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mory Oct 06. 2024

어둠의 세계 (1)

학교와 선생님 - 절망과 공포

1.


그렇게 불쌍하고 가련했던 2학년이 드디어 끝나고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 나는 겨우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까지도 나는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2학년  때는 운이 없어서 그랬다 쳐도 3학년 때는 뭔가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2학년 때 불행하게도 혼동스럽고 낯선 상황에서 버티어낸 덕분인지, 나는 3학년부터는 학교 생활을 더욱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강한 의지를 가지고 봄을 맞았다. 특히 나는 그해 겨울방학 기간 중 한 달간 시골에서 지내면서 서울과 학교와 친구들을 몹시 그리워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무엇이든 예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도 더 잘 듣고 친구들과도 더 잘 어울리고, 2학년 때보다 더 똑똑하고 부지런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난해서 그런지 유난히 춥고 길었던 겨울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3월이 되었다. 날은 여전히 추웠지만 파란 하늘 아래 학교가 개학하는 날 아침, 내 마음은 한껏 부풀었다. 많은 학생들이 복작거리는 운동장에 서서 개학식을 할 때 나는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새로운 담임 선생님은 무척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성이었고 얼굴에 주름도 많았다. 1학년과 2학년 때 계속 여자 선생님과 함께 지냈기 때문인지 나는 남자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낫겠다고 짐작했다. 운동장에 늘어선 수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보려니 약간 낯설고 긴장되기는 했다. 그러나 단정하고 멋진 회색 양복을 입은 선생님은 인자하고 점잖아 보였다. 개학식 날 운동장에서 그가 아이들을 보면서 환한 얼굴로 자주 미소를 짓기도 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긴장했지만 기대감에 가득 차서 교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교실에 들어가서 막상 그가 우리 앞에 서서 말을 시작했을 때 나는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교실에 들어와서 가까이서 보니 그는 더욱 나이 들어 보였는데 아마도 50대 중반이나 후반일 듯했다. 그는 말을 약간 더듬거리면서 어눌하게 했고 행동도 느렸다. 그러나 아이들을 마구 혼내거나 때리지는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도 덩치가 컸던 나는 교실 뒤에 앉아서 60여 명에 이르는 우리 반 아이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아이들은 대체로 어리고 만만해 보였다. 3학년까지는 남녀 합반이었기 때문에 학급의 절반은 여자애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실에서 남녀 좌석 구별이 뚜렷해졌다. 선생님은 교실을 좌우 절반으로 나누어서 한쪽은 여자애들끼리, 다른 한쪽은 남자애끼리 앉도록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처럼 한 책상에서 남녀가 짝꿍이 되거나 가까이 앉아서 이성을 볼 일은 없게 되었다. 학교는 3학년까지 남녀 합반을 유지하면서도 최대한 남녀가 어울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사실 3학년이 되어서 바라보는 여자애들에 대한 관심은 2학년 때와는 달라졌다. 2학년 때까지는 어려 보이기만 해서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던 여자애들에 대한 관심은 3학년이 되면서 크게 늘어났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모두 그랬다. 아이들은 한 해 동안에도 쑥쑥 자라서, 남자애들이나 여자애들 모두 2학년 때보다 훨씬 더 성장한 듯 보였다. 그 나이에는 특히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에 비해 먼저 조숙해지는 법이라 일부 여자아이들은 나보다 어른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쩌다 남자애와 여자애가 조금이라도 친하게 대화하는 것을 보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시기심에 가득 찬 아이들은 그들을 향해 금세 “얼라리 꼴라리”라고 떼 지어 외쳤고, 그 애들이 사귄다는 헛소리를 일삼았다. 그럴 때면 기껏 용기를 내어 여학생에게 가서 말을 걸었던 남학생의 용기는 곧 꺾이고, 그들이 겨우 나눈 대화는 중단된 채 서로 얼굴이 빨개지면서 돌아서곤 했다.



2.


개학 첫날, 우리 반 아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나는 여자애들 가운데 아주 예쁜 아이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2학년 때까지는 보지 못했던 그 아이는 너무나 예뻐서 나뿐 아니라 다른 남자애들의 눈길도 사로잡았다. 병아리색 스웨터를 입은 그 애는 얼굴이 매우 뽀얗고 어깨까지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고 다녔다. 개학 첫날,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면서 일어서게 하여 얼굴을 확인했는데, 그때 나는 그 애의 이름이 ‘신아’ 임을 알게 됐다.


