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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마력 2

걷거나 타거나 (6)

by memory 최호인

2.


4학년 가을 학기가 시작된 후 얼마 안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동네 골목길에 축구공이라는 게 불쑥 등장했다. 그 공이 나타나면서 우리 동네 골목의 놀이 문화에 일대 변혁이 발생했다. 나는 그것이 축구의 마력이었다고 되새기곤 한다.


그 사태는 우리 동네에 나보다 한 살 많은 상윤이라는 아이가 이사 온 데서 시작됐다. 이사 온 날 오후에 그는 동네 골목에서 노느라고 모여 있던 우리 앞으로 어색한 표정으로 쭈볏쭈볏 다가왔다. 그는 대방교회 맞은편 집에 이사 왔다고 하면서 우리와 같이 놀고 싶다고 말했다. 맨날 뛰어노느라 날씬했던 우리에 비해 그는 약간 뚱뚱했으며, 나보다 나이가 하나 위인데도 키는 나보다 약간 작았다. 우리는 별 거리낌 없이 그를 우리 동네 친구로 받아들였고, 그는 금세 우리와 잘 어울렸다.


오후에 밖으로 나올 때 그는 이따금 맛있는 과자를 손에 들고 나와서 우리의 침샘을 자극했다. 자존심은 좀 상했지만 과자가 먹고 싶어서 불쌍한 눈길로 바라보면 그는 큰 선심을 쓰듯이 우리에게 조금씩 나눠주기도 했다. 특히 추석 무렵이 되었을 때 그는 우리 주먹 두 개 정도는 되어 보이는 빨간 사과를 딱 한 개만 들고 나와서, 한입 크게 베어 물면서 “이 사과 정말 맛있다.”라고 자랑했다.


우리는 대체로 애써 못 본 척하곤 했지만, 때로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좀 치사한 느낌은 들었지만 이내 자존심을 접고 “나 한 입만”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를 따라가면서 “한 입만”이라고 여러 번 조르면 그는 선심 쓰듯이 겨우 딱 한 입씩만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워낙에 아이들이 여럿이고, 입을 크게 벌려서 먹었으므로 큰 사과는 가운데 씨앗 부분과 양옆에 손가락으로 잡았던 부분만 남고 금세 사라졌다. 그러면 그는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져서 다시는 한 입도 안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후에도 여전히 크고 빨간 사과를 들고 나오곤 했던 그가 어느 날 느닷없이 축구공을 들고 나왔다. 그는 새 축구공을 땅에다 탁탁 튀기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놀란 눈으로 그의 앞으로 몰려들어서 말했다.

“와 축구공이다.”

“새 거네.”

우리는 축구공을 만져보고 싶어서 그의 앞에 뺑 둘러섰다.

“축구공은 그렇게 손으로 튀기는 게 아니야. 발로 차는 거지.”

정수 형이 그렇게 말하면서 상윤이 손에 들고 있던 공을 탁 쳐냈고, 순간적으로 공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상윤이 공을 잡으려고 뛰기도 전에 정수 형은 먼저 가서 공을 발로 찼으며 우리는 모두 공을 향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 동네 골목에 드디어 축구의 시대가 개막됐다.


남자애들 가운데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축구를 매우 좋아했고, 4학년 때는 우리 반의 축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우리 동네에서는 아무도 축구공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축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잘 사는 집으로 이사 온 상윤이 우리 앞에 축구공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축구는 아주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는 그때까지 흙 위에서 즐기던 놀이들을 금세 잊어버리고 축구에 빠져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과거에 비해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축구를 능가할 스포츠는 그때나 지금이나 없어 보인다. 농구나 야구가 축구의 자리를 탐냈지만, 결국 축구를 따라오지 못했다. 구기 종목에서 축구의 인기를 능가할 스포츠는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


축구공이 생긴 후 우리가 노는 방식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상윤이 축구공을 들고 나오면, 우리는 땅에서 하던 여러 놀이를 중지하고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공이 없거나 공이 터졌을 때 또는 축구를 하다가 지치고 지루해졌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공을 한 곳에 둔 채 땅에서 놀던 놀이로 돌아갔다. 그것은 어찌 보면, 우리가 땅에서 하던 놀이들에 대한 일종의 배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축구 역시 우리가 다양한 놀이를 하던 같은 땅 위에서 하는 것이었으므로, 사실은 첫사랑을 배반한 것처럼 미안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실은 그 땅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래도 왠지 사과해야 할 것 같다.

순박했던 예전의 놀이들아, 미안하다!



3.


축구를 할 때는 골대가 필요하다.

