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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Sep 28. 2024

이방인 (1)

학교와 선생님 - 궁핍의 시대

1.


2학년이 되었을 때 담임 선생님은 또 여성이었는데 이번에는 젊은 분이었다. 약간 통통한 몸매에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그녀는 아마 20대 후반 나이였으니 학교 선생님들 가운데 가장 젊은 축에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쁜 이모 같은 그녀는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 비해 냉랭한 느낌이 들었고 우리들에게 큰 관심이 없는 듯도 했다. 1학년 때 담임은 인자하고 자상한 편이었지만 2학년 때 담임은 약간 차갑고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잘 내는 편이었고, 우리를 가르치는 일에도 어딘가 소홀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학기 초에는 잘 몰랐는데, 따뜻한 봄이 되면서 선생님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임신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점차 우리를 가르치는 것을 힘들어했고, 학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때때로 결근까지 했다. 그녀가 결근하는 날 아침에는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런 분은 우리에게 간단한 숙제나 공부할 거리만 내주고 교실에서 나갔다가 그날 수업이 끝날 때쯤 다시 들어와서 별일이 없는가만 확인했다.


그렇게 의도되지 않은 자율학습의 날이 되면 아이들은 자주 시끄럽게 장난치면서 놀았고, 그럴 때면 갑자기 옆반 선생님이 들어와서 우리를 혼내기도 했다.

“야, 조용히 해. 너네가 떠드는 소리가 옆 교실까지 들려. 선생님 없다고 자꾸 떠들기만 할래? 혼나봐야 알겠어?”


복도를 순시하는 교감 선생님이 불쑥 교실로 들어올 때도 있었다. 교감 선생님이나 옆 반 선생님으로부터 그렇게 한바탕 혼이 나면 아이들은 한동안 조용해졌지만 그렇다고 자숙하고 공부하는 것은 아니었고 얼마 후에는 교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좀 조용히 있을 법도 한데, 통제되지 않은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금세 풀어져서 소란스럽게 떠들고 교실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1학기가 끝날 무렵에 이르러 우리의 예쁜 담임 선생님은 배가 잔뜩 불러서 뒤뚱거리면서 걸어 다녔다. 아이들은 그녀가 배부른 펭퀸처럼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점차 느리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서 나는 다소 갑갑한 느낌을 가지고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당시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은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강제로 저금을 하게 했던 것을.


1학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2학년  때 선생님은 전교생이 학교에서 저금을 하게 되었으므로 우리에게 매달 저금할 돈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소액이라도 꾸준히 저축하면 미래에 목돈이 될 수 있고 절약과 저금은 좋은 습관이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그로써 우리는 은행에 정기예금을 하는 것처럼 학교에서 단체로 저금했다.


그러나 어떤 기한도 없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저금하면 나중에 우리가 졸업할 때 돌려주는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우리 중 아무도 저금 기간이나 이유나 용도를 알지도 못했고 묻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학교에서 요구하면 우리는 그냥 따라야 할 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저금했던 돈은 아마도 정부가 경제발전을 위해 여러 공기업으로 투자했던 듯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필경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기업의 주주가 되었던 셈인 듯한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기업의 정보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선생님도 그런 것에 관해 알지 못했던 듯 우리에게 아무 설명도 해주지 못했다. 우리는 어느 회사의 주주였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도 못했고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한 적도 없다.


거의 당연한 귀결이지만, 훗날 우리가 저금한 돈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거기에 혹시라도 어떤 비리가 있었는지 어린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새 정권 세력은 과거 고위 관료들이 어떤 부정부패를 일삼고 정치 비자금을 모았는지 뉴스를 통해 발표함으로써 국민을 놀라게 했는데, 거기에 우리의 작은 저금이 일부라도 포함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여간 학교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우리는 돈을 내기만 했다. 되는 대로 자발적으로 는 저금이라 어떤 아이들은 모범적으로 매달 많은 돈을 냈지만 나를 포함한 다수의 아이들은 돈을 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학생들은 꽤 오랫동안 그렇게 학교에서 저금을 했지만 우리는 저금통장이나 저금 기록을 받은 적이 없을뿐더러 이자는커녕 원금도 되받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 상급생으로 올라가면서 언젠가부터 그 강제 예금은 조용히 사라졌다. 학교나 선생님은 거기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그 돈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사용됐는지 알지 못한 채 졸업했다. 그러니, 나처럼 그 내막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돈이 필요한 박정희 정부가 결과적으로 아이들 돈을 갈취했던 것과 같다. 또는 기업이든 교육청이든 학교든 누군가 중간에서 그 돈을 모두 떼어먹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찌 됐든 극도로 가난해져서 먹고살기도 어려워진 우리 집에서 나는 학교에 저금할 돈을 가지고 가기 어려웠다.

