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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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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Aug 11. 2023

뉴욕일기 - <큰 나무의 제삿날>

(왼쪽 위부터 사진 설명. 내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때 나무는 이미 기둥만 남은 상황이 됐다. 가지들은 이미 높다란 가지치기 기계가 모두 잘라냈다. 이어 인부가 나무로 올라가서 남은 윗가지들을 모두 잘랐다. 그 나무들은 줄에 묶여서 아래로 내려온다. 이어 나무에 올랐던 인부가 나무에서 내려가면서 기둥을 토막들로 잘라낸다. 결국 나무는 모두 잘리고 인부들은 마당 밑바닥을 다지는 작업까지 마쳤다. 잘린 나무 가지와 기둥 토막은 모두 집 앞에 있는 커다란 트럭으로 옮겨졌으며 작은 조각들로 산산이 분해됐다.)



1. 

큰 나무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늘이 지상에서 저 큰 나무의 마지막 날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아침 일찍부터 창밖에서 큰 트럭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트럭이 다른 날과 달리 일찍 왔나 싶었는데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창밖을 보니, 무려 세 대나 되는 낯선 거대한 트럭들이 우리 동네로 들어섰다. 우리 집에서 6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집 앞으로 긴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트럭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트럭들은 자른 나무를 처리하는 차들이었기 때문이다.


저 정도 규모라면, 누군가 오늘 큰 나무를 자른다!

그 일이 저 집에서 벌어지는가 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집 뒤에 있는 나무라면, 우리 동네에서 키가 가장 큰 나무가 있는 곳인데…


나의 불안함은 적중했다.

트럭에서 사람들이 나오더니 곧 뒷마당으로 통하는 그 집 잔디 위에 허연 널빤지 같은 것들을 깔았다. 푸른 잔디 위에 놓이는 그것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 널빤지 위로 잘린 나무를 옮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조금 후부터 나무를 자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2.

그들이 자르려는 나무의 높이는 아마 50미터도 넘을 것이다. 나무 기둥이 아주 우아하고 우직하게 곧게 뻗은 나무다. 두꺼운 기둥 옆으로 뻗은 가지들이 거의 없는 나무다. (오래전에 그 나무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을 것이다.) 가지와 잎사귀들은 나무 하단에는 없고 주로 상단에만 둥그런 모양으로 몰려 있는 나무다. 그렇다면 가지들이 보기 싫은 것도 아닌데, 그런 나무를 왜 굳이 자르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나무의 아래 가지들부터 자르기 시작했다. 나무 아래라고 해도 지상에서 20여 미터 이상 올라간 곳이었다. 먼저 크레인 같은 기계가 그곳까지 손을 뻗었고 나무 위로 인부가 올라갔다. 그 사람이 나무 가지에다 밧줄을 매고 전기톱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 나무 가지를 자르고 남은 가지의 밑동이 드러나 보였다. 나무에서 가지를 자를 때는 언제나 나무 기둥에서 뻗은 가지의 밑동까지 바싹 붙여 자르는 법이다.


나는 이따금 부엌 뒤편 베란다로 나가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높은 나무 가지들 위에 밧줄들이 걸려 있고 한 사람이 나무 기둥에 큰 매미처럼 붙어 있었다. 그는 전기톱으로 나무 가지 밑동을 자르는 사람이었다. 나무 가지는 사람 몸통만큼 두꺼워 보였다. 그렇게 잘린 나무 가지가 땅으로 그냥 떨어지지 않도록 그는 가지들에 밧줄을 묶는 역할도 했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기술을 동원해서, 기계적으로 천천히 내린 거대한 나무 가지를 인부들이 더욱 작게 자른 후에 집 앞에 있는 트럭으로 날랐다. 그 트럭의 뒤에는 나무를 분쇄하는 기계가 붙어 있다. 인부들은 뒷마당에 떨어진 가지를 집 앞으로 나른 후, 트럭 뒤에 있는 나무 분쇄 기계의 커다란 입구로 들이밀었다. 커다란 네모 모양의 아가리로 들어간 나무 가지들은 요란한 굉음이 울리는 가운데 작은 조각들로 산산이 쪼개진다. 무시무시한 기계였다. 누구라도 그곳으로 들어가면 뼛조각도 추릴 수 없을 것이라는 상상…


3.

그 나무는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 뒷마당에 있는 뽕나무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나무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키가 크고 멋있게 생긴 나무이기 때문이다. 나는 베란다에 나가서 있을 때 으레 그 큰 나무를 보곤 했다. 나무가 있는 풍경은 나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평화와 안식을 준다. 작은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로 위용을 자랑하면서도 신기하게 다소곳해 보인다.  웅장한데도 왠지 겸손해 보인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잘린 가지들을 내보이고 서 있는 그 나무의 기둥들을 허전하고 아련하게 바라본다. 잘린 나무 밑동은 하얀 속살을 드러내 보였다. 팔과 다리가 잘린 모양이었다. 가지들이 잘려 나갈 때마다 나무는 점차 아래 가지들을 잃고, 마치 벌거벗은 사람이 손만 들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가 그렇게 자라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 나무는 내가 이 동네로 이사 왔던 십 년 전부터 그렇게 의연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나무의 나이가 적어도 오십 년, 또는 그 이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맨해튼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 동네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아마도 1970년대 후반 무렵일 것이다. 그전에도 물론 집들이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지만, 그 무렵 새롭게 부동산 붐이 일어서 개발업자들이 낡은 집들을 부수고 새 집들을 지었던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저렇게 큰 나무의 나이는 적어도 50년은 될 것이다.


