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선생님 - 궁핍의 시대
3.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바로 그 무렵, 가난이 쓰나미처럼 느닷없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때부터 우리 집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고 우리 가족은 벗기 힘든 가난의 굴레에 매인 듯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버지 사업은 그즈음에 급격히 기울었다. 부모님이 그런 사실을 우리 형제자매에게 공표하거나 자세히 설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또한 설사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도 막내인 내가 잘 알아듣지도 못했겠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우리 형제자매가 성인이 되어 옛일을 추억하면서 대화할 때 형이나 누나들도 자신들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회상했다. 그 무렵에 아버지 사업이 망했고 그때부터 갑자기 우리 집이 매우 빈곤해졌으며, 그 비루하고 처량한 궁핍은 그로부터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중반 무렵까지 지속됐다고.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자동차 정비 사업까지 하셨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년 후에 대방동에 정착하셨고, 대방시장에 세 개의 가게와 큰 기와집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기와집에서 태어났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집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우리 가족은 왕십리로 이사 갔다가 다시 대방동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대방시장 건너편에 있는 강남중학교 옆 동네로 갔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지어 살았던 기와집을 샀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앞마당과 과실수와 아주 작은 연못까지 있었고, 현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옆마당과 우물과 텃밭이 있는 근사한 집이었다.
우리 집이 있는 그 골목에 대방교회가 있었으며, 우리 집 맞은편에는 크라운맥주 회사의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마당이 무척 컸던 그 집은 수년 후에 대방교회 바로 아래에 더욱 거대한 3층 집이 새로 지어지기 전까지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부잣집이었다.
우리가 그 동네로 이사 들어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사업은 기울었고 예뻤던 우리 집은 금세 한 지붕 세 가족으로 뒤바뀌었다. 아버지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앞마당과 옆마당에 있었던 화단을 모두 짓뭉개고 거기에다 각각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작은 집을 집을 지었으며 그곳에 각각 세를 주었다. 그때가 바로 하필 내가 바로 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였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늘 많은 사람이 복작거렸고 마당에는 여러 짐들이 쌓여 있기도 했으며 어린 나는 전례 없는 가난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다섯 남매 가운데 막내였던 나의 기억으로만 한정해서 보면, 그때가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가장 곤궁했던 시기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인해, 부모님은 겨울방학 때마다 집안에서 가장 어렸던 나를 괴산에 있는 큰아버지와 셋째 고모에게 보냈던 듯하다. 그래야 겨울에 여럿이 복작거리는 집안에서 춥다고 불평이나 할 어린아이를 하나라도 줄일 수 있었을 테고, 한 입이라도 줄여서 양식을 아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쌀 한 톨이 아쉽고 연탄 한 장이 소중했던 때였다.
그때 나보다 열 살 위인 큰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취직했다. 형은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둘째 누나는 중학생이었으며 작은 누나와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형과 둘째 누나는 교복을 입고 학교까지 먼 길을 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른 아침부터 식구들이 식사를 하고 도시락을 싸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었지만 엄마는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서 그 일을 모두 해내셨다.
엄마는 이른 아침마다 큰 솥에 보리와 콩 등이 잔뜩 섞인 밥을 했다. 그 밥은 우리 가족 일곱 명이 아침을 먹고 형과 누나들의 도시락에도 담을 분량이었다. 그리고 남는 누룽지는 엄마와 내가 낮에 점심으로 먹을 밥이었다. 한 솥 가득 밥을 했지만, 형과 누나들이 나간 후에 그 많은 밥은 거의 다 사라졌다. 온 식구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나간 후에야 엄마는 상 위에 남은 그릇과 반찬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식사를 하셨다. 나도 학교에 가기 전에는 바로 그 시간에 엄마와 함께 밥을 먹었다.
이따금 밥이 거의 남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엄마는 솥에 물을 부어서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그것은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또 입학한 후에도 오후반으로 등교할 때 자주 보았던 아침의 일상이었다. 가족들이 아침밥을 먹고 난 식탁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 한바탕 어질러진 집안을 쓸고 닦고 정리하고 빨래하는 것. 빨래를 널고 나중에 마른빨래를 걷어서 개고 해진 옷을 꿰매고 시장에 다녀와서 또다시 반찬을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내가 아침부터 낮까지 보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내가 낮에 가장 흔하게 먹었던 밥은 ‘물 말아 밥’이었다. 아침 식사 후 남은 찬 밥을 물에 말아서 김치나 새우젓과 먹는 것이었다. 엄마가 물밥이 담긴 숟가락에 새우젓을 올려서 내 입에 넣어주면 나는 맛있다고 한 입 삼키고 나서 다리를 흔들면서 노래를 했다.
