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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경북 봉화 상설시장과 구문소

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1.


봉하와 봉화를 헷갈린 적이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묻힌 곳을 자꾸만 봉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2023년 가을 부산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때 매우 힘들여서 봉하마을에 다녀온 후에는 절대로 헷갈리지 않는다. 오늘은 김해시에 있는 봉하가 아니라 경북 봉화를 가볼 수 있었다. 이름이 뭔가 친숙해서 큰 고을인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어제는 하늘에 구름이 많아서 매우 흐리고 비까지 내린 날씨였지만, 여행 둘째 날인 오늘은 다행히 아주 쾌청한, 전형적인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구름이 거의 없는 하늘이 너무 파래서 눈이 시렸고 그것을 우러러보는 내 마음까지 파랗게 물이 드는 것 같았다.


독립영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던 <워낭소리>는 바로 이 봉화를 배경으로 한다. 2009년 초에 개봉된 이 영화는 최 노인과 그가 부렸던 소의 40년 ‘우정’을 그려냈다. 누런 소는 보통 15년을 산다고 하는데, <워낭소리>에 나오는 소는 무려 40살이다.


‘워낭’은 소나 말의 턱 밑에 매어 놓는 방울을 뜻한다. <워낭소리>는 그렇게 나이 먹은 소의 마지막 수년의 생활을 영화에 담아서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 봉화에 와보니 내성천이 조용하고 한적한 봉화읍을 휘감아 흐른다. 우리가 차를 댄 곳은 바로 그 내성천 제방에 있는 도로였다. 그 옆에는 상설시장이 있다. 시장은 강둑 아래에 펼쳐져 있다. 그래서 강둑 위에 있는 도로에서 보니 시장 건물 지붕들만 발아래로 보였다. 지붕들만 보이는 시장 풍경은 매우 낯설었다.


내성천 건너에는 봉화군 체육공원이 있다. 그곳에 작은 무대 또는 경기장 같은 것이 보였고, 지붕을 뾰족하게 만든 희색 텐트들도 많이 보였다. 지역 축제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길거리에 늘어선 광고를 보니, ‘제41회 청량문화제 10.03 - 10.06 봉화읍체육공원 일원’이라고 적혀 있다. 광고에는 전통민속놀이, 축제마다 으레 따르는 체험 및 전시, 삼계줄다리기 재연, 전국한시백일장, 학생사생대회, 민속장기대회, 작은 음악회, 보부상공연 등의 행사가 시간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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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어슬렁어슬렁 시장으로 들어갔다..

이미 매우 크고 분주했던 단양 구경시장을 보았던 나에게 봉화의 상설시장은 아주 작고 한적한 시장이었다.


시장이 의외로 작고 손님도 거의 없는 모습이어서 약간 실망한 가운데 그래도 먹을 게 뭐가 있을까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식당이 없었다. 재관은 여러 식당 창문에 쓰여있는 선지해장국을 보고 그것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상국도 그것을 먹겠다고 했다.


그러나 속 깊고 배려심이 강한 혁국은 입이 짧은 내가 해장국을 안 먹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나에게 “너는 뭐 먹을래?” 하고 물었다.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지 못한 나는 실망한 목소리로, “아무거나”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곧이어 “해장국 빼고 아무거나”라고 대답을 정정했다. 하다못해 비빔밥도 좋고 만둣국도 좋고 콩나물국밥도 좋지만 그런 메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장의 상황을 대충 살펴보니, 그 지역은 소고기가 많이 거래되는 곳 같았다.


아, 워낭 소리.


어디선가 워낭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주 짧은 순간 심장이 콕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상설시장에는 고기를 끓이거나 고아서 음식을 만드는 여러 식당들이 보였다. 나는 ‘이곳 사람들은 모두 고기만 먹나’ 생각하면서, 할 수 없이 “설렁탕이나 먹어야겠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둘로 쪼개져서 두 명씩 두 식당으로 들어갔다. 선지해장국 식당에서도 설렁탕을 팔면 모두 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식당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 혁국과 나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바닥에 앉자마자 “설렁탕 둘이요”라고 말했다. 역시 바닥에 앉아서 식사하는 것은 나에겐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식당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경북의 특징인지,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전혀 싹싹한 데가 없고 매우 투박해 보인다. 손님이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말고’ 식으로 보인다. 손님에게 상냥한 구석은 전혀 없고 외지 사람이 괜히 농담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분위기다. 경북의 반찬 맛은 서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달콤 새콤한 맛은 전혀 없다. 설렁탕도 오로지 고기 맛만 감돈다.


