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선생님 - 궁핍의 시대
1.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좋든 싫든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지만, 멍청하거나 운이 없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행복과 가난도 마찬가지다.
반공 포스터로 엉망이 되었던 미술 사건이 있기 수년 전으로 거슬러서…
나는 일곱 살이 되어 드디어 대방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맨날 집과 동네에서 놀던 나는 형과 누나들처럼 나도 학생이 된다는 사실에 매우 신이 났다. 아직 학교가 얼마나 복잡하고 골치 아픈 곳인지 모르던 나는 학교에 다니게 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그러나 그날, 나는 예상치 않게 입학식에 많이 지각했다. 학교에 들어가는 첫날부터 늦어서 매우 당황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 일곱이나 되는 식구들의 아침밥을 하고, 형과 누나들의 도시락까지 준비했다. 입학식이라 나를 학교에 데리고 가야 했던 엄마는 다른 식구들이 모두 아침을 먹고 나간 후에야 외출 준비를 시작하실 수 있었다. 아침을 먹은 후 먼저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친 나는 엄마가 식사 뒷정리를 하는 그 새를 못 참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어린아이들이 대방교회 옆에 있는 빈집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마당이 대단히 넓은 그곳에는 원래 오래된 기와집이 있었다.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떠난 후 오랫동안 그 집에는 아무도 이사 오지 않았고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낡은 기와집은 폭격 맞은 것처럼 반쯤은 허물어졌고, 마당 한쪽에는 기와와 벽돌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수개월 전에 그곳에서 놀다가 다쳤었다. 아이들은 그 집 마당에 널린 기와와 벽돌을 쌓아서 집을 만드는 놀이를 하기도 하고 총싸움이나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어느 가을 낮에 그곳에서 아이들은 두 패로 갈려 닭싸움을 했다. 한 발을 들고 두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발로만 뛰면서 상대방과 부딪혀 쓰러뜨리는 게임 말이다. 나는 오른발을 들고 두 손으로 그 발을 잡고 콩콩 뛰면서 공격 대상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가 다른 아이가 나를 공격했으므로 그를 피해서 뒤로 돌아 도망가려고 했다.
그렇게 서둘러 한 발로 뛰려고 했을 때 하필 바닥에 있는 돌에 걸리면서 넘어졌다. 그렇게 넘어질 때는 보통 손으로 바닥을 짚기 마련이지만, 그때는 하필 닭싸움을 잘해야겠다고 오른손의 손가락들을 운동화 속으로 넣어서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린 오른발을 꽉 잡고 있었다. 갑자기 돌다가 넘어지면서 나는 미처 두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바람에 그냥 바닥으로 쓰러졌는데, 내 머리가 하필 기와집 벽에서 옆으로 살짝 튀어나온 굴뚝 아랫부분에 부딪히게 되었다. 마네킹이 쓰러지듯 나는 일자로 넘어져서 굴뚝에서 시멘트로 바른 부분에 부딪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딪힌 부분은 왼쪽 이마와 머리카락이 자라는 경계선 부근이었다. 만약 왼쪽 눈이나 코를 그렇게 부딪혔으면 어찌 됐을까 아찔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내 모습은눈이 하나인 괴물처럼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아무튼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서 뒹굴었다. 아프기도 했고 피가 나기도 했다. 아이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둘러쌌고 그들 중 누군가는 우리 집으로 달려갔으며 곧이어 엄마가 급히 뛰어왔다.
“아이고, 이 녀석아, 피나잖아. 이렇게 다치면 어떡하니? 누가 그랬어?”
엄마는 피가 흐르는 내 이마를 보고 놀라서 빠르게 말했다.
“누가 그러지 않았어요. 혼자서 넘어진 거예요.”
“정말이에요. 혼자서 그랬어요. 우리가 밀지 않았어요.”