때때로 길 가운데다 돌멩이 두 개를 놓고 골대로 삼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주로 대방교회 정문과 우리 집 맞은편에 있는 부잣집의 차고 문을 골대로 삼았다. 길 중앙에 돌멩이 두 개를 놓고 골대로 삼으면 공을 직선으로 찰 수 있어서 좋겠지만, 공이 골대 뒤로 한참 굴러갈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공을 주워 오려고 뛰어다니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게다가 공이 돌멩이 위 또는 바로 옆으로 지나가도 우리는 그것 가지고 싸울 때도 있다. “골인”이니 “노골”이니 하면서 말이다. 공은 이미 빠르게 지나갔는데 그 진실을 누가 알겠는가. 때로는 목소리 큰 놈이 맞는 것 같기도 했지만, 서로 자기가 제대로 보았다고 우기면 승패의 공정성은 이미 깨지곤 했다.


교회 대문이나 차고 문을 골대로 삼으면, 그런 싸움이 벌어질 일이 없다. 두 개의 문은 크기가 다르긴 했지만 모양새가 명확했고, 무엇보다 골인하면 철문에 공이 닿으면서 큰 소리를 냈다. 슛을 했는데 공이 벽을 맞고 나오면 게임은 그냥 진행되었고 코너킥 같은 것은 없었다. 무조건 상대방 골문에 공을 차 넣어서 공이 철문에 쾅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 골인으로 인정되었다.


골대를 선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가끔 골대를 바꿔야 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지만 우리가 줄기차게 교회 대문과 차고 문을 골대로 삼은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집 대문을 골대로 삼으려고 해도 골대에 적합한 문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철문이 아니면 안 되고, 문이 열려 있어도 안 되고 집주인이 사나운 사람이어도 안 되었다. 아이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어른은 우리가 문에다 볼을 차면 금세 시끄럽다고 나와서 우리를 야단치곤 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정해진 골대가 교회 정문과 차고 문이다.


크라운맥주 회사의 부사장이 살았다는 그 집의 차고는 다행스럽게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 듯했다. 차고가 있었던 그 큰 집에 내 또래 아이는 없었고, 그 집에서는 거의 아무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가끔 그 집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낮에 가정부 같은 아줌마가 시장에 다녀오느라 노란 시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나오곤 했으므로 그 집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 집 앞에서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거나 너무 요란하게 대문에다 공을 차면, 역시 그 아줌마가 나와서 우리에게 좀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만 입을 다물고 잠시 골대를 다른 곳으로 바꾸고 놀았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다시 그 차고 문을 골대로 삼아 공을 찼는데, 그렇다고 그 아줌마가 자주 나와서 우리를 괴롭힌 것은 아니다. 그 집은 대체로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집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관대했다.


대방교회에는 사찰이라고 부르는 건물 관리인이 있는데, 그분도 가끔 밖으로 나와서 우리에게 교회 대문에다 공을 차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마음이 너그러운 편이어서, 어쩌다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실제로는 우리가 교회 대문을 골대로 삼는 것을 심하게 막지 않았다. 양쪽으로 여는 철제 대문을 닫아 두어도 오른쪽 대문에 작은 쪽문이 있어서, 주중에 예배 시간이 아닐 때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그 쪽문으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페널티킥을 연습할 때 교회 대문은 다소 넓었으므로 우리는 주로 차고 문으로 가서 공을 찼다.


우리는 가끔 강남중학교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 운동장은 너무 넓어서 우리가 뛰어다니기에 벅찼고 골대도 너무 넓었다. 때때로 우리는 윗동네 아이들과 축구 시합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체전이라서 동네별로 단결력과 조직력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는 크기가 작고 동네 아이들을 모두 모아봤자 일곱 내지 여덟 명 정도에 불과했다. 남자애들만 그렇다는 말이다. 여자애들은 몇 안 됐고 그들은 어쩌다 밖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얌전히 앉아서 떠들기만 했지 우리와는 함께 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동네는 다른 동네에 비해 숫자에서나 힘에서나 실력에서나 언제나 열세였다.


우리 동네 여자애들에 관해서 조금 더 말하자면, 정수 형의 동생과 우리 옆집에 사는 아이는 나와 같은 나이였다. 걔들은 이따금 집 앞에 서서 소곤거렸을 뿐 우리처럼 뛰어다니면서 노는 법이 없었다. 정수 형과 같은 나이인 나의 셋째 누나는 밖에 나가서 놀지 않았다. 우리 옆집에 사는 누나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누나는 아마 나보다 네 살인가 위였던 듯하다. 조금 예뻐 보였던 완수의 누나도 나보다 두세 살 위였을 텐데 우리 동네 골목으로 나와서 노는 일은 없었다.


하여간 우리는 여자애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우리와 놀지 않았다고 말해도 마찬가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조금 답답한 일이지만, 유교적 전통이 깊었던, 극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주의적인 당시의 사회상이었다. 아마 법적으로 또는 교육적으로 남녀평등이 표명되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에게도 남녀차별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린 남녀 학생이 길거리에서 만나고 데이트하는 것은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문화적 억압을 무시한 채 남녀 학생이 거리에서 만나거나 데이트를 하면 흔히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혔다. 그래서 운이 나쁘면, 정기적으로 단속을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걸리고 처벌까지 받았다. 미풍양속에 맞지 않는 짓이었고, 학생의 본분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까닭이었다.


