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7)
1.
대방동에는 작은 언덕이 많다.
우리 동네는 여의대방로에서 강남중학교 옆에 있는 아주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첫 번째 왼쪽 골목에 있었다. 강남중학교 정문 옆에 있는 도로에는 길지만 높지 않은 학교 담장이 서 있었다. 그 언덕 정상에 접어들면 강남중학교 담장은 곧바로 더 높은 서울공업고등학교 담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서울공고의 정문은 여의대방로에서는 강남중학교 남쪽에 있지만, 학교가 워낙에 크기 때문에 강남중학교 뒤쪽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언덕을 내려가서 서울공고의 담장이 끝나는 곳에 있는 작은 도로를 건너면, 거기서 다시 경사가 심하지 않은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예전에는 서울공고 뒤편으로 아주 작은 하천이 있었다. 그 하천의 둑은 어린 나에게 매우 높아 보였다. 깨끗한 물이 아니라 오수가 흐르고 있었으므로 나는 한 번도 그곳으로 내려가서 물장난을 친 적이 없다. 하천에서 냄새가 나고 길을 가다가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인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하천 위에 포장도로가 깔렸다. 그 바람에 그 길이 갑자기 매우 넓어졌다. 서울공고 담길을 지나 오르막길을 계속 따라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 가파른 오름길이 성남고등학교 뒷산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그 언덕 동네에는 유명 배우 최은희가 사는 집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최은희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최은희는 1960년대에 한국에서 최고의 여배우였다. 한국전쟁 직후 유명 영화감독인 신상옥과 재혼해서 유명해진 그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녀가 두 번째로 납북당했던 사건이었다.
최은희는 한국전쟁 당시 이미 한 차례 납북됐었다. 그러나 남으로 내려왔던 그녀는 1978년에 홍콩에서 두 번째로 납북된 것이다. 그녀를 찾아서 홍콩으로 갔던 신상옥 감독까지 납북되어서, 그 사건은 국제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납북된 후, 그녀는 북한에서 영화 활동을 하다가, 1986년에 오스트리아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불사조처럼 남쪽으로 돌아왔다.
어린 나는 최은희라는 배우의 이름만 들었지, 정작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본 기억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얼마나 유명한 배우인지 알지 못했다. 하여간 최은희 집이 아니라 해도, 언덕 위에 있는 그 동네에는 부유한 집들이 많았다. 부유한 집은 담과 대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때만 해도 담을 넘어 집으로 들어오는 좀도둑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좀도둑을 거론해서 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좀도둑이 많았다. 그들은 주로 빈집털이를 노렸지만, 밤에 집안사람들이 자는 동안 침입할 때도 많았다. 자정 이후에는 통행금지라는 게 있었고, 그때는 길거리에 아무도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도둑이 다니기 편했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도 도둑이 들었던 적이 있다.
어느 여름날 한밤중에 도둑이 들었는데, 아버지께서 도둑이 마루 문을 여는 것을 들으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평소에 안방에 준비해 두었던 몽둥이를 들고 소리를 치면서 거실로 나가셨다. 도둑은 아버지께서 문을 열면서 “도둑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놀라서 잽싸게 바깥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간밤에 그런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린 나는 자느라고 그런 소동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얘들아 알았지? 도둑은 잡는 게 아니야. 그냥 소리 질러서 쫓아내는 게 상책이야. 아버지가 몽둥이로 그놈을 때려잡으려다가 그냥 쫓아버렸다.”
아버지는 매우 장한 일을 하신 얼굴 표정과 목소리로 우리에게 간밤의 무용담을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실제로 몽둥이를 들고 맨발로 대문 앞까지 뛰어나가셨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당시 아버지의 패기라면 능히 도둑놈을 몽둥이로 때려잡을만한 위인이셨다. 도둑이 운이 좋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일찍이 십 대 소년이었을 때 만주까지 가서 사업을 하셨던 분이고, 살면서 산전수전 많이 겪으신 분이다.
“아버지, 다음에는 그렇게 쫓아가지 마세요. 그러다가 도둑이랑 싸움 나서 다치면 어떻게 해요?”
“그래요. 그깟 도둑놈을 때려잡아서 뭐에다 써요. 감옥에서 나오면 또 도둑질할 텐데.”
“뭐 훔쳐간 건 없죠? 아버지가 안 다치신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에요.”
어머니와 누나들은 아침 밥상 앞에서, 아버지의 다소 엉뚱하게 들리는 무용담을 들으면서, 약간 겁먹은 얼굴 표정을 지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을 먹고 난 후, 우리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없어졌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필 그것이 거실 마루 입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라디오는 어머니께서 거실 마루 앞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빨래를 할 때마다 틀어놓고 음악을 듣곤 하던 물건이었으므로, 어머니께서 가장 아쉬워하셨다.
2.
우리 집은 당시로서는 좀 넓은 편이었다.
서향인 대문으로 들어서면 큰 앞마당이 있었고, 예쁜 현관문과 마당을 내다보는 현관방이 있었다. 현관방 오른편으로 돌아서 들어가면 남쪽으로 난 거실 마루 앞에도 마당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옆 마당’이라고 불렀던 그곳에는 언제나 물이 풍부한 우물도 있었다. 우리는 우물물을 식수로 사용하지는 않고 주로 몸을 씻을 때 이용했다. 여름에는 특히 수돗물을 아끼기 위해서 주로 우물에서 물을 퍼서 세수를 하고 몸을 씻었다. 우물물은 신기하게도 여름에는 수돗물보다 더 시원했고 겨울에는 더 따뜻했다.
