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1.
내가 강릉에 처음 와본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그때가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였던가. 하여간 추웠던 때였다.
나보다 먼저 미국으로 이민 갔던 친구가 서울을 그리워한 나머지, 또는 뭔가 다른 일 때문이었는지, 서울을 방문했을 때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초기에 잠시나마 좋아했던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후 곧바로 이민 간 후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서울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교회 친구들과 그녀의 친구들이 거의 열 명 정도나 모여서 함께 여행을 했었다. 그때 우리에게 자동차가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버스와 도보로 여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갔던 곳이 속초와 강릉이었을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오죽헌을 보았던가. 무엇을 보았는지 딱히 기억나는 게 없다. 속초에서는 아마도 낙산사에 갔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볼거리가 많지도 않았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버스 타고 외설악도 갔었다. 거기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까지 올라가서 털보 아저씨가 파는 커피를 마셨던 듯하다. 그때는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꽤 유명한 털보 아저씨였다. 거기에 갔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털보 아저씨와 사진을 찍었다. 나는 아니었지만 다른 친구들도.
그때 하룻밤 자던 여관에서 신발을 도난당했던 일이 있다.
보통이라면 대학교 앞 길거리에 있는 리어카에서 팔던 2천 원짜리 운동화도 잘 신고 다녔던 시기였는데, 정말 오랜만에 여행 가기에 앞서 신발을 샀었다. 미국에서 온 여자 친구의 친구들까지 함께 여행한다고 했으니까 뭔가 기대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품명이 ‘랜드로바’인가 하는, 당시에는 꽤 유행하던 갈색 신발을 사서 신고 여행을 떠났다. 모두 신발을 문 앞에 벗어두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신발만 사라졌다. 당장 신고 나갈 신발이 없었으므로 난감해진 나는 여관 주인에게 신발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여관 주인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아주 낡은 신발이라도 신고 가라고 했다. 그러더니 색이 바랜 하얀 운동화를 주었다. 친구들은 아마 여관 주인이 훔쳐갔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겨우 대학교 1학년 학생인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내 발에 맞지도 않는 낡은 운동화를 신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는 그렇게 신발을 방문 밖에 벗어둔 채 자고, 그런 새 신발을 도둑이 훔쳐가던 시절이었다.
그 후 강릉은 처음인 듯하다. 강릉이라는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고 친근감을 주는 것은 그나마 그때 와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2.
안목해변에서 나온 혁국은 집으로 가는 길에 강릉 경포대 옆으로 차를 몰았다. 넓은 호수가 보였을 때, 그는 “봐라. 이게 경포대야.”라고 말했다. 말은 경포대라고 했지만 물론 경포호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호수는 꽤 넓어 보였다. 달리는 차의 창문 밖으로 호수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비쳤다. 어느덧 서산으로 지는 해가 물 위로 수많은 황금빛 화살을 쏘는 듯 보였다.
“그런데 호숫가에 내려서 볼 시간은 없어.”
시간이 모자라서 차마 차를 세우고 호수를 볼 형편은 아니라는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호수는 그저 우리가 아는 호수일 뿐이니까.
물이 오갈 데 없어서 바람이라도 불지 않으면 언제나 잔잔히 머물러 있는.
강릉에는 높은 빌딩이 보이지 않는다. 초당순두부 식당거리도 그렇고, 안목해변도 그렇고, 호수 주변도 그렇고, 멀리 보이는 약간의 아파트 건물 외에는 고층빌딩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강릉 중심가에 들어가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강릉시에 원래 고층 건물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 개발과 경제성장의 상징인 듯한 고층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강릉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발전된 도시가 아니라는 추측을 낳았다. 그런 생각만 했지,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고 조사하지도 않았다. 그냥 강릉에는 높은 빌딩이 없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다. 서울에서 가기에는 속초가 더 가까워서 그런지 그곳이 더 개발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위에 경포대가 있는데 여기서는 안 보일 거야.”
호숫가 도로를 달리면서 혁국이 갑자기 말했다. 나는 얼른 창밖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다면서 경포대가 있다는 걸 왜 말하는지 생각하면서. 그래도 거기에 경포대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거기서 누군가는 넓은 호수를 내다보면서 시를 읊거나 술을 마셨다는 말이지, 하고 나는 상상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차창 밖으로 언덕 위에 언뜻 경포대의 처마를 본 듯도 했다. 나는 혼자서 긴가민가 하면서 과연 달리는 차 안에서 경포대가 보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달리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은 이렇게 나왔다. 나의 놀라운 집중력으로!
