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여행 이야기 9 (부제: 이틀간 네 개 산을 오르다)
1.
1392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수도로 삼고 나서 궁궐과 종묘, 사직을 먼저 조성했다. 이어 1396년에는 한양을 둘러싸는 네 개의 산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았다. 목멱산, 낙산, 백악산, 인왕산이 그 네 산이다. 도성은 한양 공격에 대항하는 방어용 성벽이자 도성 바깥과 차별되는 경계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했으며 근대화와 도시정비를 내세우고 본격적으로 한양도성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먼저 숭례문 양측 성벽이 헐렸고, 이어서 소의문(1914년)과 돈의문(1915년)이 철거되었고 성벽 해체 작업도 곳곳에서 병행되었다. 성벽이 있던 자리에는 조선신궁(1925년), 경성운동장(1925년), 경성측후소(1932년)와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다른 성문들이 철거되거나 훼손되었지만 일본은 특히 숭례문만은 보존하려고 했다. 숭례문이 보존된 결과는 좋았지만 일제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어처구니가 없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숭례문을 통과해서 한양으로 진군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숭례문을 보물 제1호로 지정하면서 경성의 대표적인 관광 홍보물로 전락시켰다.
1928년에는 혜화문과 광희문의문루가 철거되었고, 1938년에는 혜화문의 석재 부분도 도로정비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후로도 성벽들을 방치했으며 도로정비 사업을 위해 철거 작업을 지속했다.
참고로 덧붙이면, 서울을 둘러싼 내사산은 낙타산(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이지만, 서울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외사산도 있다. 북한산, 아차산, 관악산, 덕양산이 외사산에 속한다.
2.
나는 서울에 올 때마다 일부러 애써서 ‘걷기’ 여행을 즐긴다.
이번에는 특별히 운 좋게 이틀에 걸쳐 한양도성 순성길을 돌 기회를 얻었다. 순성길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지인이 걷기를 제안했다. 이 순성길을 하루에 도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틀에 나눠서 걷기로 했다. 나 같은 약골에게는 이틀 만에 순성길을 도는 것도 매우 벅찬 일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 · 흥인지문 · 숭례문 · 돈의문이며 4소문은 서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 · 혜화문 · 광희문 · 소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서울특별시 한양도성 웹사이트 https://seoulcitywall.seoul.go.kr/wallcourse.do)
한양도성 웹사이트에서는 이 순성길을 여섯 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하고 있다. 웹사이트에는 이 구간들의 걷기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남산구간은 ‘중’, 낙산구간은 ‘하’, 인왕구간은 ‘상’, 백악구간은 ‘상’이다.
잘 걷는 사람들은 약 9시간에 걸쳐서 총길이 27킬로미터 정도의 순성길을 걷기도 한다. 순성길을 하루에 걸었던 어떤 분이 밝힌 걷기 코스는 이렇다.
숭례문 - 돈의문 - 종로문화체육센터 - 인왕산 - 인왕산석굴암 - 윤동주 시인기념관 - 창의문 - 북악산 - 숙정문 - 말바위 안내소 - 와룡공원 - 혜화문 - 낙산공원 - 한양도성 박물관 - 흥인지문 - 광희문 - 장충체육관 - 남산 - 숭례문
서울을 한 바퀴 돈다는 계획을 앞두고 나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나는 이것이 진심으로 서울을 향한 순례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첫날에는 남산구간과 낙산구간, 둘째 날에는 인왕구간과 백악구간을 걸었다.
첫날 걷기는 숭례문 앞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걸었던 구간은 다음과 같다.
남산(목멱산) 구간: 숭례문 - 남산백 범광장 - 남산N타워 - 목멱산봉수대터 - 국립극장 - 장충체육관 - 장충단공원 (동국대 앞)
낙산 구간: 광희문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흥인지문 - 낙산공원 - 혜화문
남산구간을 돌고 나서 장충동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어서 낙산구간으로 갔으니, 나로서는 하루에 두 산의 정상에 오른 것은 생애 처음이었다. 이날 저녁 걷기 앱을 보니 2만 7천 보를 넘겼다. 이번 서울 여행에서 최고 기록이었다.
