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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남역 고시텔

2024년 가을 여행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1.


홍대입구역 근처에 사흘간 살면서 나는 그곳을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그곳은 확실히 식당과 주점과 카페가 많고 액세서리와 옷 가게 등도 촘촘하게 늘어서 있다. 그런 만큼 20대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며,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젊은이들로 인해 싱그러운 기운이 확 느껴진다.


그러나 뭔가 오래되고 그윽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깊은 역사에서 나올 수 있는 감성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최근에 그렇게 변한 것인지 모르지만 문화적 풍성함과 다양성은 줄어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머물면 재미있을 것이라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곳에는 지나치게 젊은 사람들만 몰리는 것을 넘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중국어 대화 소리가 자주 들린다. 중국인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식당에서도 반드시 기본적인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듯했다. 아니면, 최소한 영어와 중국어 메뉴를 갖추는 게 바람직하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그렇게 와서 한국의 상권이 살아나고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관광공사와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국내 관광수지 규모는 2019년 -85억 1500만 달러, 2020년 -31억 7500만 달러, 2021년 -43억 2800만 달러, 2022년 -52억 9700만 달러에 이른다. 관광수지는 해외 관광객이 한국에서 지출한 금액과 우리나라 여행객이 해외에서 지출한 금액 차를 나타낸 통계다.


한국이 관광수지에서 흑자를 보는 대표적인 나라는 중국이고 적자를 기록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일본이다.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로 단체관광객이 급감한 지난 2017년에는 국내 여행수지 적자가 -183억 2300만 달러로 역대 최대에 달했다. 따라서 관광수지에 관한 한 우리는 중국에서 돈을 벌고 일본에서 돈을 잃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이렇게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로 관광을 와서 돈을 쓰고 무역에서도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이 대중국 무역에서 지속적으로 흑자를 얻고 있는데, 요즘 한국인들의 중국인 혐오 증세는 매우 심각해 보인다.

한국인들의 민족 감정 문제를 쉽게 풀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중국인이라면 한국인에게 많이 섭섭할 듯하다. 반세기 전에는 중국 못지않게 가난했던 한국인들이 이제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자신들을 업신여길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듯하다.


거꾸로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역시 한국인들은 우리보다 한 수 아래야, 이렇게 우리 문화와 환경을 동경해서 열심히 찾아오다니,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물론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삼국 간의 돈 문제만 따져보면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공중도덕이 모자라고 무례하고 너무 돈만 밝히는 일부 중국인들이 있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무례하고 무법한 나라처럼 본다면 잘못이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 데는 지난 수십 년간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성과를 얻은 덕분이다. 중국이 없었다면 한국이 이렇게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할 때, 한국인들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불공평한 태도와 자세는 도대체 어떻게 수정될 수 있을까.




2.


서교동에 사흘간 머물면서 나는 밤에 두 차례나 홍대입구역 근처로 나갔다. 버스킹 공연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 장소를 찾지 못해서 그런지, 버스킹 공연을 한 번 보지 못했다. 작년 가을에 신촌역 부근에서 잠시 마주쳤던 버스킹 공연은 도대체 어떻게 보게 된 것인지 아리송했다.


홍대입구 지역에 실망한 나는 조속히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으므로 고민했다. 신촌까지 뒤져봤지만 주요 프리미엄 고시텔에 빈 방이 없었다. 겨우 한 군데에서 일요일에 방이 난다고 와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 지역을 떠나고 싶었다. 일요일에 막상 그 고시텔에 갔다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한, 지도를 보니, 그 고시텔은 지하철역에서 조금 멀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곳저곳 전화를 하다가 결국 다시 나에게 가장 익숙해진 강남역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종각이나 종로 3가 근처도 생각해 보았지만 굳이 찾아가 볼 만한 고시텔이 없었다. 결국 작년에 묵었던 강남역 부근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남역 일대에 있는 고시텔 세 곳을 뽑아 연락했고, 그중에 빈 방이 있다는 두 곳을 가보기로 했다. 그중 한 곳은 내가 작년에 묵었던 곳이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역삼역 부근에 있는 고시텔을 먼저 본 후에 바로 그곳으로 가겠다고 결정했다. 역삼역 근처에 있는 고시텔은 강남역 고시텔에 비해 가격이 더 싸고 전철역에도 더 가깝고 무료로 먹을 수 있는 라면들까지 풍부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 고시텔 주인은 내가 한 달도 안 되는 동안만 있다는 말을 듣고 5만 원을 더 깎아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방이 너무 작아 보였다.


