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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Oct 09. 2024

어둠의 세계 (2)

학교와 선생님 - 절망과 공포

4.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새로운 기대감으로 마음이 잔뜩 부풀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았고 공부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겨울방학 한 달을 시골에서 지내면서 나는 서울과 다른 여러 경험을 했고 조금 더 성장했다고 느꼈다. 불운했던 2학년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 밝은 한 해가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곧바로 반장이 되어서 나의 밝은 믿음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3월 개학 후 첫 번째 주에 평가시험을 보고 나서 두 번째 주에 담임 선생님은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그것은 아마도 첫 시험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이미 2학년 때의 성적을 기초로 한 평가에 기초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50대 중후반으로 보였던 담임 선생님의 이름은 연 00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를 괴롭힌 그의 이름은 신기하게도 일생동안 잊히지 않는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의 느낌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밝은 회색 계통의 말끔한 양복을 입었으며 그 안에는 하얀 셔츠 위에 파란 넥타이까지 맨 선생님은 말도 천천히 했으므로 매우 점잖은 신사와 같았다. 선생님의 이마에는 주름이 많고 눈 밑에는 둥그렇고 커다란 눈두덩이 쳐져 있어서 나이가 매우 들어 보였으나, 적어도 첫인상은 사납거나 신경질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남성 치고는 부드러운 편으로 보였다. 어찌 보면 인자해 보인다고 할 수도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상 입을 열고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단박에 답답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말할 때 매우 자주 더듬거리고 같은 단어를 반복했으며 행동은 매우 굼떴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니, 약간 길쭉한 그의 얼굴, 특히 눈가에는 잔주름이 무척 많았으며, 그의 모습 전반적으로 어딘가 모르게 삶에 지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했다.


처음 한두 주가 지나고 나서부터 그는 벌써 기력이 쇠한 듯 거의 매일 약간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나타났고, 아이들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은커녕 밝은 웃음조차 주지 않았다. 개학 첫날 보였던 밝은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랫동안 그래왔다는 듯 그는 기계적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수업 시간에 그는 일어나서 움직이기도 힘들고 귀찮다는 듯 주로 교실 칠판 옆에 있는 그의 책상이나 걸상에 머물렀다. 교실 앞 창문가에는 그의 큰 책상이 있었는데, 그는 늘 그곳에 앉아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이 가득 찬 느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는데, 사실 그것은 당시 대방초등학교에 있는 다른 교사들도 거의 모두 마찬가지였다.


겨우 6년에 걸친 내 개인적 경험에 따른 판단이지만 더 깊이 헤아려 생각해 보면, 그때 초등학교 교사들의 수준은 높지 않았던 듯하다. 한국전쟁 후 그들이 걸어온 이력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우리를 잘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과 기아와 원조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온 국민이 헐벗고 굶주렸던 시대였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거의 십 년이 지나서야 산업화와 도시화가 겨우 태동하던 무렵이었다.


한국전쟁 후 단군 이래 가장 거대한 인구 집단으로 태어난 베이비 부머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그들의 부모 세대와 달리 새롭게 유입된 자본주의 문화에서 사는 첫 한국인들이 되었다. 베이비 부머들은 새로운 사회체제에 맞춰 수립된 보편적 학교교육 체계 내로 처음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어서 도시 인구는 급증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자녀들을 받아줄 수 있는 학교는 크게 부족했다. 그로 인해 한 학급에 60여 명, 나중에는 8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들어차서 각 학교는 소위 ‘콩나물 교실’들로 북새통이 되고 말았다. 특히 서울에서는 어느 학교에서나 콩나물 교실이 당연시되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그 시절, 아이들에게 의자와 걸상이라도 제대로 주어진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너무나 빠르게 늘어나는 학생들로 인해 때때로 교실에는 책상과 걸상마저 모자랄 때가 있었다. 책상과 의자가 없는 아이들은 매일 다른 반으로 남는 책상과 의자를 찾으러 갔으며, 그래도 남는 것을 찾지 못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차가운 교실 바닥에 앉아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학교는 매우 자주 건물을 새로 지어야 했지만 아이들이 콩나물 교실에서 벗어나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구 급증 물결은 그 후로도 십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하면서 도시의 크기는 꾸준히 확장되었고 수많은 작은 집들과 판잣집들이 언덕 위까지 촘촘히 들어섰으며 각 집마다 월세나 전세를 주어서 한 지붕 두세 가족이 많았다. 가구마다 자녀 숫자가 많았으므로 사회 전체적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으며, 정부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범국가적 표어를 내걸고 출산을 줄이고자 애썼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의무교육제도에 따라 모두 학교에 가야 했으므로, 건물 하나에 운동장만 갖춘 신생 학교들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건립되었다.


