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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세 가족 2

걷거나 타거나 (8)

by memory 최호인

3.


부유한 집들은 우리 집처럼 여러 가족이 살지 않았다. 으리으리하고 튼튼한 대문은 항상 잠겨 있었으며, 담도 매우 높아서 웬만한 성인은 사다리라도 놓지 않고서는 넘을 수 없었다. 아니, 사다리를 사용해도 담을 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둑이 감히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잣집들은 담 위에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을 박아놓거나 끝이 날카로운 쇠창살을 세우고 철조망을 감아놓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만큼 도둑이 많았던 시대였다.


부잣집이 많았던 그 언덕 동네에는 가파른 비탈을 따라 크고 넓은 집들이 많았다. 우리는 때때로 성남학교 뒷산 정상 너머로 놀러 가기도 했는데, 산 뒤편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에는 새로 짓는 집들이 많았다. 모두 넓은 마당과 큰 집들이었다. 산 정상에 가깝게 새로 짓고 있는 집들에는 아직 아무도 살지 않았지만, 집의 형태는 대충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새집들이 자꾸만 산비탈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괜스레 심술이 났다.


“이러다가 산 정상까지 새집들이 다 올라오는 거 아냐?”

“맞아. 내년에는 정말 여기까지 다 올라올지도 몰라.”

“그럼 성남학교까지 금세 쳐들어오겠네.”

"웃기지 마, 바보야. 학교까지 어떻게 오냐? 나무가 이렇게 많은데."

"나무를 다 잘라내면 되지. 저기도 다 잘랐는데."

"그런가. 그럼 큰일이네. 금세 우리 동네까지 오겠다."


아이들이 그렇게 과장해서 호들갑스럽게 떠들기 시작한 후에 아마 훈이 형이 먼저 그랬을 것이다.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찾아 줍더니 새로 짓는 집을 향해 냅다 집어던졌다. 팔힘이 약해서 그런지 돌멩이는 그 집까지 날아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산 위에서 던졌기 때문에 돌멩이는 집 근처에 떨어져 굴러 내려가더니 담장에 세게 부딪혔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서로 돌멩이를 주워서 그 집을 향해 경쟁적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그 돌멩이들도 그 집 담장을 넘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서로 돌멩이를 찾아서 던지고 있을 때 문득 어떤 아저씨가 집 앞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우리를 향해 고래고래 욕을 하면서 주먹을 허공에 대고 휘저었다. 우리를 잡아서 혼내겠다는 말이었던 듯하다. 그러면서 그는 금방이라도 집 밖으로 나와서 산으로 올라올 듯한 기세였다. 우리는 뜻밖의 사태에 놀라서 즉시 뒤로 내빼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서 우리는 다시는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비록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긴 했지만 남의 집을 향해 돌을 던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무튼 그 언덕 마을에서 최은희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그곳은 정말로 특별한 곳이었다. 가끔 상수도 관이 터졌다고 해서 대방동 거리에 수돗물이 끊기고 물이 나오지 않을 때에도, 그 동네만은 다른 송수관을 가지고 있는 듯 여전히 물이 나오는 곳이었다.


그것은 그 언덕으로 가기 전에 있는 세탁소 집에 살았던 나의 친구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다.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매우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어느 봄날이었을 것이다. 정말로 상수도관이 터져서 공사를 하느라 그랬는지, 대방동 일대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을 때였다. 그날 오후, 나는 우연히 그 친구 집에 들렀는데, 그는 나보고 “마침 잘 왔다.”라고 말하면서 물을 받으러 가야 하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상수도관 터져서 물이 안 나온다고 하는데 어디 가서 물을 받아?”

“잔말 말고 양동이 들고 따라와. 가서 보면 알아.”

“정말 물이 나오는 곳이 있단 말이야?”