그 후로 우리는 쉬지 않고 줄곧 서울로 내달렸다. 아니, 사실은 서울이 아니라 용인 동천역이었고, 이어서 부천이었다. 혁국은 사흘째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같은 시간 동안 조수석에 앉은 재관은 줄곧 핸드폰으로 집으로 가는 운전 방향을 확인한 후에 또다시 열심히 회계 업무를 하더니, 이번 여행의 대략적인 지출 상황을 알려주었다. 자세한 지출과 개인당 부담액은 나중에 알려준다고 하면서. 참 꼼꼼한 성격이다.
서울로 가는 차도에서 보니 주변에 있는 산들 위로 점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먼 산 위에 걸린 구름은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힘을 잃고 약해진 햇살은 먼 하늘부터 조금씩 잿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늘이 그렇게 변하는 그맘때는 누구나 어린 왕자가 그런 것처럼 외로움을 느낀다. 해 지는 곳에 붉은 노을이 걸린 하늘을 볼 때면 거의 누구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어둠 전에 불쑥 다가서는 고독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런 순간에 인간은 결국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일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 그런 아련한 고독과 원초적 슬픔은 가슴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
차도는 막히다 안 막히다가를 반복했다. 재관은 끊임없이 전화기에서 교통상황을 확인하면서 혁국에게 어느 길로 가는 게 좋은지 안내해 주었다. 그것은 재관에게만 있는 특유의 열정이다.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지치지 않고 말을 하면서 전화기를 보고 길을 안내해 주는 것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옆에서 지쳐서 곯아떨어질 법도 한데 재관은 그러는 일이 좀체 없다.
결국 오후 8시쯤 되어서 상국과 나는 동천역이 가까운 고속도로에서 내렸다. 사흘 전 아침에 우리가 모두 만났던 곳이다. 우리를 내려놓고 혁국과 재관은 바로 떠났다. 함께 저녁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뒤풀이가 없이 헤어져서 안타깝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혁국과 재관은 또 한참 가야 하니까.
3.
고속도로 갓길에서 찾기도 쉽지 않아 보이는 길을 상국은 익숙한 듯 걸어갔다. 상국과 나는 이윽고 동천역에 도착했다. 그냥 헤어지기 싫어서 나는 상국에게 저녁이라도 먹고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숙소로 돌아가봤자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가기는 뭔가 아쉬웠다.
상국이 나를 처량하게 생각해서 그랬던지, 빨리 집에 가서 부인과 함께 식사해야 한다는 욕망을 누르고 나와 함께 있어 줬다. 그러나 정식으로 식당을 찾아서 걷기는 피곤하고 귀찮았으므로 우리는 겨우 역 앞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뭔가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먹을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떡볶이와 어묵을 시켰다. 상국은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생각을 하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잠시 별로 대화도 하지 않고 간이의자에 앉아서 나는 혼자서 꾸역꾸역 음식을 먹었다. 그 밤에 전철에서 나온 사람들 가운데서도 굳이 포장마차로 와서 떡볶이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집에 가면 먹을 게 아무것도 없을까.
비닐로 덮인 음식 접시 위에 있는 떡볶이를 모두 먹고 나서 우리는 일어섰다. 상국과 이별하고 나는 다시 전철역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주 천천히 고독을 씹으면서 강남역 고시텔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 고독은 우리 인간 생활에 원초적인 것일까. 아니면 여행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우리의 공식적인 가을 여행은 막을 내렸다.
그날은 내가 미국에서 서울로 온 지 겨우 열흘째였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에서 출국하기 전에 우리가 다시 만나서 뒤풀이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보장은 결코 없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rS3wOvAY4eY
Agnes Baltsa - Aspri Mera Ke Ya Mas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인터넷에서 흔하게 보이는 이 노래의 한국어 번역 가사. 이 가사를 보고 한 친구가 한국말 번역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내 소중한 눈물로 시간을 씻어내겠어요,
힘들었던 여름 한 철, 당신 곁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을.
새벽 여명이 죽은 비둘기로 가득 찬 하늘을 채우네요.
나는 슬픈 성모에게 돌아가요, 안녕, 울지 말아요.
고통이 펜던트처럼 목에 걸려있지 않도록 자신을 깨우치세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세요.
결국에는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밝아올 거예요.
좋은 날이 밝아올 거예요.
<그래서 내가 우리 말로 번역된 여러 가사와 영어 가사를 검토한 후에 나름대로 이렇게 번역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쓰라린 시간, 슬픈 여름들을 눈물로 씻겨 보낼 겁니다.
당신 옆에서 새벽 여명에 물든 죽은 희망들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웠잖아요.
성모 마리아에게 돌아갈 테니,
안녕, 불안에 떨면서 울지 말아요.
행운의 부적을 걸지 말고, 차라리 이렇게 말해요.
괜찮아.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