학교가 그렇게 늘어나는 데 비해 교사들은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대방초등학교의 교사들은 대체로 3,40대가 많았는데, 만약 그때도 교사 자격을 교육대학 졸업자로 규정했다면 그들은 한국전쟁 직후에 교육대학을 을 것이다. 당시에는 2년제였던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곧바로 교편을 잡게 된 그들은 모두 박봉에 시달렸고, 거의 모두 도시 빈민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처럼 어딘가 불안하고 빈한한 티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3학년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은 이미 50대 후반이었다. 그래서 나는 1970년대에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에 관해 이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가 정식으로 교육대학을 졸업했다면 적어도 30년 전이어야 하므로, 그는 필경 1940년대 전후 무렵에 20대 청춘을 보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약간 의아한 느낌이 든다. 먼저, 식민지 조선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2년제 교육대학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고, 그런 종류의 교육대학이 있었다 해도 그가 과연 그런 대학을 졸업했는지도 궁금하다. 실제 상황에 근접해서 추측하자면, 어쩌면 한국전쟁 후에 그가 40대가 되어서 긴급히 신설된 교육대학을 다녔을 수도 있다. 그가 살아온 생애의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지만, 한국전쟁 이후 혼란과 거짓이 난무했던 시절, 제도적으로 보편적 국민교육을 강화하면서 급증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를 가르칠 초급 교사들이 대거 필요하게 되었던 저간의 급박하고 혼란스러웠던 사정을 나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때 나는 담임 선생님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겨우 아홉 살에 불과한 우리들과는 너무 나이 차이가 커서, 우리는 그에게 저절로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들의 부모님에 비해서도 나이가 훨씬 많고 늙어 보였으며, 마치 젊은 할아버지를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는 다른 젊은 남성 교사들에 비해 폭력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때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도 툭하면 욕을 하고 매를 들고 우리를 위협했으며, 종종 아이들의 머리를 쥐어박거나 손바닥을 내밀게 하여 때리곤 했다. 매가 없다 해도, 또 그의 말과 행동이 느리다 해도, 그의 나이가 주는 권위로 인해 우리는 그의 앞에서 결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청소 끝나면 반장은 검사하고 나서 교무실로 와서 보고해.”


3월의 어느 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마치면서 그가 말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으레 분단별로 교실을 청소했다. 담임의 종례까지 끝난 후에 아이들은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그것들을 교실 뒤로 또는 앞으로 밀면서 교실 바닥을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야 했다. 칠판과 지우개를 정리하고 창틀 먼지와 교실 밖 복도까지 깨끗이 청소해야 했으며, 교실과 복도의 유리창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그렇게 청소가 끝나면 교실과 유리가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해졌는지 검사하고 승인하는 절차가 요구됐다. 선생님으로부터 청소가 잘 됐다는 말을 들어야만 교실을 청소했던 아이들은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청소가 끝난 후 나는 교실을 잽싸게 둘러본 후에 깨끗하다고 생각되면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에게 청소가 다 끝났다고 보고했다. 그러면 그는 대체로 교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아이들을 보내도 좋다고 나에게 말했고, 나는 교실로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집에 가도 좋다고 전했다. 그러나 때때로 선생님은 직접 교실로 와서 청소 상태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그는 나에게 청소 후에도 남아서 자기 일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깨끗해진 교실로 와서  나를 옆에 앉혀놓고 각종 일을 시켰다. 선생님 책상을 청소하고 정리하거나 아이들 시험지 답안을 채점하거나 그가 시키는 각종 심부름을 하는 것 등 말이다. 선생님이 원하면, 반장은 으레 수업 후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던 때였다. 교실의 미화 상태를 평가할 때는 특히 학급 임원들이 여러 날에 걸쳐 방과 후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교실을 예쁘게 보이도록 꾸미기도 했다.


그렇게 방과 후에 선생님이 나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나에게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일은 반장이나 되니까 하는 일이었고, 저절로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학생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엉뚱하게도 나에게 다음날 학교에 올 때 자기에게 색연필을 사 오라고 했다. 시험지 답안지를 채점할 때 그는 언제나 빨간색 색연필을 사용했는데, 그 일을 위해서 색연필이 필요하다고 했다.