나중에 내가 4학년이 되면서부터 엄마는 형부터 나까지 네 명에게 도시락을 싸주었다. 큰누나는 이미 취직하여 인천 어딘가로 독립했다. 도시락은 밥도 문제지만 도시락 반찬이 더 큰 문제다. 우리가 좋아하는 어묵이나 소시지나 달걀 같은 것을 싸가면 좋겠지만 그런 날은 결코 없었다. 소시지와 달걀과 시금치와 노란 무 등을 넣은 김밥은 오로지 한 학기에 한 번, 소풍 가는 날에만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도시락 반찬으로 이따금 멸치 볶음을 가지고 가기도 했지만 주로 작은 병에 김치만 담아서 갈 때가 많았다.
김치를 담은 병은 때때로 뚜껑이 잘 맞지 않아서 냄새가 나고 국물이 새기도 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엄마는 언제나 작은 병의 뚜껑을 꼭 잠그고 그것을 라면봉지에 넣었지만 때때로 김치 냄새를 막기는 어려웠다. 등굣길 버스 안에서 김치 냄새가 풍기는 일은 빈번했다. 내가 아니라 해도 누군가의 가방에서 김치 냄새가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혹시라도 내 가방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웠고, 나는 김치가 든 병뚜껑을 잘 닫았는지 다시 떠올리곤 했다.
나도 나중에 버스에서 겪은 일이지만, 누군가 버스에서 앉아 있는 사람이 선의를 가지고 서 있는 학생의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준다고 했을 때, 혹시라도 가방을 무릎 위에 눕혀 놓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요즘에는 남의 가방을 받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는 선행을 볼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거의 모두 그렇게 했다. 흔들리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는 학생이 있으면, 좌석에 앉은 사람은 일부러 그 가방을 달라고 하여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오로지 선량한 마음의 발현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나도 어쩌다 좌석에 앉게 되었을 때는 내 가방까지 합해서 네 개나 되는 가방을 무릎 위에 쌓은 적이 많다. 사실 그럴 때는 앉아 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게 더 편하지만, 그런 일은 하필 이미 앉아 있던 상황에서 한 명씩 받아주다가 벌어졌다.
그렇게 가방을 받아주는 사람은 때때로 가방 밑바닥에 묻은 먼지나 흙이 자기 바지나 치마에 묻을까 겁이 나서 가방을 무릎에 눕혀서 놓기도 했다. 실제로 아이들은 가방을 땅바닥에 놓는 일이 많았으므로 가방 바닥이 깨끗한 것은 아니었고, 그런 가방을 무릎에 그대로 올려놓았다가는 흙이 옷에 묻어서 앉은 사람의 선의는 불쾌한 결과로 끝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인해 가방을 받아서 눕혀 놓으면 가방에 든 김치 병에서 자칫 국물이 샐 수도 있었다. 이따금 버스에서 갑자기 김치 냄새가 퍼질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그런 불운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다. 그러면 가방을 받아준 사람도 가방을 맡긴 사람도 아주 난감한 상황이 되곤 했다.
그래서 버스를 탔을 때 앉아 있는 사람이 기껏 손을 내밀면서 “가방 이리 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어떤 학생은 굳은 얼굴 표정으로 가방 끈을 꼭 쥔 채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사양했는데, 그것은 단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선의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거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럴 때는 함부로 가방을 끌어다가 무릎에 올릴 일이 아니었지만, 앉은 사람으로서 무거운 가방을 받아주어야겠다는 미풍양속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4.
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를 곤란하게 했던 큰일은 학교에 내야 했던 돈이었다. 지금은 국가경제가 발전하고 의무교육 제도가 확대되어서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등록금 외에 육성회비까지 내야 했다. 기성회비라고 불리기도 했던 육성회비는 학교의 시설 확충이나 운영비 등을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강제로 징수되는 등록금과 다름없었다.
액수가 얼마인지 잊었지만, 가난한 집 학생들은 육성회비를 내기가 영 어려웠던 시절이다. 먹고 살 생활비가 없어서 전전긍긍했던 우리 집도 마찬가지 신세여서, 육성회비나 등록금을 학교에 제때 내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돈을 갖다 주지 않는 한 엄마는 우리에게 줄 돈이 없었으므로 우리 형제자매는 육성회비 내는 것을 자주 연체했다.
