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9)
1.
대방동 우리 동네에는 여관이 세 개나 있었다.
비록 여의대방로 바로 옆길이기는 하지만, 명색이 주택가인데 여관이 세 개나 있다는 것은 좀 특이한 일이었다. 나는 일단 우리 동네에 있었던 작은 골목부터 설명하면서 그 여관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 동네 중간에 여의대방로로 연결되는 길지 않은 좁은 골목이 있었다. 그 골목 안에 여관이 두 개나 있었다. 거기에 여관이 있었던 이유는, 골목의 여의대방로 쪽 입구 바로 옆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았던 그 골목의 중간에는 다섯 개 정도의 계단이 있었다. 계단 윗부분은 길이 살짝 꺾여 있어서 골목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고 약간 외진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계단이 있고 길이 살짝 꺾인 곳을 중심으로 골목은 두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우리가 뛰어노는 동네의 주된 길에서 그 계단에 이르기 전까지는 길이 조금 더 넓었다. 거기에는 동일한 모양과 구조로 지어진 기와집 세 채가 오른쪽에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왼쪽에는 그 세 개의 기와집을 모두 합한 만큼 긴 거리에 붉은 벽돌담이 서 있었다.
우리 집 맞은편에는 크라운맥주 회사 부사장 집이 있었고, 그 윗집이 바로 그 긴 벽돌 담을 가진 집이다. 그 큰 집에는 누가 살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4학년 무렵에 그 넓은 집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났다. 이후 그 넓은 터에 있었던 낡은 집은 철거되었으며 그곳은 수년간 야적창고 겸 공터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그 공터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집이 이사 간 후 우리가 골대로 사용하기도 했던 넓고 튼튼한 철제 대문은 늘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골목 중간에 있는 계단에 이르기 바로 전에, 그러니까 그 골목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기와집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훈이 형이 살았다. 성격이 쾌활하고 말이 많으며 매우 활동적인 훈이 형은 형제자매가 없는 외아들이었고 장손이라고 했다. 훈이 형의 할머니는 남에게는 성격이 고약하고 괴팍하고 꼬장꼬장했지만, 장손인 자기 손자는 끔찍이 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다른 장손의 어머니와 할머니들도 본 적이 있는데, 장손을 키우는 여자들은 모두 비슷한 데가 있다. 그들은 집안의 대를 이을 장손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희한하게도, 시집오기 전까지 남편의 가족에 속하지 않았던 그들은 혼인 후에는 돌연히 그 집안의 대물림이나 족보 등에 관해 고지식하고 완고한 소속 의식을 유지한다. 그런 고지식하고 완고한 의식은 가정 내에서 딸들에게도 집중적으로 훈육된다. 나아가, 새로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에 대한 소속감과 장손을 최고로 위하는 의식과 감정을 의무적으로 강요하면서 대물림하려고 한다. 성씨가 다른 집안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온 여성들이 왜 그렇게 남의 가문 대물림에 목을 매달고 사는지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장손이 있는 집은 일반적으로 어떻게든 아들을 보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아서 딸들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럼으로써 장손에게는 일반적으로 누나나 여동생이 많다. 그럴 때 장손의 조부모와 부모는 압도적으로 아들과 딸을 차별하면서 키운다. 그런 집에서는 온 식구가 ‘장손을‘모시고 사는’ 수준이라서 딸들은 절대로 아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며, 심하게 말하면 온전한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그런 부모 앞에서 괜히 그 장손을 무시하거나 조금이라도 저해하는 언행을 보이면, 그들은 장손을 대신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나서서 싸울 것이 분명하다.
그런 집에서 자란 딸들은 어릴 때부터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고 교육받아서 언제나 장손인 남동생이나 오빠보다 하위에 속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장손을 최고로 위하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았고, 남녀 차별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그런지, 그런 집 여자들은 자신이 명백히 부당하게 차별받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남녀평등 의식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 그런 집의 할머니와 어머니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전통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의식을 받아들여서 그렇다고 치지만, 딸들은 대체로 더 젊고 현대식 교육을 받았는데도 장손의 지위를 둘러싼 남녀차별에 적극 반대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 골목의 두 번째 기와집은 대문 위에 ‘동성’이라고 빨간 글씨가 적힌 둥그런 전광판이 있었던 동성여관이다. 그 전광판은 저녁에 방이 비어서 손님을 받을 수 있을 때는 불이 켜져 있어서 '동성'이라는 글씨가 환하게 잘 보였다. 그러나 여관방들에 손님이 다 찼을 때는 그 불도 꺼졌다. 다른 두 기와집도 그렇지만, 동성여관도 집 가운데 중정이 있는 있는 기와집이었다.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진 두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이 집은 중정을 가운데 두고 디귿자 모양으로 방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기와집이 으레 그렇듯, 안방 양옆에 기역자 모양으로 마루와 부엌이 있었다. 마루 건너에는 건넌방이 있었고, 부엌 다음에는 대문 옆방에 이르기까지 기역자 모양으로 세 개의 방이 더 있었다. 주인은 안방과 마루와 건넌방과 부엌을 사용했고, 나머지 세 개의 방을 여관으로 사용했다.
