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1.
우리는 산길을 돌아 돌아 태백시로 향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태백 시내에 있는 황지자유시장. 그리고 그 옆에는 있는 황지연못.
태백시는 인구가 3만 8천 명 정도에 불과한 소도시다. 거기에 있는 황지자유시장은 매우 작은 재래시장이고.
단양구경시장을 보고 온 우리는 황지자유시장도 볼거리가 있을까 들어가 보았지만 이 시장 또한 너무 작고 상인들 외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우리는 금세 밖으로 나왔다.
그 시장 앞에 황지연못이 있다.
1300리 낙동강 물길의 발원지라는 황지(黃池) 연못은 상지, 중지, 하지 등 세 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상지 아래에서 신선한 물이 매일 5천 톤가량 용출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먼저 하지부터 보기 시작했다. 그곳은 시내 한가운데 작은 공원처럼 생겼는데, 입구에 ‘황지 못의 전설’이라고 적힌 조각이 서 있다. 황부자와 며느리의 이야기인데 황지연못을 이해하기 위해 그 내용을 알 필요가 있다.
옛날에 욕심 많고 심술궂은 황부자가 살았는데, 어느 날 황부자의 집에 시주를 요하는 노승에게 시주 대신 쇠똥을 퍼 주었다. 이걸 며느리가 보고 깜짝 놀라면서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며 쇠똥을 털어내고 쌀을 한 바가지를 시주했다. 그랬더니 중이 며느리에게 "이 집의 운이 다하여 곧 큰 변고가 있을 터이니 살려거든 날 따라 오시오.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아니 되오"라고 말했다. 며느리는 노승의 말을 듣고 뒤따라 가는데 도계읍 구사리 산등에 이르렀을 때 자기 집 쪽에서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기에 놀라서 노승의 당부를 잊고 돌아보았다. 이때 황부자 집은 땅 밑으로 꺼져 내려가 큰 연못이 되어버렸고 황부자는 큰 이무기가 되어 연못 속에 살게 되었다. 며느리는 돌이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이 되어 굳었는데 흡사 아이를 등에 업은 듯이 보인다. 집터는 세 개의 연못으로 변했는데 큰 연못인 상지가 집터, 중지가 방앗간터, 하지가 화장실 자리라 한다.
일반적으로 연못이라 하면 공원 안에 있거나 시 외곽 한적한 곳에 있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황지연못은 시내 한 중심에 있으며, 그 연못이 공원 자체인 듯 보인다. 둘레는 상지가 100m, 중지는 50m, 하지는 30m이다. 연못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편이다. 연못 바로 옆에 낮은 상가 건물들이 있어서 이곳이 태백시의 중심 광장과도 같아 보였다.
2.
우리가 도착한 때는 마침 제43회 태백 전야제가 열리는 기간(10월 1일~6일)이었다. 무대와 음향장치와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이른 오후라서 그런지 진행 중인 행사는 없었다. 알고 보니, 전야제 버스킹이 오후 7시에 시작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태백제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열리게 되어 있다. 도민 운동회와 가요제를 포함한 각종 문화행사가 열릴 예정인데, 물론 우리는 그런 행사를 볼 수는 없었다.
연못을 잠깐 둘러본 나는 약간 허기를 느끼면서 달짝지근한 것이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혁국과 나는 뭔가 사 먹을거리를 찾아 공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금세 만두와 도넛을 파는 가게를 찾았다. 만두를 요청하자 약간 시간이 걸렸으므로 나는 거기서 기다리고 혁국은 연못으로 돌아갔다.
만두를 들고 돌아온 나는 버스킹 공연이 열린다는 무대 앞으로 갔다. 아마도 백여 개의 의자가 배열되어 있었다. 나는 거기에 앉아서 만두를 먹으면서 쉬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작은 부스에서 어떤 행사가 있는지 사람들이 짧은 줄을 섰다. 부스 안에는 젊은 여성 두 명이 앉아서 부스를 찾는 사람들에게 뭔가 설명하고 있었다.
궁금해진 나도 부스로 가서 무슨 행사인가 물어봤더니, 태백제 홍보와 관련해서 뭔가 서명해 주면 2만 원인가 되는 상품권을 준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혁국을 불렀다. 두 명이 서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혁국과 재관이 왔고 그들이 조금 긴 인증 과정 후에 서명해 주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2만 원 상품권을 받았다.