“엄마, 오늘 육성회비 내야 하는데……”
“내일 줄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안 가지고 가면 선생님한테 혼나.”
“아침에 형과 누나에게 주고 없어. 저녁에 아버지 오시면 말할게. 오늘은 그냥 가.”
육성회비를 내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으로 내야 하는 날 아침, 나는 풀 죽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돈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일을 하시면서 대답했다. 저녁에 아버지가 엄마에게 돈을 갖다 줘야 내일이든 모레든 등록금이나 육성회비를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아버지는 오늘 저녁에 엄마에게 돈을 갖다 주실 수 있을까. 내일 돈을 준다고 대답하는 엄마도 사실은 그것을 미리 알 수 없었다.
육성회비를 갖고 가지 않으면 선생님에게 혼날 것이 뻔했지만 나는 빈 봉투만 가방에 넣고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로 가는 날이 많았다.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 이름을 부르거나 칠판에 이름을 써놓기도 했으며, 때때로 앞으로 나오게 해서 혼내기도 했다. 선생님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을 때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 서무실로 호출되기도 했다. 거기에서 아이들은 육성회비를 내도록 더욱 강력하게 독촉당했고 돈을 언제까지 내겠다고 말해야 했다. 때로는 육성회비를 못 내면 학교에 올 수 없다는 협박과 함께. 부모님이 돈을 주지 않는 한 아무 대책도 없었으므로, 나는 얼굴만 빨개져서 고개를 숙인 채 선생님의 꾸중과 채근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지 않았다. 사실 학용품을 사는 것 외에는 바깥에서 특별히 돈을 쓸 일이 없었지만 조금 큰 다음에는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사 먹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말을 해보았지만 용돈은 나오지 않았고 도리어 혼이 나기도 했다. 쌀 사 먹을 돈도 없는데 사탕 사 먹을 돈이 어디 있냐고. 연탄 살 돈도 없는데 과자 사 먹을 돈이 어디 있냐고.
“아버지, 십 원만”
가게에서 파는 달콤한 사탕 맛을 알게 된 나는 십 원짜리 동전을 얻어내기 위해 엄마 대신 아버지에게 가기도 했다. 아침에 일하러 나가는 아버지 뒤를 대문 밖까지 쫄랑쫄랑 따라가서 “아버지 십 원만”이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가끔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아 꺼내어 내 손바닥에 쥐어 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주머니에 동전이 없을 때 아버지는 “오늘은 없다.”라고 말씀하셨고, 때로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면서 서둘러 걸어가셨다. 그런데도 내가 따라가면서 “십 원만” 하고 더 떼를 쓰면, 아버지는 “오늘은 없다니까.”라고 언짢은 표정이 되어 약간 언성을 높였고 나는 풀이 죽어서 돌아섰다. 그렇게 대답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아주 먼 훗날 내가 아버지가 되어서 딸에게 용돈을 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비가 오는 아침에는 아주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아버지와 형과 누나들이 모두 우산을 쓰고 나가야 하는데, 집에 우산은 늘 부족했다. 한 사람씩 들고나간 후 남은 우산은 살이 부러져 있거나 비닐이 찢어진 것들뿐이었다. 그나마 그런 것마저 없을 때도 있었다. 한 사람씩 나갈 때마다 우산을 하나씩 들고나간 후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는 나는 남은 우산이 없음을 알게 됐지만 아무 대책도 없었다. 나는 때때로 작은누나와 함께 살이 부러진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기도 했고, 찢어지거나 허름한 우비를 입기도 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지 않을 때는 우산 없이 가방만 몸으로 가린 채 그냥 뛰어갈 때도 있었다. 자주 신지도 않는 장화가 비싸다고 사지도 못했던 그 시절 나는 빗속을 뛰어갔고 내 운동화는 곧잘 젖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시절에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아마 칼국수였을 것이다. 밤마다 엄마와 누나들은 방에 둘러앉아 밀가루를 반죽했고, 그 반죽을 둥그렇게 펴고 접은 후에 잘라서 칼국수를 만들었다. 칼국수 못지않게 수제비도 많이 먹었다. 김치국물을 탄 칼국수나 수제비는 그런대로 칼칼한 맛이 있어서 나는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칼국수와 수제비를 이미 모두 건져서 주었으므로 솥에는 겨우 국물만 남아 있을 때가 많았다.