혁국은 음식을 먹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반찬을 거의 먹지 않는다. 내가 설렁탕 반 그릇 정도 먹는 동안 그는 이미 그릇을 다 비웠다. 나도 그를 따라 부지런히 먹으려고 애를 쓴다. 혁국은 착한 나머지 먼저 먹고 나서도 앞에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를 건넨다. 내가 입이 짧다고 또는 음식을 먹는 속도가 느리다고 탓하지 않아서 좋다. 하긴 내가 느리게 먹는다기보다 혁국이 너무 빨리 먹는다고 해야 맞다.


점심식사 후에 다시 주차한 곳으로 왔더니 우리가 나온 시장에서 긴 행렬을 이룬 고적대(?)의 악기 연주 소리가 들렸다. 징과 꽹과리와 북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나는 강둑에 서서 무슨 행사가 벌어지는가 구경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대규모 고적대의 위용은 매우 위풍이 당당했다. 여러 개의 장대 깃발들이 지나가고 주황색 의상을 갖춘 고적대가 긴 줄을 이었으며, 그 뒤에는 파란색 포졸 옷을 입은 무리들이 따라왔다. 그들 뒤로 양반들과 지방관리 의상을 갖춘 사람들, 또 평민복을 입은 사람들까지 모두 옛날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고적대의 연주에 맞춰 긴 행렬을 이루었다. 행렬의 마지막에는 현대식 평복을 입은 사람들도 꽤 많이 따라갔다. 그들은 하천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서 축제 장소로 이동했다.


거기까지다.

봉화읍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본 것은.

그 축제를 보겠다고 저녁까지 거기에 있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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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도 부르고 날씨도 쾌청해서 기분도 좋은 가운데 우리는 경상북도 북부를 떠나 다시 강원도로 향했다. 경북이든 강원도든 주변에는 온통 산만 보인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지 물었더니 혁국은 ‘구문소’라고 한다.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그게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혁국은 “오랜 세월 강물이 지나가면서 바위를 뚫어 생긴 구멍”이라고 대답했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 물이 흐르면, 흙을 치워 내면서 물길을 내기도 하고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지만, 막상 눈으로 보면 ‘자연의 신비’를 느낀다.


구문소는 강원도 태백시 동점동에 있는 천연기념물이자 국가지질공원이다. 이곳은 우리나에서 유일하게 산을 가로지르는 강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강물이 흐르면서 석회암 암벽을 깎아내린 결과 약 1억 5000만 년 전에 바위에 큰 구멍이 생겼고 그 아래에는 깊은 물 웅덩이가 생겼다. 그러니 바위에 구멍이 생기기 전까지는 물이 돌아서 흘렀는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나는 물이 바위를 돌아서 흐르다가 바위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을 상상했다. 물이 놀랐을 것이다. 앞에 가는 물방울들만 따라가다가 갑자기 함정으로 쑥 빠져드는 물방울들의 아우성.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하면 거짓말이 심하다고 할까 그만둔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물이 "으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구문소는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나는 곳이다. 두 물길이 지하 동굴에서 만나서 흐르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 동굴이 지상까지 넓혀졌다.


‘구무’는 옛말로 구멍이나 굴을 뜻하고, ‘소’는 한자로 물웅덩이를 뜻한다. 구무소를 한자로 적은 것이 구문소다.


물이 흘러 깎인 바위 물가에 누가 새겨 넣는지 모르지만 ‘五福洞天子開門’ 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 ‘다섯 복을 가진 동네에서 하늘의 아들이 문을 열었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런 곳에는 으레 전설이 있지만 딱히 관심을 가질 내용은 아닌 듯하다.


차를 세운 후에 멀리서 구문소를 바라보고 “아, 오랜 물길로 바위에 구멍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만 가나 했는데, 탐구심이 강한 재관은 굳이 구문소 뒷부분까지 돌아가서 봐야겠다고 걷기 시작했다. 누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걸어가는 재관을 따라서 나도 갔다. 구문소 뒤로 가서 물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서 돌아갔는데 꽤 멀리 도는 길이었다.


혁국과 상국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재관과 나는 천을 따라 올라가서 다리를 건너 크게 삥 돌아서 바위에 뚫린 그 구멍을 앞뒤로 다 보았는데,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거기서 영겁의 세월이라는 감상이라도 느껴야 했는데 그런 자연유산은 사실 하도 많으니까 그저 그랬다.


구문소님, 미안.


거기서 다시 구문소 입구로 나오기 위해 갔던 길을 돌아와야 하나 했는데 재관은 용감하게 그대로 전진했다. 거기에도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어떤 커플은 우리가 계속 전진하는 것을 보고서야 따라왔다. 우리는 작은 동산을 넘었고, 거기에 주차된 차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구문소를 만들어낸 황지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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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e - A Million Years Ago/Chopin's Waltz Op.64 No.2 - DAVID DEY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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