그렇게 나이 든 나무가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나절에 불과했다. 아침 8시에 트럭들이 도착했는데, 오후 2시에 나무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이후에도 두세 시간 정도 인부들이 나무뿌리 부분을 제거하고 마당을 완전히 평평하게 다듬는 듯했다. 부엌 베란다에서 그 집 마당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인부들은 오후 5시까지 기계톱 소리를 냈다. 필시 사람 서넛이 손을 뻗어야 둘러쌀 수 있는 나무 기둥의 밑동을 완전히 없애는 작업일 듯싶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 끝났다. 그 나무의 일생이.


나무를 다루는 인간의 솜씨는 가히 놀랄 만하다.

수십 수백 년이나 된 나무를 자르고 완전히 분쇄하는 데 겨우 몇 시간이라니!

아, 아무 저항도 없이 허무하게 잘려 작은 조각들로 사라진 나무!

오후에 나는 나무가 사라져서 낯설어진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에 아주 큰 나무가 있었던 사실을 누가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나무의 쓸모를 다시 생각한다.

특히 이렇게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서 나무는 얼마나 우리에게 풍요와 안식을 주는가.

저 나무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푸르름을 즐길 수 있는가.

저 나무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늘과 대지가 주는 생명의 풍요로움을 인식할 수 있는가.


나무는 뿌리와 기둥을 중심으로 가지들을 뻗고 거기에서 더욱 싱싱한 생명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잎사귀는 우리 눈에 너무나 잘 드러나는 생명의 변천이다. 사시사철 그들은 자신을 변화시키면서 우리에게 자연의 이치를 전해준다. 그들은 오로지, 하늘에서는 햇빛과 공기를, 땅에서는 습기와 양분을 얻었을 뿐 인간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땅에서 자라고 땅으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인간만이 건물을 지어 그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햇빛을 가로막았고 땅을 비좁게 만들어 물의 흐름을 방해했으며 식물이 싫어하는 제초제를 뿌려서 괴롭혔다. 자연은 그들에게 빛과 양분과 물을 제공했지만, 인간은 오로지 그 아래에서 즐기기만 했다.


4.

이미 여러 차례 말했지만, 우리 집 뒷마당에는 뽕나무가 있다. 나는 그 뽕나무가 좋다. 그 푸르름이 나에게 싱그러움을 준다. 봄에는 연둣빛 싱그러움이 한껏 내 눈에 담긴다. 그 빛은 나에게도 생명력을 전하는 듯하다. 나무에서 작은 생명들이 싹을 내고 영글어가면서 짙은 초록 향내를 풍긴다.


여름이면 가지들에 잎사귀들이 풍성해서 풍요롭고 넉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특히 건넛집을 가린다. 나는 뽕나무가 그렇게 건넛집과 내 집 사이에 서서 사생활을 조금이라도 보호해 주는 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바람이라도 불어서 드넓은 하늘 아래 한들거리는 가지와 잎사귀들은 얼마나 한가롭고 정겨운 풍경인지 모른다. 비가 내려서 잎사귀들에 부딪혀서 내는 소리는 정겹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나는 저절로 삶의 여유와 한가로움을 깊이 느낀다.


가을이면 잎사귀들의 색깔이 변하고 결국 그들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서 나무는 나에게 한없는 연민과 아련한 감정을 안겨준다. 그 과정은 나에게 삶과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를 알려준다. 겨울에는 가지에 눈이 쌓여서 인간이 결코 만들어내지 못할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나무는 대지에서 태어나서 대지로 돌아가는 생명의 본질을 해마다 깨닫게 해 준다.


그 나무는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다.

애당초 나무는 누구의 소유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 듯하다.

그 나무에 새들이 자주 날아온다. 새들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나무에서 쉬고 나무에서 노래하며 나무에서 동무를 만나서 짝짓기도 한다. 새들은 나무에서 먹이를 먹기도 하고 나무에 숨어서 자기를 보호하기도 한다. 새들은 나보다 나무를 더 사랑한다. 새뿐 아니라 각종 벌레와 야생 동물들도 모두 나보다 나무에 더 삶을 의지한다. 그래서 나는 뒷마당 잔디에 제초제를 뿌릴 수가 없다. 나는 최대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있도록 두고자 한다.


동물에 관해서 문외한이고 자연 탐구하기에도 게으른 나는 우리 동네에 있는 새들의 종류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대충 열 가지 정도로 구별된다. 실제로 열 가지 정도의 새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새들이 상이한 소리를 내기라도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여간 나무들이 있어서 새들이 쉬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새들이 오늘 가장 높은 나무 하나를 잃었다.


오늘 잘린 나무는 그 집 사람들에 비해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집주인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 나무를 자를 결심을 했을까. 그것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말이다. 참 아쉽다.

하여간 오늘이 우리 동네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의 제삿날이 됐다.

겨우 한나절만에 그 나무는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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