신아는 얼굴이 예쁘고 하얘서 눈에 쉽게 띄었다. 우리처럼 맨날 바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얼굴은 잘 씻지 않아서 지저분하고 햇빛에 그을려 까무잡잡했지만 신아는 깨끗하고 얌전한 모습이었고 얼굴은 달걀 모양으로 전형적인 동양 미인 스타일이었다. 신아는 말이 많지 않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을 때가 많아서 어떤 아이들은 '모나리자'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나리자 그림을 못 본 아이들은 그 그림이 신아 같은 예쁜 소녀를 그린 것이라 상상했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신아는 조금 더 자라서 더욱 미모를 자랑하게 되었는데, 6학년이 되기 전부터 대방초등학교에서 가장 예쁜 아이로 유명해졌다. 수많은 남자애들이 신아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면서 짝사랑에 빠져들었다. 나 역시 우리 학년에 있는 5백 명 정도에 이르는 여자애들 가운데, 나아가 대방초등학교에서 신아가 가장 예쁜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 개인적으로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대방동에서 신아보다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고 신아보다 아름다운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예쁜 신아와 친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남녀 아이들을 완전히 따로 앉게 하였으므로 나는 신아 옆에 가지도 못했고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교실 뒤편에 앉았고, 신아는 중간 정도에 앉았으므로 우리는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내가 신아와 대화하고 마주 앉을 기회는 오로지 학급 임원회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반장이었고, 신아는 부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결코 신아와 친해질 수 없었다. 임원회에서도 우리가 개인적으로 대화할 기회는 생기지 않았으니까.


"신아야, 어디 사니?"

어느 날 운동장에서 나는 잠시 신아가 혼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뛰어가서 물었다. 신아를 가까이서 마주 보자 내 마음은 사뭇 콩닥거렸고 숨이 가빠지는 듯했다. 하필 이미 한참 뛰어노느라 내 얼굴에는 땀이 흘를 정도여서 나는 신아에게 말하면서 오른팔을 들어 땀을 닦았다.

"학교에서 조금 멀어. 대방교회 윗동네."

신아는 약간 쑥스러워하면서 겨우 대답했다. 나는 신아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녀의 까만 눈망울과 말간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 그래? 나도 대방교회가 있는 동네에 사는데... 우리 집에서 멀지 않구나. 그런데 동네에서 너를 본 적이 없는데..."


내가 그렇게 신아에게 말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본 다른 남자애들이 곧바로 우르르 다가왔다. 그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어느 틈에 끼어들어 자신이 어느 동네에 사는 둥 그런 것을 왜 묻냐는 둥 신아의 집이 정확히 어디냐는 둥 시끄럽게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신아는 곧 얼굴이 빨개지면서 입을 다물었고 이어서 다른 여자애들이 몰려왔다.

 

나는 신아와 더 이상 대화를 이을 수 없었지만 마음이 뿌듯해졌다. 신아가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면서 신아와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고 신아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후로 신아와 더 이상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학교와 교실에서 신아는 언제나 여자친구들 속에 파묻혀 있었으며 오로지 그들과만 어울려 다녔으므로 이렇게 개인적으로 대화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똑똑하고 예쁜 신아는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언제나 다른 여자애들이 신아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우리 교실에서 신아는 공주와 같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우리 반에서 신아를 좋아하는 남자애들은 나 말고도 여럿이었다. 남자애들은 신아를 혼자서 좋아한 나머지, 신아가 “내 거”라고 과장해서 떠들어댔다. 그것은 물론 남자애들 특유의 허풍스러운 헛소리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신아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신아는 내 거니까 너네는 꿈도 꾸지 마."

"웃기지 마라. 신아가 왜 니 거냐? 내 거였던 거 몰랐냐?

"웃기시네. 신아가 언제부터 너희 거였냐. 걔는 처음부터 내 건데. 신아가 좋아하는 아이는 너희가 아니라 나란 말이다. 신아와 한 번이라도 대화한 적 있어?"


