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mory Oct 02. 2024

이방인 (2)

학교와 선생님 - 궁핍의 시대

3.


갑자기 낯선 아이들 속으로 떨어진 우리는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나는 가을학기가 시작된 첫날 아침부터 이번 학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9반 담임선생님과 아이들은 6반에서 온 우리를 마치 다른 학교에서 전학생이 온 것처럼 취급했다. 나는 그들이 이미 한 학기 동안 쌓아 올린 높고 두터운 벽에 부딪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어찌 보면 그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낯선 것을 멀리하거나 경계하지만 친한 것을 가까이하고 마음을 여는 법이니까. 9반 아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낯선 우리에게 거리를 느끼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마음이 전하는 친밀감의 정도에 따른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이었다. 제법 덩치가 크고 비교적 숫기가 좋았던 나 또한 불현듯 다가온 소외감과 왜소해지는 감정에 사로잡혀 그들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선생님은 늘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우리를 대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잘 웃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거의 언제나 얼굴이 굳은 채 하루를 지냈으며, 아이들이 소란스러운 것을 조금도 참지 못했다. 

그녀는 또한 6반에서 온 우리를 늘 따로 취급하는 듯했다. 그녀는 매우 자주 “너희는 1학기 때 우리 반에 없어서”라는 구절로 시작하면서 말하곤 했으므로 우리의 소외감은 2학기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감으로써 교실 안의 학생 숫자는 7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1학기 때 임신했던 우리 담임 선생님보다 성격이 날카로운 새 담임은 차갑고 무서웠으며 화를 잘 냈다. 그녀가 원래부터 성격이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그 반으로 편입되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한 번도 다정하게 대하지 않았고 자상한 웃음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우리를 원래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받게 된 귀찮은 일거리인 것처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으며 차별적으로 취급했다.


“6반에서 온 아이들은 1학기 때 내가 가르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1학기 때 너희 반에서 이런 것을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1학기 때 너희 선생님이 이런 것을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1학기 때 내가 너희를 가르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새로운 담임은 가을학기 초 수업 중에 수도 없이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는 혹시 선생님이 말버릇처럼 하는 그 구절을 원래 9반에 있던 아이들이 너무 많이 듣게 되어서 지치고 질리고 더욱 우리를 멀리 느끼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우리가 9반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은 선생님의 그런 말버릇을 경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선생님이 매우 자주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별도리 없이 그녀의 말에 집중하기는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이미 1학기 때 그녀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배운 상태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그녀는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말은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느끼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정확히 그 내용을 배웠는지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실은 그것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별도로 느껴지는 대상이었으므로 나름대로 자신의 부담감을 습관적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저 긴장한 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낯선 교실 낯선 아이들 속으로 던져진 채 가을학기 한두 달이 지나갔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이상하게 우리는 9반 아이들과 친해지지 못했고 어딘가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미 봄학기를 같이 보낸 9반 아이들은 느닷없이 6반에서 온 우리들과 자주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고 묘한 거리감을 두면서 잘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친한 사람과 어울리고 대화하는 것이라 그런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도 했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어떤 기분이냐 하면, 어느 날 갑자기 고아가 되어서 남의 집에 입양됐는데, 입양한 부모와 자녀들이 우리를 타인으로 느끼고 거리감을 두는 것과 비슷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주눅이 든 우리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명백히 그 학기 내내 이방인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은 교실에 칠십 명도 넘는 아이들이 앉아 있었으므로 40대 후반의 날카로운 성격의 선생님은 목소리를 더욱 높여야 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도 힘든 일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목이 아프다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힘들어했으므로 뒤에 앉은 나는 그녀의 말을 자주 놓치기도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조금만 떠들거나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곧바로 화를 냈고 이윽고 단체 기합을 주었다. 단체 기합을 줄 때 그녀는 칠십 명도 넘는 학생들을 모두 때리기는 힘들었으므로, 우리에게 책상 위로 올라가서 꿇어앉도록 했다.


“왜 이렇게 말 안 들고 떠들어. 너희들은 오늘도 정말 혼나야겠구나.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가. 올라가서 꿇어앉아.”


새 담임 선생님의 특징은 아이들을 혼낼 때마다 단체로 책상 위로 올라가게 했다는 것이다. 누가 선생님의 말을 안 듣고 누가 딴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가야 했다. 우리가 그렇게 꿇어앉으면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가 또는 아이들 사이를 걸어 다니다가 곧 우리가 무엇이 문제인지 꽤 지루하게 훈시했다. 아마도 5분 정도 우리가 책상 위에 꿇어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때로는 아무 말도 없이 책상에서 자기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아이들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던졌고, 결국 자기 일을 어느 정도 한 후에야 우리가 책상에서 내려와 앉도록 했다.