“반장이면 그런 학용품 정도는 사 와야 한다”라고,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을 하면서 무신경하게 말하는 그의 옆얼굴을 보고 나는 얼떨결에 “네” 하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왜 나에게 색연필을 사 오라고 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색연필이 비싼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음날 아침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 빨간색 색연필 두 자루를 사가지고 갔다.


선생님은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그는 또 나에게 남으라고 한 후에 일을 시키면서 학용품을 더 사 오라고 했다. 그는 반장이라면 학용품과 학급에 필요한 용품 정도는 언제나 선생님에게 사다 주어야 한다면서 엄마에게도 그렇게 전하라고 했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왜 나에게 또 학용품을 사 오라고 하는 것일까. 반장은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자리인가, 하는 생각이 어린 나의 머리를 휘저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왜요?”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가 말한 대로, 나는 집에 가서 선생님이 말한 내용을 엄마에게 전했다. 선생님이 학용품을 사다 달란다고. 엄마는 “별일을 다 본다”면서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나에게 긴 말을 하지 않았다. 형은 국민학교 다녔을 때 반장은 물론이고 전교 회장까지 했었고, 작은누나도 늘 반장을 했지만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학용품을 사달라는 부탁을 들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나의 담임이 아마 인사치레로 한두 번 그런 것을 요구했나 보다,라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이 원한다고 하니까, 엄마는 처음 두세 번은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학용품을 사다 주라고 나에게 돈을 주었다.  엄마는 아마 그것이 선생님이 은유적으로 요구하는 ‘촌지’와 같은 뇌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선생님에 돈을 주지는 않았으며, 나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때 집에는 학교 선생님에게 촌지를 줄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엄마는 선생님을 만나야겠다고 학교로 가지도 않았으며, 나를 통해 돈 봉투를 보내지도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겨우 학용품을 아주 조금 살 만큼의 돈을 한두 차례 더 주었을 뿐이다.


나는 엄마가 준 돈으로 아침에 등교하면서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에서 색연필과 연필과 공책 등을 사서 선생님에게 갖다 주곤 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요구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겨우 이런 걸 사 오냐고 하면서 “다음에 다시 사 와. 잘 모르겠으면 엄마에게 그렇게 말해.”라고 나에게 낮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는 절대로 다른 아이들이 있을 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방과 후에 나만 남아 있을 때 그렇게 말했다. 반복되는 그의 요구를 들으면서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사정을 말할 형편도 아니었다. 누구에게 말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학교는 나에게 가장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이었다. 선생님은 그 학교를 대표해서 나에게 전권을 행사하는 담임이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자꾸만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집에 돈이 없었고 엄마는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나아가, 엄마는 아예 선생님에게 학용품을 사주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의 계속되는 은근한 재촉에, 나는 때로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학용품을 사가기도 했지만 점차 빈손으로 갈 때가 많아졌다. 선생님이 나를 보고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얼굴만 빨개진 채 “네” 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학용품을 갖다 주어도 절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에게 더욱 냉담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어느 날부터는 내가 “눈치가 없다”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너는 정말 눈치가 없는 아이구나. 선생님이 하는 말뜻을 도대체 못 알아들어."


나는 겁에 질린 채 선생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사실, 그가 나에게 “눈치가 없다”라고 말할 때 그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눈치가 있는 아이가 되기 위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빨리 알아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쪽으로는 둔하기만 한 나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집으로 와서 엄마에게 선생님이 계속 학용품을 사다 달란다고 말하자, 엄마는 돈이 없다면서 선생님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사주지 말라고 다시 말했다. 엄마는 선생님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집안일로 바쁜 엄마가 굳이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가서 따지지는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아마 엄마도 처음 겪는 일이라 대처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선생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았겠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선생님이 알아서 그만 요구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듯했다.



5.


그러나 중간에서 나는 매우 난처해졌다. 교실에서 선생님을 보는 게 두려웠고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특히 선생님이 방과 후에 남으라고 할까 봐 두려웠다. 집에 돈이 없다고 하면서 나에게 그냥 학교로 가라고 했을 때, 나는 엄마가 학교에서 내가 겪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긴 엄마는 언제나 일곱 식구나 되는 집안의 일을 하느라 늘 바빴고, 겨우 초등학생이자 막내인 나의 학교 생활까지 깊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우리 집은 헤어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거렸고 아버지는 어두운 얼굴로 일찍 돌아오시기도 했다. 그리하여 선생님을 볼 때마다 나는 두려움에 떨었고 그에게 뭔가 마련해 줘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시달렸다.