우리는 집으로 들어갈 때 처음에는 현관문으로 다니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대문과 마주 보고 있는 현관으로 다니지 않고 옆마당으로 와서 마루로 들어가곤 했다. 그쪽이 남향이고, 전체적으로 집의 기본 구조를 남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다니게 된 것이다. 거실 마루에는 전면이 모두 격자형인 유리문들이 있었고, 그 앞에 수돗가와 우물, 그리고 그 옆에 텃밭이 있었다.
우리 집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지어 살던 기와집이었다. 그러니까 적산가옥이었던 그 집은 우리가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매우 넓고 아름답고 깨끗했다. 안방은 일본식 다다미방이었고, 방마다 있었던 창문들은 격자형 유리들로 꾸며져 있었다. 앞마당에는 과실수들과 화단, 그리고 작은 연못이 있었고, 옆마당에는 수도와 우물과 텃밭도 있었다. 푸른 철제 대문 옆 담장 아랫부분은 진한 빛깔의 화강암으로 꾸며져서 매끄럽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그 집은 갑자기 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재정적으로 궁핍해진 아버지는 고심 끝에 넓은 마당에다 집을 만들어서 세를 주기로 결심하셨다. 처음에는 옆마당 우물 옆에다 부엌과 방 하나를 만들어서 세를 주었다. 얼마 후에는 대문 옆에도 부엌 딸린 방을 또 만들어서 세를 주었다. 그리하여 과실수와 꽃밭이 있었던 앞마당은 거의 사라졌고, 아름다웠던 집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거의 망가진 듯했다.
옆마당 셋집에는 부부와 어린 남자아이 한 명, 앞마당 셋집에는 부부와 아들 하나 딸 하나인 가족이 들어와서 살았다. 두 셋집에는 사람들이 종종 이사 나가고 또 이사 들어오곤 했다. 그래도 두 집 합해서 여섯 명 정도는 꾸준히 살았다. 그 결과, 우리 집에는 우리 가족 일곱 명까지 합해서 총 열세 명 정도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집은 말 그대로 ‘한 지붕 세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세 가족은 대문만 같이 사용한 것이지, 하나의 지붕 아래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세를 주었던 집들은 모두 슬레이트 지붕 아래 허술한 벽돌로 지은 집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집에 살았으므로 대문은 노상 열려 있기 마련이었다. 누군가는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늦은 밤에도 대문은 굳게 잠겨 있을 날이 없었다.
그날 밤, 도둑이 우리 집으로 들어온 것은 밤에 대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둑은 담을 넘을 필요도 없이 열린 대문으로 아주 쉽게 우리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셋집 사람들에게 밤에는 문을 꼭 잠그고 다니라고 말했지만,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오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누가 가장 늦게 들어오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사실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집이 적어도 낮에는 대문을 열어놓고 살았다. 낮에도 문을 잠그고 사는 집이 있기는 했지만 어린아이들이 동네 골목에서 뛰어노는 집에서는 그렇게 문을 잠그고 살기가 쉽지 않았다. 나만 해도 골목에서 놀다가도 수시로 집안을 오가는 마당에, 대문이 잠겨 있으면 매우 불편할 것이었다. 목이 마르거나 급히 오줌이라도 마려우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물론 그때는 이미 대문에 벨을 달아서, 벨을 누르면 집안에 있는 사람과 스피커를 통해서 대화하고 전기 신호로 문을 열어주는 시설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다른 마을로 가서 낯선 대문의 벨을 누르고 누군가 대답하면 도망 다니는 장난을 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우리 집처럼 넓고 분산적이고, 세 가족이 사는 집에다 그런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올 때도 대문은 늘 열려 있었다. 친구들은 대문을 거쳐 서슴없이 옆마당까지 들어와서 거실 마루 앞에서 나를 부르곤 했으니까. 내가 친구들 집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집의 문은 거의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앞집에 사는 친구를 찾으러 갔다가 자고 있는 친구를 깨우기 위해서 방안까지 들어갈 때도 있었다.
당시에 시골에는 대문이랄 게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지만, 서울 변두리에 있는 우리 동네 같은 곳에서도 아직 대문을 잠그지 않고도 사는 시대였고, 이웃과는 아무 때나 서로 마당을 오가면서 소통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가끔 깡통을 들고 다니면서 “한 푼 줍쇼” 하는 거지가 마당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고, 종이나 헌 옷을 수거하는 넝마주이 또는 재건대가 들어오기도 했다. 다만 그들도 일종의 예절이나 공중도덕이란 게 있어서, 웬만해서는 마당까지만 들어왔지, 감히 방문까지 열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거의 없었다. 그때부터는 명백히 주거 침입이라고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당시 일종의 묵시적인 사회적 합의와 같았다.
대문 밖은 아무나 소통하는 개방된 공용 공간이고, 마당은 이웃과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었으며, 방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만 소통하는 내부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주거침입은 대문을 들어서면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마당은 모르는 타인의 침입도 허용되는 일종의 열린 공간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문을 잠그지 않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존재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