더욱 화가 났을 때 선생님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우리에게 책상 위에 꿇어앉은 채 두 손을 들고 있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가 떠들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그렇게 똑같이 단체로 혼나야 했다. 나 개인으로만 말한다면, 수업 중에 선생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떠들거나 딴짓을 하지 않았으므로, 늘 그렇게 단체로 벌 받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벌서는 동안 선생님은 우리가 지난번에 벌을 섰을 때와 동일한 말들을 되풀이했다. 착한 아이들은 선생님 말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너희들은 말도 안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떠들기만 한다고.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고 더욱 화가 났을 때, 선생님은 기어이 매를 들고 책상 위에 꿇어앉아 있는 아이들을 모두 때렸다. 그녀는 아이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아이들에게 한 명씩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도록 하고 세 대씩 내리쳤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실 먼저 맞는 것이 낫다. 옆 또는 앞에 있는 학생이 매를 맞으면서 아파하는 모습을 듣고 보면서 내가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손바닥을 접었다 펴기도 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여러 가지가 생각나기 마련이다. 나는 손바닥을 맞는 순간에 양손의 손날 부분을 조금이라도 위로 들어 올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러면 매가 내 손바닥 전체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덜 아픈 손날 부분을 때리게 되어서 덜 아플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묘안을 떠올리고 맞는다 해도 결국 아픈 것은 마찬가지다.


아무튼 모든 아이들이 차례대로 손바닥을 맞는 동안 우리는 책상 위에서 불안한 자세로 마음을 졸이고 있으면서도 두 팔을 계속 위로 들고 있어야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때라다 말고 이따금 양팔을 높이 들고 있는가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안 본다고 손 내리지 말고 들고 있어."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한다 해도 그녀가 아이들을 모두  때리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으므로 우리는 두 팔을 계속 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멀리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동안 우리는 눈치를 보면서 몰래 팔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곤 했다. 팔이 아파서 계속 들고 있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참으로 비굴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또한 굴종과 기만과 눈치를 동원하여 권위와 폭력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아무도 선생님에게 왜 그렇게 하냐고 묻지도 대들지도 못했고, 우리는 인내하고 비굴한 웃음을 보이면서 참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불안하고 불편했던 날들이 가을 내내 이어졌지만 우리는 결국 견디어냈고 어느덧 겨울방학을 맞게 되었다.



4.


벌을 받을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이렇게 하면 아이들로 하여금 수업에 집중하고, 조용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겨우 여덟 살에 불과한 아이들이 오전 내내 또는 오후 내내 수업 시간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줄을 맞춰 똑바로 앉은 채 학업에 열중하기를 선생님은 정말로 바랐을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또는 그렇게 아이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게 한 후 매로 때리면 딴짓하고 떠들던 아이들이 더 이상 산만하지 않게 되어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무조건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히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모두 어려운 문제다. 따지고 보면 상황이 우리 모두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상급적 권위를 가지고 폭언과 폭력을 선택할 수 있는 교사가 아무 대안이나 선택도 없이 순종을 강요당하고 체벌을 감내해야 했던 학생들에 비해 우월한 입장에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한 반에 서른 명도 안 되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도 교사들이 힘들다고 하는 판에, 칠십 명 정도나 되는 아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당시의 교사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이나 교사들에게 모두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선생님은 언제나 매를 들고 다녔으며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대했다.


당시 2년제 교육대학을 나온 초등학교 교사들의 교육 능력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선생님마다 아이들을 때리는 폭력이나 교육 방법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좁은 교실에서 어린아이들이 온종일 줄을 잘 맞춰 앉아서 조용히 수업에 집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부분의 교사들은 수업 시간마다 우리들에게 그런 자세를 요구했다. 선생님들은 각각 차이가 있지만, 교육적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기만 하면 아이들을 혼내고 때렸다. 그 선택과 체벌 방법은 오로지 선생님의 권한에 속했다.


교사들의 폭력과 협박은 아이들을 겁나게 하고 공포에 떨게 하지만 교육 효과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교사에게 혼이 나고 나서 진정으로 반성을 하는 아이들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에게 맞았을 때 아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걸린 것이 운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결코 선생님이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공평무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아가 어떤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을 뒤에서 욕하고 혐오했다.