놀란 아이들은 혹시라도 엄마에게 혼이 날까 봐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마에 얇은 피부가 있는 뼈 부분이 부딪힌 것이고, 내가 아직 너무 어려서 그런지, 다행히 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병원에 가지도 않았다. 그저 피를 닦아내고, ‘아까징끼’라는 약만 발랐다. 그 약을 우리는 나중에 머큐로크롬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당시에 아이들이 넘어지든 긁히든 다쳐기만 하면 거의 언제나 바르던 ‘빨간 약’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 난 상처는 나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흉터가 남았다. 하얀색 작은 흉터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때 가장 유명했던 레슬링 선수인 김일처럼 아이들과 ‘박치기’를 하면 나는 거의 언제나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박치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는 내 머리보다 딱딱한 게 많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날 이후에도 아이들과 편 먹고 닭싸움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몸의 균형을 잡기 어려운 닭싸움을 나는 두려워하게 되었다.
학교 입학식에 가는 것도 잊은 채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이 팔렸을 때 멀리서 엄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에서 나를 찾지 못하자 엄마는 밖으로 나와서 나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아차 싶어서 서둘러 엄마에게 뛰어갔고, 입학식 날 딴짓하고 있다고 혼이 났다. 입학식에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나의 손을 잡아끌고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갔다.
"너 학교 안 가고 일 년간 집에서 또 놀기만 할래? 이제 네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가는 데 너는 계속 이렇게 할 거야? 학생이 되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엄마는 학교로 뛰어가면서 나를 나무랐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대방국민학교라고 불렀던 대방초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서둘러 학교에 들어갔을 때 넓은 운동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내 또래 아이들과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모인 가운데 열리고 있는 입학식은 이미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였다. 아이들의 학급 배정도 모두 마친 듯 어린아이들은 반 별로 줄지어 서 있었고 학부모들은 그 뒤에 서 있었다.
나는 그날 신입생 가운데 가장 늦게 나타난 아이였다. 엄마는 약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학교 선생님인 듯한 사람들에게 가서 나에 관해 말했다. 그 결과 다행히 나는 1학년에서 맨 끝 반인 10반으로 가서 맨 뒤에 서게 됐다. 약간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드디어 초등학생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니 거의 모두 나보다 키가 작은 어린아이들 같았고 만만해 보였다. 내 키는 어릴 때는 제법 빠르게 컸지만 중3쯤에 이르러 더 이상 성장을 멈추었다. 그때 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나는 내 나이에서는 딱 중간 정도지만, 그 후로 한국인들의 평균 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므로 이제 나는 매우 작은 키로 보인다. 하여간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그때는 우리 반에서 덩치로나 키로나 내가 거의 제일 큰 편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1학년 10반의 마지막 번호로 들어가게 됐지만 실제로 교실에서도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2.
드디어 우리는 교실로 들어갔고 첫 학기 첫날이 시작되었다.
나의 첫 담임 선생님은 성이 홍 씨로 40대 중반에 단발머리를 했으며 비교적 인자한 아주머니처럼 보였다. 내가 ‘인자한’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2학년부터 만난 선생님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말도 천천히 부드럽게 하는 편이었고 공부를 못하거나 떠들거나 장난치는 아이들을 심하게 혼내지도 않았다. 그 선생님은 우리를 때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때는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언제나 매를 들고 다니면서 툭하면 아이들을 때리던 시절이라 내가 굳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첫 주에 학생들에게 읽고 쓰기를 시키고 난 후에 선생님은 곧바로 나를 부반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입학 전에 엄마로부터 기본적인 한글과 숫자라도 배워서 학교에 갔는데, 그 정도도 배우지 않고 학교에 온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형과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반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그렇게 되지 못했으므로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장은 부잣집 아이처럼 보이는 강 00이라는 아이가 됐는데, 키도 약간 작고 아주 어린애 같았다. 얼굴이 하얗고 곱상한 계집애처럼 생긴 그 애는 말하는 속도가 느리고 약간 더듬거렸다. 그 애는 자기 운동화 끈도 맬 줄 몰랐다. 그 애의 운동화 끈이 풀어지면 내가 바닥에 앉아서 그 애 운동화 끈을 매 주면서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그 애의 운동화 끈은 또 풀려 있었고 그 애는 여전히 끈 매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맨날 집과 동네에서만 놀다가 학교로 가니까 같이 놀 아이들이 많아서 나는 학교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다. 학교 아이들과 뛰어노는 것이 재미있어서 나는 거의 언제나 제일 먼저 학교로 갔다. 교실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으므로 우리는 교실 바깥에서 선생님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나는 추운 날 아침에도 먼저 학교로 가서 문이 잠긴 교실 앞에서 다른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렸으며,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학교로 먼저 오는 아이들과 뛰어놀았다. 학교 운동장은 우리 동네와 달리 마음껏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녀도 될 만큼 넓었고 철봉이나 미끄럼틀과 같이 철제로 만든 각종 놀이기구들도 있었다.
