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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Sep 21. 2024

미술을 싫어하게 된 까닭

학교와 선생님 - 반공과 멸공의 차이

1.


초등학교 때 나의 성적표에서 처음으로 ‘미’를 발견했던 적이 있다. 아마 4학년 가을학기가 끝났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성적표는 모두 ‘수우미양가’로 표시되었는데, 내가 ‘미’를 받은 과목은 미술이었다.


오죽하면, 그 충격을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그 충격은 단지 내가 ‘미’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이해하기 힘든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내가 생각했다는 데서 시작됐다.


그 당시 나에게, 여러 과목 가운데 미술이 가장 재미없고 불편한 과목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뭔가를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귀찮고 불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은 표현 방법이 구체적이거나 직접적이지 않고 말이나 글에 비해 의미의 전달성이나 정확성도 뒤떨어지는 듯했다. 말로 하거나 글로 쓰면 될 것을 왜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할까. 그래서 나는 미술이 답답하고 지루한 행위라고 여겼다.


내가 미술을 부담스럽게 여긴, 더 중요한 이유는, 미술 수업 시간에 가지고 가야 하는 준비물 때문이었다. 미술 시간에는 다른 과목에서 사용하는 공책이나 책 보다 훨씬 큰 스케치북, 물감, 붓, 크레용, 색연필, 자와 각도기, 심지어 스케치할 때 필요한 4B 연필 등을 준비해야 했다. 조형 비슷한 수업을 위해서는 찰흙과 수수깡, 색종이 등이 필요했다. 그런 것은 학교에서 무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문구점에서 각자 사 와야 했다.


적은 양의 찰흙과 수수깡 등으로 아이들이 책상 위에서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나는 그런 수업을 몇 차례 받은 후, 그런 수업이 우리의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얼마나 자극할 수 있는지 의심했다. 차라리 교실 바깥으로 나가서 땅에다 그림을 그리거나 나무나 풀이나 돌멩이를 만지고 다듬을 수 있었다면 우리의 창조력과 상상력이 더욱 자극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여간 미술 도구들을 학교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보관할 수 있었다면 가장 편하고 좋았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각자 준비해서 가지고 다녀야 했다. 부모님에게 돈을 받아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가지고 다녀야 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특히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매우 곤란하고 화도 나는 일이었다. 그때 나도 바로 그런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시절에 우리 집은 매우 궁핍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미술 수업을 위해서 물감이나 크레용이나 스케치북을 사는 것마저 쉽지 않다고 느꼈던 때였다. 경제적으로 잔뜩 쪼들리는 집안 분위기에서 부모님에게 미술 도구를 사야 하니 돈을 달라고 하기가 어려웠고, 그렇게 말해도 돈을 받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때 내 기분을 사실대로 말하면, 그렇게 따로 준비물을 가지고 가야 하는 미술 과목이 있을 때 나는 정말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미술 도구를 가지고 오지 못하는 사연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했고 이유를 묻지도 않았으며, 동정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아이들을 혼내고 나무랐다. 불행하게도, 준비물을 잘 준비하는 것은 곧바로 미술 점수와 직결되는 문제였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종종 어쩔 수 없이 미술도구를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니  조금 깊이 따지고 보면, 내가 결국 미술을 싫어하고 점차 멀어지게 된 까닭은 미술 자체 때문이 아니라 미술 외적인 상황 때문일지 모르며, 그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학교와 선생님과 시대상황에도 섞여 있을 것이다.



2.


가을 어느 날,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은 미술 시간에 포스터를 그린다고 포스터 용지를 준비해 오라고 했다. 포스터 용지는 스케치북과는 크기가 또 달라서 아침에 엄마에게 돈을 받아 일부러 문방구로 가서 그것을 따로 사야 했다.


나는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에 들러서 겨우 하얀색 포스터 용지 한 장을 샀다. 포스터 종이는 약간 커서 둘둘 말아 따로 들어야 했고, 주로 고무줄로 종이 바깥을 씌워서 종이가 풀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아이들, 특히 남자애들은 으레 거칠게 뛰어놀기 마련이라 그 포스터 종이를 땅에 흘려서 밟거나 자칫 잡아당기다가 찢기도 했는데, 그것은 곧 미술 수업을 망치는 지름길이었다. 나 또한 둘둘 말린 포스터를 작은 막대기처럼 가지고 놀다가 바닥에 떨어트리거나 포스터 한쪽을 찢는 경험도 했었다.