나는 그가 준 양동이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언덕 초입 코너에 높은 축대 위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돌계단이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푸른 잔디가 깔려 있었고, 새로 지은 근사한 이층 양옥이 멋있어 보이는 집이었다. 그 집에 우리와 같은 학년의 여학생이 살고 있어서, 가끔 우리끼리 그녀에 관해 떠들곤 하던 집이었다. 잔디밭 한편에 수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실제로 물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양동이를 수도꼭지 밑에 놓고 물을 받기 시작했다. 집이 높은 축대 위에 있었으므로 바깥 풍경이 매우 시원하게 보였다. 특히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가리는 건물이 하나도 없이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어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내 친구는 나에게 그 위쪽 동네에는 특수한 상수도관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원리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내 눈으로 본 이상 그 윗동네가 매우 특별한 곳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2층집 앞에는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가로지르는 작은 도로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 도로의 위와 아래가 서로 다른 상수도관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만약 두 곳이 하나의 상수도관을 사용했다면, 아래쪽에 물이 끊어졌는데 위쪽에 물이 나왔을 리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부촌을 특별하게 생각한다 해도 한 지역에 두 개의 상수도관을 묻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2층집 앞에 있는 작은 도로가 두 지역을 나눈다 해도 그곳은 하나의 언덕 길이었으므로 그런 지역에서 별도의 수도관을 매설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그 언덕 위 부자 동네를 위한 특별한 지하수 공급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땅속으로 관을 뚫고 지하수를 퍼올리고, 그 언덕으로 밀어 올릴 가능성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 우물처럼 그 집에서만 지하수를 퍼올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아랫동네에 수돗물이 끊어졌을 때도 부유한 집들이 많은 윗동네, 또는 적어도 그 집에는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마을의 통장이었던 친구의 아버지는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물을 받을 수 있었던 2층집과도 친해서, 수돗물이 끊어졌던 때마다 그곳에서 물을 받곤 했다.



4.


온종일 돌아다니면서 놀기 바빴던 우리는 최은희가 살고 있을지도 모를 집들을 통과해서 언덕 위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성남학교 뒷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산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높은 곳도 아니었고 나무가 촘촘한 곳도 아니었다. 산 안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었는데, 우리는 자주 다녀서 그 길을 거의 모두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해마다 아카시아 꽃을 따먹고 뛰어놀았다. 나무들이 둘러싸인 곳을 우리의 아지트로 삼았으며, 주로 전쟁놀이를 하느라고 산길을 뛰어다녔다.


성남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적으로 유명했던 김석원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했다. 성남고의 설립자로서 또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그는 대방동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일본군 장교가 되어, 만주사변 때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 공적으로 거액의 상금을 받았다.


1938년에 그는 광산 재벌이었던 원윤수와 함께 원석학원을 창립한 후 성남중학교를 설립했다. 중일전쟁 때 그는 일본군으로서 전쟁 영웅이 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장군이 되어 한국전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956년 그는 예편했으며 드디어 성남고등학교 교장이 되었고, 대한민국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이렇게 간단하게 그의 일생만 훑어봐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대충 이해된다. 그 시대에 일제에 충성하고 출세했던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길을 걸은 것은 아니지만, 김석원은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군과 해방 후 한국군을 한 줄로 잇는 세력의 중요한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친일파가 어떻게 해방 후에도 핵심 권력층의 일부 세력으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행적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가 결합되어 있었던 성남학교는 매우 넓은 곳이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작은 강남중학교에서와 같이 학교를 경비하는 수위가 우리를 발견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우리는 주로 뒷산 아래에 있는 소운동장에서 놀았지만, 성남고의 정문은 뒷산 반대편에 있었고, 수위는 주로 정문에서만 근무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해마다 여름이 되면 우리는 그 학교 뒷산으로 자주 놀러 갔다. 나무가 많아서 더위를 피하기 좋았고, 우리 동네의 평평한 흙길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주었다. 그 산길을 그렇게 뛰어다녔어도 우리 중에 아무도 심하게 다치거나 불행한 사고를 당한 사람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매우 운이 좋았던 일이다. 그런 데서 누군가 넘어져서 심하게 다치거나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했다면,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기도 힘들고 엄마나 아빠를 불러오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5.


그 산에 동굴이 여러 개 있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세 개 정도 되었다. 누가 알려준 것인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그 동굴들이 한국전쟁 시기에 방공용으로 파놓은 것이라고 했다. 한국전쟁 때 미군 비행기들이 실제로 대방동 일대를 폭격했던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만약 폭격이 있었다 해도 누군가 피신하느라고 주민들이 모여 살던 언덕 아랫동네 또는 우리 동네에서 성남학교 뒷산에 있는 동굴까지 가는 것은 꽤 먼 길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공습경보가 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 동굴까지 뛰어와서 피신했는지는 대단히 의문스럽다. 그래도 공포와 궁핍의 시대에 그런 피난시설은 군인들이나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들어졌을 것이고, 공습 시 그곳으로 피하도록 하는 행동지침도 있었을지 모른다.