깊은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선생님의 지속적인 윽박 속에서 나는 엉뚱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엄마가 돈을 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엄마 몰래 돈을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절박한 고민으로 얼룩진 어느 날 저녁, 나는 결국 엄마 몰래 엄마의 지갑을 뒤질 생각을 했다. 나는 엄마가 시장에서 음식 재료를 사기 위한 생활비를 언제나 지갑에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시장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엄마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4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는 틈을 타서 드디어 나는 엄마의 가방을 열기로 했다. 엄마의 짙은 갈색 가방은 거의 언제나 안방에 있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 가방에는 늘 두꺼운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엄마의 휴대용 화장품과 지갑도 들어 있었다. 이미 열려 있는 엄마의 가방을 뒤지기 위해서 가방에 손을 댔을 때 내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가쁜 숨을 죽인 채 부엌에 있는 엄마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가방 속에 있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찬송가를 부르면서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고, 나는 빠르게 지갑을 열었다. 지갑 속에는 두 번 접힌 지폐 여러 장과 동전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선생님에게 학용품을 사다 줄 만큼의 돈만 가지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돈을 많이 가지고 가면 엄마가 금세 알아챌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강하게 요동치는 가운데 떨리는 마음, 떨리는 손으로 나는 엄마의 지갑에 있는 동전 몇 개를 그러모아서 재빨리 내 주머니에 넣었다.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오로지 선생님이 나를 혼내지 않고 귀여워해 주기만을 바랐다.


그때의 떨리고 참담했던, 아홉 살 꼬마의 마음을 당신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학교 선생님에게 학용품을 사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엄마의 지갑을 몰래 뒤지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런 행위가 옳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움직이는 꼬마의 절박함을 알 수 있겠는가.


악의 구덩이로의 추락.

밤의 세계로의 몰락.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밤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훗날 읽게 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악당 친구인 프란츠에게 돈을 주기 위해서 부모 몰래 저금통을 깨뜨려야 했던 것처럼, 아니 나는 더욱 악랄하게 행동했다. 나에게는 싱클레어가 가졌던, 동전이 잔뜩 들어있던 저금통이 없었고, 싱클레어를 도와준 데미안과 같은 사람도 없었다. 나는 혼돈과 절망과 가난과 고립 속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며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어두운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부모 몰래 저금통에서 돈을 가지고 갔던 싱클레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엄마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싱클레어가 프란츠의 휘파람 소리에 공포를 느꼈던 것처럼 나 역시 선생님의 말소리와 얼굴 표정에서 두려움과 절망을 느꼈다. 다만, 싱클레어는 자기의 허풍에 찬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도록 프란츠의 입막음을 하기 위해 프란츠에게 돈을 주었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채 엄마 몰래 돈을 훔쳤다. 엄마가 이미 돈을 주는 것을 거부한 마당에 엄마에게 떼를 써봤자 소용이 없었고, 선생님에게 엄마의 그런 거부의사를 전달할 수도 없었다. 이미 주눅이 잔뜩 든 나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선생님에게 그런 것을 말할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지도 않았으므로, 싱클레어처럼 돼지 저금통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따로 저금한 동전도 없었다. 내가 선생님에게 학용품을 사다 주려면 엄마 몰래 지갑에 든 돈을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었다. 싱클레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가 불쌍하고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고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마치 악몽을 꾸는 것처럼 나는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점점 깊은 자책감과 절망감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그저 선생님을 보는 것이 무서웠고,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다. 공부도 하기 싫었으며, 나에게 돈을 주지 못하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돈이 풍족하면 선생님도 행복해지고 나에게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이유로 인해, 선생님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는 아버지와 엄마에게로 점차 조금씩 돌려지기도 했다. 나에게 돈을 주지 못하는 부모님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고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나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귀여워할 수 있게 될까 고민했다. 그는 나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그가 낮고 작게 불평하는 말만으로도 나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가 나에게 더 이상 나쁜 말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분명히 뭔가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나에게 끼칠 위협과 공포가 어떻게 확대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나를 강하게 밀어내는 걱정과 불안과 공포심으로 인해 나는 엄마 몰래 엄마의 지갑을 뒤져서라도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가야 했다. 그야말로 절망과 공포의 날들이 연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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