다행히 그날은 그런 낭패가 벌어지지 않았고 드디어 미술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반공’ 포스터를 그리라고 말하고 나서 즉시 교실에서 나갔다. 선생님에게 미술 시간은 다른 과목처럼 굳이 아이들에게 수업 시간 내내 떠들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휴식시간과 같았다.


미술 시간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고 나서 교실에서 나갔으며, 거의 수업이 끝날 때쯤 돌아오곤 했다. 그 시간에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교사들과 잡담을 나누고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로서는 선생님이 교실에 없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가면 아이들은 자연히 떠들면서 장난을 많이 쳤지만,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이미 한국전쟁에 관한 반공영화들을 보았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반공 이미지가 떠올랐다.


책상 위에 포스터 용지를 세로로 놓고 나는 종이의 위에는 북한군들과 탱크가 쳐들어오는 모습을, 그 밑에는 거의 맨손으로 그들과 맞서서 싸우는 용감한 국군 병사들을 그려 넣었다. 그때는 한국전쟁에서 국군들이 거의 맨손으로 북한 괴뢰군들과 싸웠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도 자주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디자인을 했던 것이다.


미술적 상상력과 감각이 매우 모자란 내가 그나마 노력했던 작품이었다.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북한군과 싸우는 국군의 의기로운 장면을 포착하여 그린다는 장한 애국심으로 물든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나름대로 마음이 뿌듯했다. 포스터 가장 아래에는 자를 대고 줄을 그어서 ‘반공’이라고 크고 반듯하게 적었다.


그렇게 열심히 그려서 포스터가 거의 완성되어 갈 때쯤 갑자기 누군가 내 머리를 딱 때렸다.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갑작스러운 충격이라서 놀랐다는 게 맞을 것이다. 고개를 들고 나를 때린 사람을 쳐다보았더니 하필 선생님이었다. 그림 막바지에 열중하다 보니 선생님이 교실로 돌아온 줄도 몰랐던 것이다.

“야, 누가 반공이래. 반공이 뭐야. ‘멸공’이라고 써야지. 이제 반공은 안 쓰는 거 몰라?”

“멸공이요?”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래. 이제 반공은 안 쓴다고 했잖아. 멸공으로 바꾸란 말이야. 반공으로 쓰면 빵점이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당장 바꿔.”


나는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지금까지 성의껏 열심히 그렸는데, 글자가 틀렸다는 선생님의 지적에 나는 매우 당혹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제야 다른 친구들이 그린 포스터를 둘러보았더니, 멸공이라고 쓴 아이도 있었고, “무찌르자 공산당”처럼 전혀 다른 문구를 쓴 아이도 있었다.


반공과 멸공.


당신은 반공과 멸공의 차이를 아는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정도로는 안 되고, 아예 멸살시켜야 한다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지 10년 조금 더 지났을 때였고, 무장공비들이 이따금 남파된다는 뉴스가 나돌 때였으며, 주변에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보이면 곧바로 신고해야 한다고 배우던 때였다. 또한, 베트남 전쟁이 벌어졌고 한국군까지 파병하면서 국제적으로도 냉전 분위기가 최고로 고조되었을 때였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이 국내외적으로 들끓던 때였다.


어린 나도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모두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탔다. 그러나 문득 마음속으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공과 멸공의 차이를 이해한다 해도 도대체 미술 수업에서 그 단어 선택이 왜 중요한 것일까. 아무리 공산주의가 싫다고 했지만 그런 방식의 수업은 이해되지 않았다. 하여간 그날 나는 반공과 멸공의 차이를 다시 한번 명확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그야말로 두고두고 한 많은 '반공'이었다.


