와 나는 한동안 둘째 사촌형 집으로 가서 차례와 제사를 지냈다. 물론 큰 사촌형 부부와 가족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 또한 중3 무렵부터 점차 더 이상 아버지를 따라서 제사에 가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인이라서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수년째 일요일 아침마다 나는 교회에 가고 있었다. 다만, 중3 여름이 지나면서 주말에도 학교 공부를 해야 할 때가 많아졌다. (그러나 사실은 그때 작게나마 나에게 제사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도 없지 않았다고 고백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부분적으로는 학교 공부를 핑계로 내세웠다. 그러자 아버지는 굳이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셨다. 내가 가기 싫거나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때 아버지는 둘째 사촌형 집으로 혼자 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그냥 따라갈걸!)
아버지는 완고한 분이 아니었다. 이미 시대 변화와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계셨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전개되었던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제사와 차례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거부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새로운 물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4.
미국에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부모님을 공동묘지에 모시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오 남매 중 다수는 훗날 죽게 되면 ‘화장’을 원하는 편이지만, 부모님은 화장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뉴욕주에 있는 한 공동묘지에 부모님의 장지를 마련했다. 그렇게 묘소가 생겼다고 해서 우리 가족들 중 그곳으로 가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사람은 없다.
어릴 때부터 제사와 차례와 성묘 문화를 거의 경험한 적이 없고, 거기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며, 제사에 참여하여 절하는 것에도 심리적 거리감과 거부감이 있어서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아직도 부모님 묘지에 가서도 절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 묘지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 묘지를 마련하고 이태 정도 지났을 때,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정했다.
내가 묘지 근처에 사는 한, 한 해에 적어도 두 번은 묘지로 찾아가겠다고.
미국은 아주 넓어서 가족의 묘지로부터 먼 곳에 살게 되면 묘지를 찾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서부나 중서부 지방에 살면서 뉴욕에 있는 묘지에 오려면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이장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없다.
미국 아이들은 대체로 자기가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으로 진학한다. 졸업 후에 직장은 또 다른 어딘가로 가게 될 때가 많다. 따라서 고향에 정착하려는 개념은 점차 불투명해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묘지 방문에 관해, “묘지 근처에 사는 한”이라고 조건을 내세워 말하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다행히 그렇게 살고 있다. 자동차로 한 시간도 안 걸리니까.
나는 한 해에 두 번 이상, 주로 봄과 가을에 날이 좋을 때 부모님 묘지를 찾는다. 그럴 때 명절이나 생일이나 기일 등 특정 날짜를 따지지 않는다. 순전히 내 편의를 위한 결정이다. (미국에서 한국의 명절 날짜를 따르면서 차례 등을 준수하기 어렵다는 것도 이렇게 하는 한 이유가 되었다.)
언젠가 딸을 데리고 묘지에 갔을 때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네가 여기서 먼 곳에 산다면 할 수 없지만, 만약 이 근처에 살게 된다면, 지금 아빠가 하는 것처럼 너도 부디 매년 봄가을에 이 묘지에 찾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훗날, 내가 죽었을 때 나는 화장하여 묘지가 없겠지만, 네가 이곳으로 와서 나를 생각하고, 나아가 나를 낳고 기르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생각하고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의 부모님도 나를 무척 사랑하셨다."
물론 나는 내 딸이 내 말을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아마도 실제로는 내 말을 잘 따르기는 어렵겠지만, 아직까지는 예쁘게도 그렇게 하겠다고 딸은 대답했다.
이곳의 공동묘지 모습은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 묘지라고 해야, 넓은 잔디밭이 있는 곳에 비석들만 줄지어 서 있다. 이곳 공동묘지는 한국처럼 동그랗거나 네모난 봉분을 만들 수는 없는 곳이다. 묘지 차림새는 오로지 각 공동묘지의 정책과 관련법에 속한다. 어떤 공동묘지는 비석조차 세우지 못하게 한다. 그런 곳에서는 비석 대신 이름과 연도를 새긴 철판을 잔디밭 위에 박아 놓는다.
5.
하여간 부모님 묘지에 가서 나는 절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 앞에 잠시 서서 부모님을 생각한다.
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제사나 차례에 갔던 것처럼 나도 딸을 공동묘지에 데리고 가면, 나는 속으로 부모님께 당신의 손주가 이렇게 잘 자랐다고 보고하고, 부모님이 어딘가에서 평안하게 잘 계시기를 기원하며, 우리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덩달아 빈다. 또한,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키웠고, 그들의 일생에 어떤 즐거움과 슬픔이 있었는가에 관해서도 떠올린다.
차례나 성묘가 아니라 해도, 살면서 어떤 고민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나는 때때로 부모님 묘지에 가기도 했다.
“아버지,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나요?”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어요?”
묘지 옆에 앉아서 나는 나에게 닥친 고민을 아버지라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를 생각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어느 정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이었고, 누구보다 내가 믿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설사 어떤 뚜렷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해도, 부모님 옆에서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아주 잠시나마 부모님과 대화하는 것이고, 곤경에 처한 나를 다듬는 명상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부디 한국의 전통 제사-차례-성묘 문화가 잘 보존될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다 보니, 비록 나와 우리 가족은 그 문화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한국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문화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잘 받아들여서, 조금 귀찮은 형식과 절차이기는 하지만 그 미풍양속을 잘 보존하기를 기원한다.
다만, 그 전통을 중요시하고 따르면서도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덜 고생하고 차별당하지 않을까에 대해 폭넓은 사회적 논의와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요즘 이곳은 날이 무척 좋다. 추석이 코 앞에 다가왔으니, 내일은 부모님 묘지에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