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 여행 이야기 14
1.
9월 말 가을장마가 계속되면서 온종일 흐리고 비가 내린 날,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내가 동주에게 만나고 싶다고 텍스트 메시지를 보냈을 때 모든 일을 강한 추진력을 가지고 시원시원하게 처리하는 그는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만날 친구들을 모아서 단톡방을 만들었다. 그는 그 방으로 종필과 호원을 불러들였으며, 어디에서 언제 만날까 논의를 시작했다.
이들과는 작년에도 양재동에서 두 차례 만나서 식사를 한 바 있다. 그때는 동주가 혼자서 조사한 후에 식당 네 곳을 후보라고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했었다. 사실 동주가 그냥 정해도 되는데 그는 친구들에게 선택권을 주면서 함께 논의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번에도 동주는 선뜻 자신이 결정하지 않고 친구들에게 식당과 시간을 소개하라고 말했다. 강남역 숙소 주변에, 내가 보기에는 좋은 식당들이 있어서, 나는 그중 하나를 추천했다. 밖에서 오가면서 볼 때 맛있어 보이는 냉삼겹살 식당이 있는데 혼자서 들어가기 어려워서 한 번도 못 들어갔던 곳이다. 친구들이 온다면 기꺼이 들어가서 먹고 마시기에 좋은 곳일 것 같았다. 그러나 장소가 강남역 근처이고 주차도 쉽지 않아서 주로 서울시 남쪽 외곽 경기도에 사는 친구들은 선뜻 강남으로 오고 싶지 않은 듯했다.
호원과 동주가 딱히 동의도 추천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때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는 종필이 갑자기 나섰다. 자신이 농장에서 키우는 오골계로 백숙을 해줄 테니까 농장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평생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고 나서 은퇴했고 이후에 다시 공원 관리인(?)이 되어서 일하고 있다는 그의 근황을 나는 재작년에 그를 만났을 때 들은 바 있다. 종필이 현재 말하는 농장이 그때 말했던 농장과 여전히 같은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농사를 좋아하고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식당으로 가서 먹으면 간편할 텐데 굳이 농장에서 식사하자는 종필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지만 그는 꽤 강하게 농장에서 만나기를 원하는 듯했다. 우리는 모두 종필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종필은 우리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면서 일하는 농장을 보여 주고 자신이 키우는 오골계로 백숙을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2.
늦은 오후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 일기예보를 보니 하필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나처럼 여행 온 사람에게 비가 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매일 계획을 세워서 나가려고 하지만 굳이 비를 맞으면서 다니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다닐 만큼 급한 것도 없었다. 판교역에서 오후 5시에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그전에 다른 곳을 다녀오기에도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지 않을 듯했다.
대도시인 서울에서는 대체로 어디를 가든 기본적으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것은 기본이다. 서울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가노라면 그보다 오래 걸린다. 서울에 온 후 나는 이따금 버스를 탈 때도 있지만 대체로 지하철을 애용하는데, 이렇게 대중교통으로 다니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날 나는 숙소에서 쉬면서 회계를 정리하다가 친구들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창밖을 보니까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 가득 먹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아무 때고 비가 내릴 것처럼 보였지만 아침부터 내린다는 비는 한낮이 될 때까지 내리지 않았다. 이렇게 일기예보가 맞지 않을 때마다 사람들은 기상예보 기관에 불평을 쏟아내곤 하지만 고층건물과 산이 많은 서울의 날씨는 국지적으로 차이가 발생하기 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정도로 불평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오후 들어 드디어 비가 내렸다. 나의 숙소는 8층에 있어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창문으로로 거리를 내다보면 바깥 상황을 알 수 있다. 행인들이 우산을 쓰고 걷고 있었다. 온종일 방에 있다가 나는 드디어 시간에 맞춰 우산을 쓰고 지하철 역으로 갔다.
판교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역에서 바깥으로 나왔을 때 비가 더욱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하필 친구들을 만나는 날인데 비가 이렇게 내리다니. 그것도 농장에 간다는데.
농장으로 바로 갈 수 없었으므로 종필이 동주와 나를 픽업하기로 했다. 많은 행인이 오가는 거리에 종필의 자동차가 있었다. 퇴근시간에 비까지 내려서 거리는 매우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호원은 자기 자동차를 타고 곧바로 농장으로 올 것이라고 종필이 말했다.
내가 판교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당처럼 신흥 부촌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까 매우 번화한 신도시 거리라서 약간 낯설었다. 사실 신도시 풍경은 모두 비슷해 보인다. 언뜻 건물들과 거리 풍경만 보면 그곳이 판교가 아니라 분당이나 하남이나 송도라고 해도 나는 믿을 판이었다. 신도시의 지하철역에서 거리로 나가면 으레 매우 넓은 차도가 있고 고층빌딩들이 즐비했으며 그 건물들의 3,4층까지 수많은 가게나 오피스들의 간판이 보인다. 높은 건물에 병원과 식당 등 간판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거의 모두 판박이 분위기다.
비가 와서 점점 어둑해지는 낯선 거리를 종필은 동주와 대화하면서 빠르게 지나갔다. 동주는 자동차가 잘 나간다고 말했고, 종필은 아는 이로부터 중고차를 싼 가격으로 샀는데 고장도 없다고 말했다. 한국 차종이나 가격을 잘 모르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종필은 농장으로 가는 길에 그의 부인을 픽업해야 한다고 했다.
비가 계속 내려서 바깥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종필은 익숙한 거리를 빠르게 달렸고 곧 그의 부인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동주가 이미 조수석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종필의 아내는 뒷좌석에 있는 내 옆에 앉았다. 친구들 가운데 처음으로 배우자를 보는 상황이라서 나는 약간 당황했는데,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어색해서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붙임성 좋은 동주는 거의 아무 거리낌 없이 종필의 아내에게도 말을 잘 붙였다. 이미 종필로부터 들었는지 그녀는 동주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나는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간의 흥분과 기대를 안고 우리는 어둠이 내려앉는 어느 거리를 지나 종필의 농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