정부 지침인지 교육청 지침인지, 학교에서 임의로 바꾼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 혼자서 그렇게 주장한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더 이상 반공을 쓰지 못하고 멸공이라 써야 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희한한 사건으로 혼났다는 비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 내로 그림을 끝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포스터에 적힌 ‘반’ 자를 서둘러 ‘멸’ 자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미술 시간이 끝날 때쯤이었다.


나는 잽싸게 하얀색 크레용으로 ‘반’ 자를 지우고 ‘멸’ 자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반’ 자 위에 하얀색을 칠해도 검은색 ‘반’ 자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드디어 미술 시간이 끝났고 선생님은 모두 포스터를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우다 만 ‘반’ 자 위에다 검은색 크레용으로 ‘멸’ 자라고 적어서 제출했다. 약간 지저분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3.


그 사건은 나의 마음에 깊이 남아서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아, 꿈에도 사무치는 반공과 멸공이었다.


미술 선생님이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그때 나는 공산주의에 치를 떨고 있었다. 분단된 나라에서 어릴 때부터 또 학교에 다니면서 줄곧 이념에 관해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 북한 공산군은, 말 그대로, 머리에 빨간색 뿔을 달고 다니는 도깨비와 같을지 모른다고 상상하던 시절이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양심적이고 불쌍한 인민을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거나 공개처형시키는 잔악무도한 놈들이라고 믿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가 죽은 이승복 어린이가 어디에 사는 누군지 모르지만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치다가 죽은 유관순 누나와 비슷한 위인이라고 생각했었다. 북한군의 총부리 앞에서 겁내지 않고 공산당이 싫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소녀 유관순은 삼일운동 때 일제에 대항하여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위인이었다. 일본군 앞에서도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그녀의 팔이 일본군의 칼에 잘렸고, 태극기가 땅에 떨어졌을 때 그녀는 굴하지 않고 다른 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또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쳤으며, 그 팔마저 일본군에 의해 칼로 잘렸던 위인이라고 배웠다.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라는 삼일절 노래를 목놓아 부르면서 우리는 양팔이 잘린 채 옥 속에서 죽어갔던 그녀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승복 어린이를 기리는 노래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 역시 죽음 앞에서 떨지 않고 나라를 위했던  유관순과 같은 용기 있는 위인이라고 아이들끼리 입을 모아 떠들었다.


"나도 이승복처럼 공산군 앞에서도 '공산당이 실어요'라고 말할 수 있어."

"웃기고 있네. 너는 공산당을 만나면 오줌을 질질 싸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걸."

"니가 어떻게 알아. 니가 봤어?"


우리는 그렇게 불현듯 총을 든 공산당을 만나는 상상을 하면서 서로 웃고 떠들었다. 누군가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잘 때 몽둥이로 때려잡겠다고 허풍을 떨면서. 반공 애국심에 깊이 물든 나는 친구들에게 침까지 튀기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 누군지 알아?"

"세상에 최고 악당이 딱 세 명이 있는데, 바로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야."라고.


그 놈들만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6.25 동란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고, 분단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산가족도 없고 통일된 나라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학교에서 배우고 들은 대로 믿고 반공 이념을 충실히 전파하곤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제 반공이 아니라 멸공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반공과 멸공의 차이는 확실해졌다. 너의 적에 반대하는 정도로는 안 되고 아예 완전히 그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반공’ 사건이 그 학기 미술에서 ‘미’를 받게 된 결정적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말한 대로 나의 반공 포스터 점수가 빵점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을 음악이나 국어나 산수처럼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잘하지도 못했던 나의 변명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의 그림과 비교할 때 내 그림이 딱히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4학년 1학기까지 미술은 언제나 '수'나 '우'였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오래 남았다. 그렇지 않아도 재미없었던 미술 수업을 나는 더욱 재미없고 힘들게 느끼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림을 그린다거나 글씨를 쓰는 것이 싫었고, 스스로 정말 못한다고 생각했으며, 개선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중학교에 가서도 미술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변명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부수적으로는 손글씨마저 예쁘게 쓰지 못했다.


어린 나에게 '미술'이라는 이미지는 그렇게 엉뚱한 사건으로 아주 특별하고도 부정적으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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