어린 우리는 늘 동굴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두려움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 동굴들 가운데 가장 작은 동굴은 별로 깊지 않아서 밖에서도 동굴 내부가 보였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다가 만 동굴이던 것으로 보였다. 두 번째 동굴은 입구 부분이 물에 잠겨 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그 동굴 입구 근처에서 내부를 보고자 했지만 물만 보였고 내부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이 발동한 우리는 돌멩이를 동굴 안으로 던졌는데, 돌멩이가 첨벙하면서 물에 빠지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었다. 돌멩이가 빠지는 소리만으로도 물은 제법 깊은 듯해서 우리는 차마 그곳으로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지막 동굴 입구에는 나무로 짠 문이 있었다. 우리는 양옆으로 열 수 있는 문까지 있는 그 동굴이야말로 진짜로 공습 시 사람들이 피신하거나 아니면 누군가 살았던 곳이라고 추측했다. 동굴 내부가 궁금해서 우리는 그 앞까지 여러 번 가보았지만 무서워서 감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들이 이 동굴에도 있었다.

전쟁 때 사람들이 동굴 안으로 대피했다가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동굴과 관련된 그 흔한 이야기 말이다. 사람들이 거기서 죽은 이유는 폭격 때문이 아니라 군인들이 총을 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것은 구한말부터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겪은, 이 좁은 나라에서 동굴이 있는 곳이면 늘 따라다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희한한 것은 동굴로 피신하거나 도망 다닌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양민들이고, 그들을 잡거나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군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그런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전투나 전쟁이 군인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로 양민과 군인들 사이에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도망 다니는 사람들은 으레 무자비하고 살벌한 군인들과 혹한의 추위를 피해 동굴로 들어갔으며, 그들을 수색하던 군인들은 동굴 앞에 이르러 동굴로 들어갔던 것이 아니라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굴 안으로 불어넣었다는 이야기.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양손을 들고 나와서 살아남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런 구제책도 없이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에 맞아 죽었거나, 군인들이 어디선가 이미 죽인 시체들을 동굴 속에 내던졌다는 이야기. 때때로 동굴 속에 있는 시신들은 처형된 형태로 나란히 누워 있거나 서로 굴비처럼 줄에 묶여서 쓰러져 있었다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목격자나 생존자가 있어서 그 악몽 같은 사건을 증언한 것이기도 하고, 일부는 누군가 상상하여 지어냈던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실제보다 과장되고 부풀려진 말일 수도 있고, 지나치게 축소되거나 덮여버린 이야기이기도 했다. 또는 누군가 재미로 만든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누가 알겠는가.

시간이 갈수록 그런 사건의 목격자나 생존자는 자꾸 사라지고, 동굴은 아무 말도 없는데.

그러면서 과거의 역사는 천천히 전설로 변하고 만다.


그 산에서 뛰어다니면서 전쟁놀이에 몰두했던 우리는 동굴에 관한 그런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상상했다. 전쟁놀이를 할 때마다 우리는 허공에 가짜 수류탄을 던지고, 따따따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기관총을 수도 없이 쏘아댔다.


어린 우리는 수류탄이 터져서 사람이 날아가고 기관총 공격에 사람들이 쓰러지는 장면을 수도 없이 상상했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6.25 관련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전투 장면처럼, 우리는 벌떼처럼 밀려드는 중공군을 향해 기관총을 쏘다가 장렬하게 산화하는 국군의 모습을 연상하곤 했다. 어린애들이 맨날 전쟁놀이를 하면서 적군을 죽이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 나라는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전쟁을 겪었거나 그런 대중매체를 자주 보면서 자란 아이들이나 즐기면서 놀 수 있는 문화이자 교육의 산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무고한 양민들까지 죽이고 복수하는 대규모 살상 전쟁인 한국전쟁 영화는 물론이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미군이 치사하고 악랄한 독일군과 싸우는 TV 드라마와 무지몽매한 아메리카 인디언을 죽이는 슬기로운 백인들의 정의로운 총싸움을 그린 드라마를 보고 자랐던 것이다.


동굴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아이들은 으레 동굴의 공포를 부풀려 말하는 법이다.