얼마 전에 혜화동 벽화마을에 갔을 때 미처 가보지 못한 낙산성벽길을 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첫날 걷기 이후 매우 힘들었으므로 나는 다음날 과연 나머지 두 구간을 갈 수 있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두 구간은 난이도가 모두 최고이므로 누가 봐도 더욱 힘들기 때문이었다.
한국여행을 올 때 나는 운동화 두 켤레를 가지고 왔었다. 순성길에 도전하기 전날, 나는 동대문신발도매시장으로 가서 산행을 위한 신발을 샀다. 내가 가진 평범한 운동화로는 네 개의 산에 오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새 신이라서 그런지 첫날 순성길을 돈 후에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조금 아팠다.
3.
둘째 날, 인왕산 구간과 백악 구간은 한양 북쪽 도성길이다. 이날 걸었던 경로는 이랬다.
인왕산구간: 서대문역 - 돈의문(서대문)터 - 인왕산 소소책방 - 인왕산 정상 - 점심 - 창의문
백악구간: 창의문 - 백악마루 - 1.21사태소나무 - 청운대 - 숙정문 (북대문) - 와룡공원 - 한양도성전시안내센터(한양도성 순성 완료 스탬프 인증서) - 혜화문
말로만 듣던 인왕산 정상에 올랐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남산과 낙산 정상에 올랐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인왕산은 다른 산에 비해 매우 인기 있는 등산로였다. 인왕산 등산로에는 해외에서 온 여행객들과 젊은 여성들도 많이 보였다.
서울에 이렇게 등산 친화적인 여러 산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계 유명 대도시 가운데 어느 곳에 이렇게 오르기 쉬운 적당한 높이의 산들이 많은 곳이 있을까. 오직 서울 뿐일 듯싶다.
인왕산 정상에 오를 때만 해도 비록 힘들지만 나는 비교적 가볍고 즐겁게 올라갔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치 유원지에 온 느낌이었다. 인왕산 정상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길게 줄을 서 있을 지경이었다.
인왕산에서 내려와서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북악산에 오르려고 생각하니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다. 듣기로는 북악산 오르기가 더 힘들다고 하는데 어떻게 오를까 걱정이 앞섰다. 전날 남산과 낙산에 다녀온 후과로 인해 이미 종아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백악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북악산은 경복궁과 청와대 뒤에 있는 산이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에 갈 때마다 볼 수밖에 없는 산이다. 북악산 주봉인 청운봉의 높이는 342미터.
1.21 무장공비 사태 이후 북악구간은 일반인들의 탐방이 제한되었다가 2007년에야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정상에 오르려면 신분확인이 요구되다가, 2019년부터는 일부 군사시설을 제외한 모든 구간이 점차적으로 개방되었다.
청운봉으로 올라가는 매우 가파른 계단은 최근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경사가 극심한 그 계단을 나는 헉헉거리면서 겨우 올라갔다. 그 철제 계단이 설치되기 전에 사람들, 특히 경비하던 군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다녔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높은 산에 근무하는 군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특히 강원도의 험산준령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4.
사실 한양도성순성길을 순례하기 일주일 정도 앞서서 나는 한양도성박물관을 방문했었다. 한양도성박물관이 있었는지, 어디에 있는지 등을 미리 알고 갔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혜화동으로 걸어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흥인지문(동대문)에서 혜화동 방향으로 진입하면 율곡로 오른쪽에 흥인지문 공원이 언덕 위로 보인다. 그곳에 가면 곧바로 한양도성박물관으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뜻밖에 들르게 된 그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니 한양도성에 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자료들을 보니까, 육백여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한양도성을 쌓는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도성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마침 순성길을 따라갈 기회가 생겼다. 한양도성순성길을 직접 걸은 것은 이번 한국여행에서 길이 기억할 수 있을 만한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서울 도성을 잇는 네 개의 산 정상을 이틀 만에 등반했다고.
사실, 완전히 성곽길을 따라서 돌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틀 연속 산으로만 다니면서 매일 2만 7천 보 정도 걸었으니까 나 같은 약골에게는 대단한 기록이었다. 이틀이 아니라 나흘로 나눠서 한다 해도 괜찮으니까 누구에게라도 꼭 권하고 싶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