“엄마, 오늘 저금할 돈 내야 하는데”

저금할 돈을 내야 하는 날 아침에 나는 엄마에게 겨우 용기를 내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만 엄마가 나에게 돈을 주는 날은 거의 없었다. 하긴 먹고살 돈도 모자란데, 기약도 없는 학교 예금에 돈을 낼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그러나 학교에서 강제로 걷는다고 하고 선생님이 재촉하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돈을 갖다 내야 했다.


그해 봄학기에 결국 나는 엄마로부터 한 번은 20원, 또 한 번은 10원을 겨우 받아서 선생님에게 주었다. 그렇게 저금한 결과는 1학기가 끝날 무렵 선생님에 의해 밝혀졌다. 어느 날 선생님은 갑자기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반 1학기 저금 실적이 좋지 않아. 특히 네 저금액이 꼴찌야. 합해서 30원. 부반장이 겨우 30원이 뭐니. 창피하게.”


겨우 30원. 창피하게.

선생님은 저금 총액이 꼴찌인 나를 콕 집어서 말했다. 그때 나는 저금한 액수가 적어서 창피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내 이름과 저금 액수를 밝히고 굳이 내가 ‘꼴찌’라고 크게 말해서 창피했다.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이 매서운 눈길을 준 것은 아니지만 차갑고 무심한 눈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변했다. 그러면서도 창피함고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살짝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나는 꼴찌였다. 선생님이 말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저금한 액수가 꼴찌였는지 몰랐다. 단지 내가 1학기에 30원을 저금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풀 수 없는 의문과 불안에 사로잡혔다.


‘아니 다른 애들은 얼마나 저금을 많이 했길래 내가 꼴찌란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금할 수 있는가.’



2.


그렇게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도 끝난 후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임신한 선생님을 보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 우리에게 닥쳤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생님은 여름방학 기간에 아이를 낳았는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바람에 내가 속했던 2학년 6반은 ‘해체’된다고 했다.

“너희들 담임 선생님이 여름에 출산했기 때문에 가을학기에는 학교에 안 나오시게 되었다. 그래서 가을학기에 너희들은 모두 다른 반으로 흩어져서 공부하게 될 거야. 이제부터 각 반별로 번호를 불러줄 테니 잘 듣고 거기로 가야 한다. 알겠지?.”


학교에서 나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듯하다. 선생님은 아이를 낳고 집에서 쉬면 되었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갑자기 공중분해된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담임 선생님이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진 결과, 그녀를 대신해서 다른 선생님이 우리 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분산되어 다른 반으로 가게 됐다. 학교는 우리 반 아이들을 여덟 내지 아홉 명씩 모아서 다른 반으로 편입시켰다. 개학 첫날, 이미 한 학기 동안 친해졌던 우리 반 아이들은 졸지에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2학기부터 다른 반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학년이 바뀔 때처럼 아이들이나 선생님과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겨우 2학년 학생들인데, 2학기가 시작되면서 다른 반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것과 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매우 열악한 시작이라는 말이다. 한 학기 동안 이미 친해진 아이들 속으로 소수의 낯선 우리가 갑자기 들어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것은 마치 전학 간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때때로 전학생이 우리 반에 들어오는 것을 보곤 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이방인’과 같이 느껴졌다. 그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전학 온 시기나 ‘실력’에 따라 차이가 많겠지만 이미 하나의 공동체로 굳어진 교실에서 적어도 한동안 이방인처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완전히 새롭고 낯선 상황과 환경으로 갑자기 떨어진 전학생은 주눅이 들기 쉽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기 마련이다. 어떤 전학생은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매력도 넘쳐흘러서 새로운 학교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다른 아이들과도 금세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드문 일이었다.


“0번, 0번… 일어나. 너희들은 0반으로 가.”

개학 첫날, 우리 교실로 들어온 낯선 선생님은 매우 사무적인 표정으로 교탁에 서서 한 손으로는 교탁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들고 있는 서류에 눈을 고정시킨 채 이런 식으로 말했다.

“몇 번이요?”

“몇 반으로 가라고요?”

아이들은 선생님이 자기 번호를 불렀는지 그것이 정말 자기 번호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개학 첫날, 그 선생님은 매우 귀찮은 일을 빨리 처리하고 가야 한다는 듯이 갑자기 우리 학급 아이들의 번호를 부르고 당장 일어나서  다른 반으로 가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매우 긴장하고 당황스러웠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자기 번호가 몇 번인지 헷갈리는 아이들까지 있었으며, 먼저 번호를 듣고 일어난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 선생님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도 했다.

“야야, 조용히 해. 번호를 잘 듣고 가야 하는데 너희가 떠들면 어떡하니. 입 다물고 조용히 하란 말이야. 다른 애들도 모두 들어야 할 거 아니야.”