아주 작은 예를 들자면, 수업 시간이 5일일 때 선생님은 5번으로 끝나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문제를 풀도록 하거나 5 분단 아이들만 숙제를 검사하거나 그들에게만 새로운 과제를 주기도 했는데, 그렇게 걸린 아이들은 말 그대로 운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 문제를 잘 풀고 선생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운이 될 수도 있었다.


수많은 아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교사가 학생들을 때리는 것은 그 시절 학교에서 일반적인 문화였다. 교사들은 말로 하다가 안 되면, 아이들에 대한 폭력이 복잡한 교실의 질서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 ‘습관’이자, 교사들에게 체득된 제도적인 ‘전통’이었다. 그러한 폭력의 습관과 전통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연구되고 전수되었다. 폭력은 전염병처럼 전염되니까.


그것은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물들인 상명하복식 군대문화이기도 하다. 분단시대라는 이유를 대면서 학교와 교사와 교육 담당자들은 학생들을 예비 군인들로  인식했고 학교를 예비 군대처럼 취급했다. 특히 한국의 남성들에게 군대는 학교의 연장과도 같았다. 그렇게 폭력적인 문화 속에서 상명하복을 엄수하는 권위주의로 길들여진 사람들은 다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공포와 협박과 폭력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특히 학교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교사의 폭력이 선생님 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전수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교에서는 폭력도 학습되고 전수되며 하나의 전통이 되기도 한다. 폭력은 전염병처럼 번지고 새롭게 개발되며 종종 더욱 잔인하고 악랄한 형태로 발전된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은 그 불편한 상황에서도 쾌감과 권위를 느끼면서 더욱 큰 자극을 필요로 한다. 학생들은 그러한 문화와 전통 속에서 자기들끼리도 치고받고 싸우면서 서열을 정하고 학교를 다녔다.


이런 상황에서 모범적인 교사는 어떤 사람일까.


아주 특별한 경우지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사회’ 과목을 가르쳤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어떻게 앉아 있든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아이들이 소란하게 떠들어서 수업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큰 소리로 윽박지르거나 매를 들거나 아이들을 때리지 않았으며 거꾸로 공부에 찌든 우리를 곧잘 격려했다. 너무 공부하느라고 애쓴다고. 그는 수업시간에 졸려서 자고 싶은 사람은 자도 된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일부 아이들은 잠시 엎드려서 눈을 붙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수업시간 내내 자는 아이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아이들에게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체로 학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했다. 그는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아이들에게 편하게 인사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먼저 칠판에 그날 가르칠 내용을 적어놓고 아이들이 공책에 적는 것을 잠시 기다린 후 그는 칠판에 적은 내용을 부드럽게 설명했다.


아이들이 질문하는 것은 자유로웠고 그는 적절하게 대답하거나 되묻기도 했다. 일부 아이들이 못 알아들을 수도 있고 깜빡 졸 수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그들을 혼내지 않았다. 아이들이 딴청을 피우거나 잠시 엎드렸다고 욕을 하면서 혼내지 않았고, 옆 사람과 떠든 아이를 굳이 앞으로 불러내어 막대기로 때리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비록 특별한 시청각 자료가 없다 해도 그는 수업을 가능한 한 일상과 연결 지어 설명하면서 재미있게 꾸미려고 했다. 그 시절에 나는 그 수업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수업이 최상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또 시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런 선생님을 만나는 학생들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아이들이 이미 고등학생이 되어서 앞뒤를 가릴 수 있는 사리분간이 더욱 명확해졌을 때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교육 방식이 초등학생들에게는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사회가 발전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학교와 교사들의 폭력은 이미 상당히 사라졌는데 그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학교가 진실로 평화롭고 정의롭고 공정한가 하는 것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문제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학교가 사회의 불공정과 불공평을 실력과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자 기회균등의 적절한 제도라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한다.


그들은 학교가 사회의 부조리와 불공정을 합법적으로 포장하는 제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학교는 불공정한 사회를 뒷받침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그것을 통해 불공정을 공정하게 보일 수 있게 하는 합법적 장치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 모두 맞는 말일 듯하다. 많은 사람에게 학교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지식의 산실이자 아름다운 추억의 고향과도 같지만, 어쩌면 학생들이 불합리와 부당함을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기도록 하는 묘한 마술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전 05화 이방인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