“어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길거리에서 시시덕대고 있어.”


대가리에 피가 마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우리는 거리에서나 학교에서 그런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거리에서 남녀 학생이 데이트를 하거나 다정하게 대화하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혼날 가능성이 있어도 아이들은 특히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본능적으로 이성친구를 찾기 마련이고, 가끔은 길거리에서 만나고 데이트하는 모험을 하기도 한다.


어른들은 사춘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항상 학생의 본분이 공부일 뿐 데이트가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실제로는 공부가 아니라 다른 일을 곧잘 시켰다. 딸들은 엄마를 도와서 집안일을 해야 했고, 아들들은 아버지를 도와서 힘든 일을 하거나 돈 버는 일을 해야 하기도 했다. 아무튼 어른과 아이 사이의 상하 관계는 매우 엄격했고, 남녀 간에는 매우 차별적이고 역할 제한적인 사고가 지배하던 사회였다.


그래서 남녀 학생이 바깥에서 데이트할 때는 주로 빵집이나 분식집 안에서 했고 공개적으로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길거리에서 남녀 학생이 어울리는 것은 ‘날라리’나 하는 짓인 것처럼 지탄을 받았다. (그런 지탄을 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는 교회 같은 종교단체나 YMCA 같은 사회단체였는데, 거기에 대한 나의 경험은 나중에 말하게 될 것이다.)


하여간 그 당시 우리는 그렇게 축구를 좋아했고,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후 내내 바깥으로 나가서 뛰어놀았다. 요즘 아이들이 의상과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축구나 야구를 하느라고 인공적으로 꾸며진 근사한 운동장으로 가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어릴 때 동네 흙길에서 우리끼리 대충 뛰어놀면서 했던 것을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과 코치를 두고 시간을 정해서 돈을 내고 배우면서 한다. 그것도 종종 부모들이 축구장이나 야구장까지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지루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다. 하긴 그렇게 돈을 들여서 하니까, 요즘 아이들 가운데 종종 특출 나게 뛰어난 아이도 나오는 법이다. 그것이 별로 부럽지는 않지만.



4.


10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어릴 적 교회 친구와 함께 대방동 골목에 가보았다.

깊은 감회 속에 무려 20여 년만에.


낡은 대방교회에 들어가 보고, 우리 집과 친구들이 살던 집들이 있던 골목을 둘러보았다. 강남중학교와 대방초등학교와 성남고등학교에도 가보았다. 우리가 어릴 때 가끔 갔던 ‘대성관’이라는 중국집에도 일부러 찾아가서 예전에 먹었던 맛을 생각하면서 짬뽕과 자장면을 먹었다. 그 집은 역사가 매우 길어서 TV 프로그램에도 나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릴 때 먹었던 자장면 맛은 나지 않는 듯했다. 아니, 사실은 우리가 이미 많이 변해서, 어릴 때 먹었던 자장면 맛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거나 우리 입맛이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우리가 축구를 하면서 뛰어놀던 동네 골목은 매우 좁아 보였으며, 더 이상 흙길이 아니었다. 시멘트로 덮인 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 있었으므로 골목길은 더욱 좁아 보였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축구를 했나 의심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예전에 골목길 옆에 있었던 낮은 집들은 모두 사라지고 적어도 3층 높이의 건물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아예 옛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도 많은데, 대방교회가 있는 골목이 여전히 건재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우리가 자랄 때는 단층 주택들만 많았기 때문에 도로가 더 넓어 보였을 것이다. 하여간 맹세컨데, 내가 어렸을 때 그 골목길은 여러 아이들이 온종일 뛰어놀고 축구를 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넓었으며 자동차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온종일 그 흙길 위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놀아도 아무도 우리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따금 우리가 찬 공이 담을 넘어 남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서슴없이 그 집 문을 열고 들어가서 공을 가지고 나왔다. 문이 잠겨 있으면 열어달라고 소리쳐서 공을 받았다. 공이 자기 집으로 넘어왔다고 해서 우리를 크게 야단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으레 그렇게 노는 법이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온종일 놀다가 해지는 저녁이 되면 이 집 저 집에서 담 밖으로 밥과 찌개 냄새가 풍겨 나오고, 이윽고 저녁 식사를 준비한 엄마들이 집 앞으로 나와서 크게 외쳤다.

“00야, 들어와라. 밥 먹어야지”

훈이 형 할머니가 먼저 나와서 뒷짐을 진 채 크게 소리쳤고, 이어서 명이 엄마도 나와서 입에 두 손을 모아서 명이를 크게 불렀다. 한 엄마가 그렇게 외치면 다른 엄마도 곧 나와서 거의 똑같이 외쳤다.

"00야, 들어와서 밥 먹어야지."

골목에 땅거미가 짙어지고, 같이 뛰어놀던 친구들이 엄마의 부름에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그날 우리의 놀이가 마감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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