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여행 이야기
어느덧 서울을 떠날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출국일이 한 주일 남은 시점. 한국을 떠나려니까 마음이 뭔가 애달파졌다. 이럴 때는 떠나기 전까지 한 주나 남았다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벌써 세 주나 지나갔다는 아쉬움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21세기에 살면서, 또 이 정도 나이가 든 시점에도 미국에서 한국 한 번 오가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도대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날은 언제일까.
혹시 죽기 전에는, 결코 오지 않는 것 아닐까.
문득 어깨에 남은 짐은 여전히 무겁고 삶은 지치고 허무해지는 듯하다.
어깨와 마음에서 짐이 조금씩 줄어든다 해도, 아마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심신도 점점 더 허약해져서 역시 견디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삶은.
2.
다음날 아침, 혁국을 다시 만났다.
고맙게도 혁국은 청와대를 구경시켜 줄 계획을 가지고 나를 불러냈다.
그런데 그날은 하필 온종일 비가 내렸다. 숙소에서 나가기 전에 곧 비가 내린다는 예보를 보았지만 우산이 없었던 나는 그냥 경복궁역으로 갔다. 우리는 국립고궁박물관 앞에서 만났는데 그때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혁국은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 하나로 같이 쓰고 다니면 우산 밖으로 삐져나온 어깨가 젖을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뜨거운 커피도 마실 겸, 우리는 편의점으로 갔다. 나는 겨우 한두 번 사용하게 될 긴 우산을 샀다.
혁국은 청와대에 가기에 앞서 나를 경복궁 서쪽 동네로 이끌었다.
역시 미리 짜놓은 계획이 있었다.
“이곳은 통의동, 효자동 등 크기가 작은 동들이 많은 곳이야. 이 일대에 한국 근현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들이 좀 있으니까 오늘 둘러보자. 청와대에 가기에 앞서 골목들을 탐방하는 거야..”
“그거 좋다. 비가 와서 낭만적이네. 너랑 걸어서 좀 그렇지만.”
“야, 이렇게 비가 올 줄 알았으면 너를 만날 계획을 하지 않았지.”
“무슨 소리? 비가 와도 할 건 해야지.”
내가 전혀 알지도 상상하지도 못하는 곳으로 탐방 계획을 세워준 혁국의 따뜻한 마음이 빗속에서 고맙게 전해졌다. 각자 우산을 썼지만 비가 점점 강하게 내려서 우리의 신발과 바지 밑단부터 금세 젖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랑비 따위가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신발 속으로 스며든 물로 인해 발 밑부터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우리는 먼저 통의동 백송터로 갔다.
현재는 백송 ’터’로 남았고, 다른 백송이 서 있지만, 원래 이곳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송이 있었다. 사라진 그 나무는 1690년 무렵 영조의 사저인 창의궁 안에 식수된 것으로 추정됐었다. 1926년 창의궁은 일제에 의해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으로 바뀌었다.
1990년 7월 17일 큰 비와 돌풍으로 인해 그 오래된 백송의 주 기둥이 쓰러졌다. 정부는 이 나무를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듬해에 목재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까지 뿌렸다고 한다. 뭐 그런 악독한 인간들이 있을까. 1993년 5월 13일 문화재관리국은 결국 이 나무를 잘라냈다.
3.
이어 우리는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앞을 지나서 진명여중고교 터로 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는 1886년에 설립된 ‘이화학당’이지만 우리 민족자본으로 처음 건립된 여학교는 ‘진명여학교’다. 1905년 국모였던 엄순헌 귀비는 친오빠였던 엄순원에게 학교를 지을 대지를 하사했다. 그곳에 진명여학교가 설립됐다. 설립 당시 8~15세 여학생 70명이 입학했다.
진명여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이리저리 분화발전하다가 1951년에 진명여고와 진명여중으로 개편되었고, 1987년에 진명여자중학교는 폐교됐다. 이어 진명여고는 1989년에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했고, 옛 부지에는 진명총동창회가 2019년 세운 표지석만 남아 있다.
우리는 종로구 효자동 청와대 사랑채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그 표지석을 보러 갔다. 표지석에는 ‘대한민국 황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라고 적혀 있다. 종종 오래된 교회가 단순히 신앙의 터전을 넘어서 역사의 산실이 되는 것처럼, 이렇게 오래된 학교 역시 배움의 터를 넘어 역사의 증인이 된다.
4.
이어 해공 신익희 선생 가옥.
신익희 선생(1894~1956)은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후에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효자동에 있는 이 가옥은 그가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유세를 위해 전북 이리로 열차를 타고 가던 도중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기와가옥은 기역자 형태로 안채 60.2평방미터, 사랑채 31.2평방미터로 매우 아담한 집이다. 1930년대에 지은 도시형 한옥이라고 한다.
그 집의 대문이 열려 있으므로 나는 마당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주 아담한 집이었고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적혀 있었으므로 나는 마당만 살펴보았다. 기역자 모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고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거기에 익은 감들이 매달린 감나무가 있어서 이채로웠다.
작고한 현대 정치인의 가옥에 들어온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 아닐까.
작년에 경남 봉하에 있는 노무현 생가에 갔을 때는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 밖에서 사진만 찍었으니까.
5.
다음은 송강정.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지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은 청운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 생가터 자리를 기억하기 위해 ‘송강정’이 남았다. 근처에 그의 시비와 표지석이 있을 텐데, 우산을 쓰고 급히 걸어 다니느라 그것들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헷갈린다.
그는 선조가 통치하던 시기에 사림파의 동서 분당 이후 서인의 지도자로서, 정치인이자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수많은 관직을 맡았으며 각종 당쟁과 낙향과 칩거와 재집권과 정치분쟁 등을 겪어냈고 임진왜란이 발생한 직후 사망한 인물이다. ‘관동별곡’ 등 가사와 한시 작가로 유명한 그는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75YmlDR92UQ
Mahler Symphony No. 5 - Adagietto (정명훈, NHK Symphony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