아이들은 신아가 물건인 양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겼다. 그 공연하고 실속 없는 말다툼은 오로지 우리들끼리만 벌어지는 허풍이었지만, 서로 경쟁이 되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우리 가운데 신아와 가까워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길게 대화를 나누거나 그럴 수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신아는 마치 그림의 떡과 같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가 그렇게 허풍스러운 말만 떠들었지 신아와 가까운 친구가 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아홉 살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남녀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수줍은 어린아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남녀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서로 가깝게 어울리지 못하도록 했던 유교문화에서 교육받은 탓에 감히 남녀를 엄격히 가르는 선을 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그 무렵 우리는 어렴풋하게 남녀의 생물적 차이와 성의식에 눈을 뜨게 되어서 그런지 스스로도 남녀 간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남녀 학생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애들에 비해 먼저 조숙해지기 시작하는 여자애들은 그런 점에서 남자애들보다 더 심한 편이었다. 여자애들은 자기들끼리는 시끄러운 참새들처럼 떠들어대지만, 남자아이들 앞에서는 새침데기처럼 입을 꼭 다물고 굳은 얼굴로 변해서 함부로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남녀가 구별된 채 서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면서 저 중에 누가 예쁘고 누가 못 생겼다는 말만 과장된 허풍과 함께 공연히 떠들었다.


따라서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거의 언제나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만 어울렸다. 학교에서 어쩌다 여자애와 대화하는 것은 매우 가슴 떨리고 부끄러운 일이었고 다른 친구들의 눈에 띄면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학교와 사회에서 우리는 매우 유교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체면을 중시하고 타인의 놀림과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문화의 한가운데서 자라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불행하게도, 그해에, 나아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나는 신아와 더 이상 가까운 친구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같은 반 출신이며 서로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서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정도만 아는 데 그쳤다. 어쩌다 교실에서 신아와 대화를 나눴다 해도, 그것은 대체로 학급에 관한 공적인 문제이거나 다른 아이들 앞에서 간단하게 이성을 놀리는 정도의 대화였지, 진정으로 하기 원했던 사적인 친밀한 대화는 아니었다. 신아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할 기회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그렇게까지 신아에게 접근할 용기는 없었다. 그 당시에 나는 남자애들 앞에서는 매우 활기찼지만 여자애들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에, 또 내 눈앞에 신아가 존재하며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겐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으며 학교를 다니게 하는 하나의 희망이었다. 나에게 어둠과 절망이 휘몰아쳤던 초등학생 때 신아는 내가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마음의 등대였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그런 신아를 훗날 고등학생이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긴 시간 동안 신아는 내 마음에 잊히지 않는 존재였고, 내가 동경했던 첫 이성이었다. 남들은 그런 사람을 '첫사랑'이라고 말하는데, 만약 첫사랑이 그런 의미라면 나에게 첫사랑은 신아였다.



3.


하여간 3학년 때 신아를 보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즐거움에 앞서 나는 내가 끔찍하고 비극적인 현실로 빠져들고 있음을 먼저 알게 됐다. 나는 그 비참했던 시기를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치솟기도 하고 깊은 슬픔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나의 고통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의 힘이 너무나 거대하고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어린 나는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고, 내가 처한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며, 오로지 혼자서만 그 아픔을 받아들이면서 견디어내야 했다. 그 아픔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서 나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이름과 얼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나는 이윽고 그를 지독하게 싫어하게 되었고 두려워하면서 증오하기까지 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내가 ‘증오’라고 극한 단어를 사용해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이 점에 대해 혹시라도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를 당신에게 먼저 매우 미안함을 전하고 양해를 구한다. 나는 그에 대한 나의 부정적 감정을 어떤 집약된 단어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이 글을 씀으로써 그에 대한 나의 부정적 감정이 부디 종말을 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어린 나이에 내가 ‘증오’라는 단어를 떠올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때는 그런 단어를 배우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꿔 말한다면,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극히 싫어하고 미워한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그 선생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학대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 마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슬픔의 눈물과 증오의 피를 흘리게 했다. 그는 갈취와 멸시와 비웃음으로 내 영혼을 갉아먹었으며 내 마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생기도록 괴롭혔다. 나는 그로 인해 본격적으로 또 아주 오랫동안 학교와 선생님을 싫어하게 됐다. 나아가 그로 인해 나는 학교와 공부에 대한 관심을 잃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성적이 점차 떨어졌고,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도 사라지게 됐다. 또한, 나는 학교 제도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고, 그 울타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제 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 비극적 사연을, 너무 오래전이라 마음속에 박제처럼 굳어진 이미지들을 하나씩 풀어 나가면서 가능하면 연관성이 있는 스토리로 엮어서 전하고자 한다.

이전 06화 이방인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