때때로 동태찌개를 끓였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숟가락을 찌개 냄비에 넣고 휘저으면서 냄비 바닥에 있는 동태 눈깔을 찾았다. 찌개에는 한 마리의 동태가 들어갔으므로 냄비 안에 하얀 동태 눈깔은 두 개가 있었다. 나 혼자서 두 개 모두 먹고 싶었지만 작은누나도 먹고 싶다 해서 나는 할 수 없이 한 개만 먹을 수 있었다. 부드러운 생선 살과 달리 약간 더 강하게 씹히는 맛이 있는 그 하얀 눈깔은 사실 맛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희소성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언제나 그 눈깔을 찾아 먹으려고 애를 썼다.
흔히 ‘한 지붕 세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집은 마당이 넓은 편이어서 실제로는 하나의 대문을 사용하는 세 집으로 변했다. 아버지는 먼저 집의 안쪽 옆마당 우물가에 있던 텃밭을 밀어냈다. 거기에다 단칸방과 부엌이 딸린 집을 만들었다. 방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지만 그냥 창호지로 막았기 때문에 빛이 잘 투과되지 않고 창문 바로 앞에 옆집 담이 가로막아서 어두운 편이었다. 방의 다른 한 면에는 부엌으로 나오는 창호 미닫이문이 있었다.
이듬해에 아버지는 대문 옆 화단도 뭉개버리고 거기에다 새로 단칸방과 부엌을 만들었다. 이번에도 구조는 비슷했지만 방은 두 개 정도의 크기처럼 넓었고 대문가로 난 남향 창문 또한 커서 그런지 방안은 훨씬 환했다. 부엌도 우물가 집에 비해 훨씬 컸다. 거기에도 처음에는 부부와 나보다 어린 나이의 아들 딸 네 가족이 들어왔다. 부엌 딸린 방 한 칸에 네 명이 살았던 것이다.
이후 그 집들의 거주자들은 자주 바뀌어서 나는 일일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 집에 적어도 세 가족이 살고 있었고, 그 모두의 숫자를 합하면 열서너 명은 됐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문을 오갔으므로 그때부터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아버지는 밤에 도둑이 들어올 수 있으므로 대문을 잠가야 한다고 했지만, 그 문은 늦은 밤에도 어느새 열려 있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세를 들인 아버지는 나중에는 마당에 세를 준 것만으로는 모자란 지 우리 가족이 사는 본채에 있는 방에도 세를 주기 시작했다. 한창 세를 많이 줄 때는 본채에서 앞마당으로 튀어나와 있는 현관방, 그리고 거실 마루로 들어오면서 왼편에 있는 작은 방까지 세를 주었다.
거기에는 각각 젊은 여자 한 사람씩만 들어왔다. 현관방에는 부엌을 만들 수 없었으므로 세를 들었던 사람은 오랫동안 살지 않았으며, 결국 누나들이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다른 작은 방은 앞마당에서 본채 왼쪽으로 돌아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어서 나름대로 독립성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 방앞에다 작은 부엌까지 만들었으므로 세를 계속 줄 수 있었다.
그렇게 4,5년 정도 지난 후 아버지의 사업은 다시 조금씩 형편이 나아졌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거실 마루 옆 작은 방에도 더 이상 세를 주지 않았고, 옆마당 우물가에 있는 방도 깨끗이 비우고 창고로 사용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본채에는 오롯이 우리 가족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놓은 대문가에 있는 방은 내가 중학교에 간 후에도 한동안 세를 주었다. 어차피 이미 앞마당이 모두 망가진 상태에서 부모님은 굳이 그 방을 부수고 새로 마당을 꾸밀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그때 부천에 삼천 평이나 되는 땅을 샀으며, 새로 도시가 조성되는 광명시에도 집터를 마련하고 새집을 지으면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런 것을 보면 사업을 한다는 것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과는 영 달라 보인다. 각자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 시절에 공무원이 되거나 안정된 기업에 취직했다면 수십 년간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될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업을 하면 대체로 여러 번 흥했다 망했다를 반복하는 듯 보인다. 물론 기업에 취직한 사람도 회사를 옮겨다니는 일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사업은 수십 년간 변하지 않고 살아남기도 했다. 하여간 모두에게 격동의 세월이었다. 그러는 동안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지속적으로 심화되었고 경제는 나날이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