1학년 9반과 10반 두 개의 교실만 나란히 붙어 있는 단출한 건물은 학생들이 늘어난 후에 나중에 지어서 그런지, 학교 안에 있는 다른 큰 건물들과 달리 학교 입구로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에 외따로 서 있었다. 그 작은 건물은 아마도 대방동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입학생도 더불어 늘어나면서 학교에서 새로 증축한 건물이었던 듯하다. 본관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조회를 하고 나오면 우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선생님을 멀리서부터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 나무 의자에 따로 앉았지만 책상은 두 사람이 하나를 나눠서 사용했다. 남녀 학생이 짝이 되어 나란히 앉았으며, 서로 짝꿍이라고 불렀다. 학교에는 여학생보다 남학생이 조금 더 많았으므로 운이 없으면 남학생끼리 짝꿍이 될 때도 있었다. 기다란 책상은 가운데에 세로로 금이 그어져 있어서 각자 책상의 절반만 이용하도록 했다. 이따금 짝꿍끼리 사이가 좋지 않으면 책이나 연필이 금을 넘어갈 때 서로 자기 책상으로 넘어오지 말라고 밀어내면서 짝꿍끼리 다투곤 했지만, 다행히 나와 내 짝꿍은 그런 일로 다투지 않았다.
시험 시간에는 책가방을 책상 위 가운데에 세워놓음으로써 서로 커닝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상급생으로 올라가면서 생겼던 일이지만, 시험 점수가 중요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시험 시간에 커닝하는 각종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의자에 몸을 똑바로 세워 앉으면 짝꿍이 일부러 가리지 않는 한 짝꿍의 시험지를 볼 수 있었으며,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앞사람의 시험지도 볼 수 있었다. 때때로 아이들은 옆 분단에 앉은 아이의 책상 위를 건너다보기도 했고 심지어 책상 서랍 속에 책이나 공책의 중요한 부분을 미리 펴놓았다가 몰래 꺼내어 보기도 했다. 옆사람에게 지우개나 연필을 빌려달라면서 답을 볼 때도 있었다. 싸움을 잘하고 나쁜 아이들은 자기 옆이나 앞에 앉은 아이의 등이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답을 보여달라고 하기도 했다.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이 오기 전까지 교실 안은 거의 칠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떠들고 노느라고 언제나 시끌벅적했는데, 누군가 격자 창틀로 만들어진 넓은 창문을 통해 선생님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걸어오는 것을 보면 으레 “선생님 오신다”라고 크게 외쳤다.
그러면 신나게 떠들고 장난치면서 놀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모두 제자리로 뛰어 돌아갔다. 그러나 아이들은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 걸상이나 책상 위로 올라가서 박자를 맞춰 박수를 치면서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선생님 ~ 오신다. 선생님~ 오신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지만 학생들의 그런 외침은 선생님을 환영한다는 일종의 전통이었다. 아이들의 요란한 박수와 외침은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여는 순간까지 지속됐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이들의 박수와 외침은 갑자기 중지되고 모두 의자에 단정하게 앉았다. 아이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에 선생님은 거의 언제나 밝은 얼굴로 들어왔다. 그렇게 떠들썩한 선생님 환영식은 1학년 때는 분명히 매일 했었는데, 조금 더 크면서 학생들은 언젠가부터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