세 번째 기와집은 우리가 그 집 대문이나 담 앞에서 조금이라도 시끄럽게 떠들면 다짜고짜 바가지로 물을 끼얹는 괴팍한 할머니가 사는 곳이었다. 우리는 실제로 여러 차례나 그 할머니의 물바가지 세례를 받은 경험이 있다. 할머니가 우리에게 물세례를 줄 때는 다행히 여름이었다. 할머니도 더운 여름인 걸 알고 우리에게 물을 뿌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네에서 축구를 하다가 운 나쁘게 공이 남의 집으로 넘어갈 때가 있는데, 다른 집은 몰라도 그 집만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공이 넘어갔을 때 우리는 대문이 열려 있는 집에는 그냥 들어가서 공을 가지고 나왔다. 대문이 잠겨 있어도 문을 두드리거나 벨을 눌러서 사정을 설명하면 그들은 별 말 않고 우리에게 공을 내주었다. 그러나 그 괴팍한 할머니 집으로 공이 넘어가면 최악이었다. 일단 그 집은 언제나 문이 잠겨 있었고, 그 할머니 또한 언제나 집에 있었다. 공을 되찾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면 그녀가 나와서 우리를 혼내기만 했을 뿐 공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할머니가 공을 아주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날 저녁 또는 다음날이나 되어야 우리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공을 바깥으로 던져 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놀이를 하다 말고 "와 공이다. 할머니 고맙습니다."라고 소리 높여 인사를 했다.
때때로 그 할머니는 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우리에게 공을 주면서, "이놈의 자식들, 또 공을 넘길 거야 말 거야. 또 넘기면 다시는 공을 안 돌려준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면 우리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머리 숙여 대답하고 공을 받았으며, 비로소 환호를 지르고 다시 축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가 최대한 조심한다 해도 공은 또 그 집으로 넘어가기도 했으며, 할머니는 또다시 하루 이틀 동안 공을 보관하고 있다가 돌연히 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우리에게 같은 말을 했다. 키가 나보다 크지도 않은 할머니가 담 위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필시 담 안쪽에 어떤 받침대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다 해도 단정하게 쪽 지은 할머니의 하얀 머리가 갑자기 담 위로 솟아올라서 우리에게 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무섭고 기이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 좁은 골목은 조금 외진 곳이기 때문에 이따금 불량 학생들이 모여들곤 했다. 그 나이 아이들이 으레 그런 것처럼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낄낄거리거나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면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지나가는 학생이 보이면 ‘삥’을 뜯어내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라 미처 몰랐지만, 그 불량한 학생들은 아마 성남고등학교 학생들이었을 것이다. 성남고에서 대방시장 버스 정류장으로 오는 길에 그 골목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학생들은 돈을 빼앗을 학생을 보면 "야, 잠깐 이리 와 봐."라고 불러서 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약간 급해서 그런데 돈 좀 꿔줄래?.”
“우리 원래 이런 사람들 아니야. 내일, 아니 모레 여기로 오면 이자까지 합해서 다 갚아줄게.”
그럴 때 불려 온 학생이 돈이 없다고 하면 그들은 얼굴이 굳어져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돈이 없다고? 주머니 뒤져서 나오면 맞는다. 10원에 한 대씩.”
그들은 어린 우리를 붙잡고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어차피 돈이 없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너무 어려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 우리가 그들로부터 맞거나 돈을 빼앗겼다고 울면서 집에 가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주로 노리는 타깃은 골목을 지나가는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그 골목 안쪽 기와집에 사는 훈이 형 할머니는 그런 양아치들을 전혀 겁내지 않고 야단을 칠 수 있는 분이셨다. 불량 학생들이 집 앞에 모여 있는 것을 모른다면 할 수 없지만, 알기만 하면 그 할머니는 금세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그것은 그녀가 목숨보다 아끼고 위하는 장손인 훈이 형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뛰어나와서 불량 학생들에게 냅다 소리를 지르고 골목에서 그들을 쫓아냈다.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 그런지 그 골목은 비교적 평화로운 편이었다. 불량 학생들도 그런 일을 한두 번 당하고 나면 그곳으로 오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좁은 골목에는 이따금 그런 상황을 미처 모르는 젊은 남녀가 은근히 들어와서 밀애를 펼치기도 했다. 가난한 연인인 그들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중간에 길이 살짝 꺾인 곳에 서서 대낮인데도 서로 껴안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어린 우리가 급하게 그 골목으로 뛰어 들어갈 때 가끔은 난처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훈이 형 할머니는 그런 상황에도 적극 나섰다. 불량 학생들을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문을 활짝 열고 나와서 그들에게 버럭 소리쳤던 것이다. 훈이 형 할머니는 우리에게 곧잘 소리치고 화를 내는 고약한 노인이었지만 진실로 그 좁은 골목의 안전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골목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