당황한 아이들이 불안감 속에 웅얼거릴 때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개학 첫날부터 돌연히 헤어지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이들의 얼굴은 불안한 표정으로 변했고 모두 긴장해서 분위기는 저절로 매우 어수선해졌다.


가을학기 첫날, 우리 반 아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삼삼오오 모여서  교실 문을 나섰다. 맑은 날 날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당장 짐 싸서 집을 나가야 하는 것 같은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친구들과 나는 서로 작별 인사도 못하고 교실에서 나가야 했다. 우리는 한 학기 동안 쌓았던 정을 뒤로한 채, 또 여름방학 때 겪은 재미있는 경험을 서로 나누지도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다. 정든 친구들과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새가 없었다. 우리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곧바로 일어나서 가방을 들고 긴장감 속에 다른 반으로 찾아갔다.


“2학년 6반에서 왔습니다.”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은 2학년 9반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복도를 지나서 9반 교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문을 열고 얼굴을 살짝 들이밀면서 말했다. 우리가 긴장된 모습으로 쭈볏쭈볏 들어섰을 때 교단에 있던 선생님과 교실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동시에 우리를 바라보았다. 의아함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수많은 눈동자들 앞에서 우리는 상기된 얼굴로 부자연스럽게 서서 새로 우리의 담임이 될 선생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럴 때, 만약 새 선생님이 우리에게, “어서 와라. 갑자기 반이 바뀌게 되어서  많이 놀랐지? 어색해도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앞으로 사이좋게 잘 지내자.”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여덟 살에 불과한 우리의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 선생님은 그렇게 상냥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이건 또 뭐야’라는 식의 차갑고 사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냉랭한 한기가 감도는 거대한 냉장고 속으로 느닷없이 내던져진 듯했다.


“뭐야 이거, 지금까지 말한 거 다시 해야 하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할 수 없다. 다시 간단히 정리해서 말할 테니까 너희들은 모두 교실 뒤로 가서 일단 서서 들어. 조용히 하고.”

우리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우르르 교실 뒤쪽으로 갔다. 그 교실에는 물론 우리를 위한 책상과 걸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생님이 뭔가 말하는 동안 교실 뒤 좁은 공간에서 나란히 서 있어야 했다. 선생님도 우리도 아이들도 매우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인 듯했다.


그때 복도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 책상과 걸상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교실 문을 열고 얼굴만 내밀어 소란한 복도를 보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도 너네 교실에 가서 책상과 걸상을 가지고 와야 하나 보다. 빨리 가서 가지고 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잽싸게 교실 뒷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여러 아이들이 책상과 걸상을 복도에서 옮기고 있었다. 우리가 서둘러 6반 교실로 갔을 때 교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두서없이 책상과 걸상을 들고나갔기 때문에 교실은 매우 어질러진 상황이었다. 언제나 줄지어 놓여 있던 책상과 의자들이 뒤엉켜 있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교실이 이렇게 어질러질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지난 학기에 우리 반 아이들이 정답게 지냈던 교실은 순식간에 복잡하면서도 어지럽고도 쓸쓸한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얼떨결에 문에서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책상과 걸상을 찾았다. 내가 원래 사용했던 의자와 책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는 걸상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낑낑거리면서 들거나 밀면서 9반 교실로 돌아갔다. 수많은 책상과 걸상을 옮기느라 요란한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잠시 혼란한 소동이 지나간 후 아이들은 결국 모두 자신에게 배정된 교실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교실 앞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들어오도록 했는데, 그전에 우리가 교실 뒤편으로 책상과 의자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선생님은 교실에 있었던 아이들의 책상을 모두 앞으로 조금씩 당기도록 했고, 우리에게는 교실 뒤쪽에다 책상과 걸상을 들여놓도록 했다. 아이들이 모두 일어나서 책상과 걸상을 밀고 끄느라 어수선해지자 선생님은 화를 내면서 입 다물고 빨리 정리하고 앉으라고 소리쳤다. 결국 교실 뒤편에 겨우 자리를 내고 의자에 앉았지만 나는 긴장했고 한동안 심장박동이 가라앉지 않았다. 새 교실에서 겪었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될 때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다.


새 반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1학기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부반장이라는 지위는 아무 말도 없이 무시됐으며, 나는 낯선 반 낯선 선생님 낯선 아이들 속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문득 뭔지 모를 서러운 감정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그것이 나의 능력이나 권한을 뛰어넘는 것임을 이해했고 쉽사리 아니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직감했다. 그럼으로써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을 무의식적으로 발휘해야 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어린 나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것은 졸지에 헤어져야 했던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운명과 같아서 아이들은 각자 다른 운명을 받아들였을 터이고, 나는 나대로 나에게 닥친 운명을 감수해야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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