동굴 안에는 전쟁 때 죽은 자들의 귀신들이 살고 있고, 죽은 자들이 남긴 하얀 뼈다귀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식이다. 죽은 자들의 살은 모두 썩었는데, 그 살이 썩은 자리의 흙은 주변에 비해 색깔이 진하다고 했다. 동굴 앞에서 나는 TV에서 보았던 해골과 뼈다귀들을 상상하면서 그 무서움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어느 날 우리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동굴을 탐사하기로 결심했다. 누군가 나무문을 열고 조금만 들어가서 동굴 안을 보자고 말했는데, 얼떨결에 아무도 거부하지 못하고 모두 가서 보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 아주 느린 걸음으로 동굴 입구에 있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치 거대한 동물의 어두운 아가리처럼 동굴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그 앞에는 무거운 공기와 태풍전야 같은 고요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적막에 압도되어 무서움에 떠는 아이들은 나무문을 붙잡고 겨우 한 발만 들여놓은 채 더 이상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겨우 나무문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이미 동굴 탐사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선두에 선 가장 용기 있는 훈이 형조차 동굴 입구에서 조심조심 열 걸음도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동굴 내부로부터 음습한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동굴은 매우 깊어 보였고 안을 보려고 해도 너무 어두웠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동굴 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사방이 극도로 조용한 가운데 우리들의 숨소리와 발소리만 들렸다. 훈이 형은 양손에 돌멩이를 들고 있었는데, 돌연히 멈춰 서더니 오른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동굴 안으로 던졌다. 돌멩이는 어딘가에 부딪혀서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어마어마한 적막이 갑자기 찾아들었고 우리는 긴장해서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훈이 형은 왼손에 있던 두 번째 돌멩이를 또 동굴 안으로, 이번에는 더 멀리 던졌다. 내부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훈이 형이 갑자기 으윽 하고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홱 돌아섰고, 입구로 냅다 달음질쳤다. 훈이 형 뒤에 있었던 우리들은 까닭도 모른 채 덩달아 소리를 지르면서 훈이 형을 따라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뻔한 이야기지만, 훈이 형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우리는 그저 어두운 동굴이 무서웠을 뿐이었다.


가장 먼저 도망친 훈이 형이 동굴 안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거나 하얀 뼈다귀가 보였다거나 누군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고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했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건 분명히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 동굴에 대한 공포는 가시지 않았고, 동굴에 대한 과장과 허풍은 또다시 아이들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부풀려서 만들어지고 전해졌다.


그 동굴에 가보았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성남학교 뒷산의 어두운 동굴로 횃불을 들고 들어가 보았는데, 30미터 지점부터는 길이 약간 휘어지다가 점점 좁아져서 더 이상 들어가기 어려웠으며 그 부근 바닥에서 하얀 뼈다귀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동굴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모여 앉은 우리는 동굴 탐사에 관해 다시 논의했다. 동굴 안이 너무 어두우므로 다음에 올 때는 적어도 손전등이나 성냥으로 태울 종이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횃불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 논의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비록 어둠 때문에 후퇴하지만, 다음에 또다시 그 동굴을 탐사하러 갈 때는 반드시 손전등과 불을 밝힐 성냥과 종이, 그리고 너무 깊이 들어갈 경우를 대비해서 밧줄까지 필요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나아가, 각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관해서까지 논의했을지도 모른다. 동굴 탐사가 마치 보물섬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맡은 중대한 사명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후에 아무도 동굴에 다시 가보자고 말하지 않았다. 손전등이나 밧줄 같은 것을 준비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이듬해 여름이 올 때까지도 우리는 동굴탐사에 관해서 잊은 듯 입을 다물었고 동네 골목에서만 뛰어놀았다.


정수 형은 이미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고 훈이 형마저 중학교로 갔다. 그들이 골목에 나오는 일이 줄어들게 되면서 나도 점차 밖으로 나가서 노는 일이 줄어들었다. 동네 골목에는 나보다 어린아이들이 여전히 뛰어놀았지만 나는 그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동네 골목에서 뛰어 놀던 나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5학년 가을부터 교회 성가대 활동에 열심이었던 나는 어느새 동네 골목에서 노는 것에는 흥미를 잃었으며, 그때부터는 꽤 점잖게 행동하는 교회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시간이 아주 아주 많이 지난 후, 나는 성남중학교나 성남고등학교에 다녔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학교 뒷산과 동굴들에 관해 알고 있는지 또는 가보았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들은 대체로 학교 운동장에 동상이 있었던 김석원이 친일파라는 사실만 알지, 학교 뒷산에 가본 적도 없고 거기에 동굴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성남학교 뒷산에 동굴들이 있었던 것을 모르시겠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들이 김석원에 관해 아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나라에서 자신이 속했던 학교나 기관에 관련된 친일파가 누군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3년 또는 6년간 가방 들고 학교만 다녔지, 우리처럼 모험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 학교 뒷산까지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등 쓰잘머리 없는 일이지만, 성남학교 뒷산과 동굴의 추억은 남몰래 나만 간직한 사연인 듯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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