그렇게 해서 혁국과 만나기 전날 밤 두 곳을 방문한 결과, 나는 다시 작년에 묵었던 고시텔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나마 방이 조금이나마 더 넓고 깨끗했으며 공용주방도 사용하기 편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강남역으로 입성하게 됐다. 이미 친숙한 장소라서 찾아다니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 고시텔의 주인아주머니가 말했다.

“작년에 오셨던 분이네요. 일 년 만에 또 오시니까 반가워요.”

“그러게요. 제가 이 고시텔과 인연이 깊네요. 여차하면 내년에도 또 올 거 같아요.”


고시텔 주인이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는 것도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여주었다. 서울에서 나는 그렇게 작지만 살가운 정이 고팠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방을 친절하게 소개해 주었고, 숙박 기간이 한 달이 안 되니까 텔레비전도 주겠다고 했다.


“텔레비전보다 이불이 더 필요한데요. 작년에 이불이 없어서 친구에게 부탁해서 이불을 받아서 사용했거든요.”

“그럼 이번에는 특별히 이불도 드릴게요. 베개도 두 개 포함해서.”


좁은 침대에 베개는 왜 두 개를 주는지 모르지만 머리를 기대기에 좋을 것 같아서 받았다. 텔레비전은 거의 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아침과 밤에 심심하지 않게 뉴스라도 틀어놓을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방에 창문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년에는 이 고시텔에서 복도 끝에 있는 방을 얻어서 거리로 난 큰 창문을 포함하여 창이 두 개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고, 그나마 창문 앞으로는 다른 건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시야를 가렸다. 어차피 매일 나간다고 생각하면 창문을 내다보는 게 무슨 상관이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갑갑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세 평도 넘는 방이라 하니, 고시텔 치고는 꽤 큰 방이었다.


작년에 들어갔던 방과 폭은 마찬가지지만 안쪽으로 조금 더 깊었다. 그래서 작년에는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가 65만 원이었지만 이번에는 보증금 20만 원에 월세 75만 원이었다. 물가가 오른 탓도 있고, 방이 더 크기도 해서 10만 원을 더 내게 된 것이다.


토요일 아침, 서교동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나는 양화로로 나가서 삼거리에 있는 마차처럼 생긴 작은 점포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노인 부부가 장사하는데, 여자는 부지런히 샌드위치를 만들고 남자는 손님을 끄는 입담이 좋았다. 거리에 서서 샌드위치를 먹고 나는 가방을 싸기 위해 천천히 돌아왔다. 순식간에 가방을 싼 후에 방 안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상국이 오기 전에 먼저 양화로로 나갔다. 전철역으로 가서 상국을 만났고, 우리는 바로 강남역으로 갔다.




3.


그날 오후에는 상국과 함께 서울역 앞으로 가서 혁국을 만났다. 우리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는데, 그곳이 마침 숙명여대 앞이었다. 향숙이 근처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그럼 가봐야지”

“지금 닫았을 걸.”


이미 시간이 늦어서 민족문제연구소는 닫았지만 그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열려 있었다. 혁국과 상국이 먼저 식당으로 들어간 사이에, 나는 잠시 박물관을 보겠다고 나섰다.


박물관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열심히 꾸민 모습이었다. 식당에 먼저 가 있는 친구들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서 우리는 서둘러 박물관을 돌았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나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가능하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도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 사이트 http://historymuseum.or.kr/ )


그러나 거의 언제나 그렇지만,‘나중’은 웬만해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서울을 떠날 때까지 ‘나중’은 오지 않았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이번 방문에는 서울에 오자마자 여러 친구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겨우 나흘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인생이 매일 이처럼 다채롭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시간이 쏜살같아서, 저 푸른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만났던 우리가 어느새 이 나이가 되었구나.


닷새 전만 해도 뉴욕에서 한국으로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새 서울에 무사히 안착하고 있었다. 겨우 이틀 만에 이렇게 여러 친구들을 만나게 되다니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고 고시텔로 걷는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KrYHKn8d_w0

La Vita è Bella - Buon Giorno Principe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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