이번 여행의 회계를 맡은 재관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저녁식사를 고기로 먹자고 했다. 그 말은 그날 저녁에 현실이 되어서 우리는 진짜로 소고기를 먹게 된다.
연못을 모두 둘러본 우리는 저녁을 먹을 식당을 찾을 겸 태백시 거리를 걸었다.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고 매우 한산했다. 금요일 오후인데도 거리를 오가는 주민은 거의 아무도 없고, 가게들도 전혀 활발해 보이지 않았다.
고기를 파는 곳이 거의 없어서 식당을 찾는 데도 한참 걸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우리 눈에 띈 식당이 있다. 식당은 매우 작아 보이는데, 바깥에 있는 간판에는 조금 엉뚱하게도 ‘전국 100대 맛집 선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선정된 맛집인지 도저히 믿기 힘든 문구지만, 어차피 고깃집이라곤 그 집과 그 옆집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냥 그 식당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식당은 매우 좁고 복잡해 보였다. 가운데 숯을 집어넣고 고기를 구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둥그런 테이블이 겨우 7,8개 정도 있었는데, 그나마 이미 손님들이 거의 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문가에 하나 남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갈빗살을 구워 먹었는데 맛은 있었다. 둥근 테이블이 작아서 술병과 반찬들을 늘어놓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이 식사는 결국 이번 여행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맛있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먹는 동안 여행객인 듯한 사람들이 계속 식당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빈 테이블이 없어서 일부는 그냥 떠나고 일부는 식당 문 앞에서 기다렸다. 손님이 이 정도로 몰리는 곳이라면 식당을 좀 크게 만들어도 될 텐데… 아마도 이맘때만 손님이 많았던 것일까.
태백시에는 고기 굽는 식당마저 별로 없구나. 가게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서 우리는 서둘러 먹고 식당에서 나왔다. 아직도 밖은 여전히 날이 밝은 이른 저녁시간이었다.
3.
배가 든든해진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한 군데 더 들렀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기차역인 추전역. 해발 855미터에 있다.
추전역은 1973년 태백선 개통과 함께 만들어진 역이다. 1995년부터는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다가 1998년에 환상선 눈꽃순환열차가 처음으로 개통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는 모든 정기 여객열차가 무정차 통과하게 됐다. 2017년부터는 화물 취급도 중지되었으며 현재는 역사가 굳게 닫혀 있다.
추전역에 도착했을 때 어둠이 조금 내려앉기 시작했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추전역사 앞에는 초록색 철제 펜스가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는 역사에 들어갈 수도,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역사 옆 넓은 마당에 ‘시간도 멈춘 추전역’이라고 적힌 팻말이 있는데, 그것을 보는 누구라도 쓸쓸함을 느낄 만했다. 한때는 수많은 석탄을 실은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역무원들과 여행객들이 웃으면서 돌아다녔을 기차역이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장소로 변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시나브로 날이 어두워지고 사위는 고요 속에 잠겨서 우리가 걷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추전역 앞에는 어떤 집에서 풀어놓고 키우는 것인지 흰 염소 여러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염소들은 가파른 산길에서 풀을 뜯어먹느라 바빠서 우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문득 그 염소들이 밤이 되면 어디로 가서 자나 궁금했지만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역사 주변에 민가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야생도 아닌 듯한 염소들은 어디로 돌아갈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재관은 밤에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혁국과 논의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 고기를 그렇게 먹고 또 뭘 먹으려고 하나.
재관은 또 닭을 먹고 싶어 했다. 다른 곳에서도 보았지만 재관은 정말 닭고기를 좋아하는 듯했다. 그들은 논의 끝에 가는 길에 어떤 식당에서 옛날식 통닭구이 두 마리를 픽업해서 가기로 정했다. 그리고 또 마실 맥주와 소주를 구했다.
사북 근처 어느 식당에서 우리는 통닭을 픽업하고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맥주와 소주와 안주까지 모두 구매했다. 먹고 마실 것을 잔뜩 준비한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숙소로 들어갔다. 두 번째로 들어서니 숙소가 안락하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숙소 베란다 밖으로 보니, 산들로 둘러싸인 사북 읍내가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찌 보면 마치 풍부한 이불로 둘러싸인 요람과 같은 그곳으로 깊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사북 읍내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여행 이틀째가 마감되는 우리의 밤.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어젯밤처럼 막걸리와 소주와 맥주와 통닭 등으로 파티를 했다. 그렇게 둘째 날 밤은 깊어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yw11BOH_nJI
Isadora (이사도라) - Paul Mauriat (폴모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