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mory Feb 06. 2024

우리 동네 사람들 - 여관 2

걷거나 타거나 (10)

2.


그 좁은 골목 중간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왼쪽에는 두 개 정도의 상업용 건물이, 오른쪽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두 개의 주택이 있었다. 왼쪽에 있는 첫 번째 건물은 태양여관이었다. 태양여관에는 나와 같은 나이의 완수라는 친구가 살았다. 완수는 사실 완전히 우리 동네 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어찌 보면 반만 우리 동네 친구였다. 그 애는 우리와 매일 어울리지 않고, 반 정도는 여의대방로 건너편에 있는 동네 아이들과 놀았다.


완수네 집이 운영하는 태양여관은 3층 건물이었다. 출입문의 윗부분은 유리로, 아랫부분은 철제로 만들어졌는데, 그 유리에 빨간 글씨로 ‘태양여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여닫이 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작은 방으로 만들어진 카운터가 있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어떤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완수가 말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 아주머니가 완수의 어머니인지 아니면 그냥 일하는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 출입구를 열고 들어오면 그녀는 거의 자다 깬 얼굴 모습으로 출입구 쪽으로 난 창문을 드르륵 열고 누가 왔는지 보고 나서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또는 "자고 가실 거예요?"라고.


여관 손님도 아닌 우리는 그 아주머니를 보는 것이 어색해서 웬만하면 완수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그것이 어쩌면 완수가 우리 동네 친구들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태양여관의 각 층에는 긴 복도가 있었으며, 옅은 갈색 나무 문들이 복도를 따라 줄지어 보였다. 그 문들은 모두 작은 객실 입구였다. 나는 그 복도 입구까지는 가봤지만 안까지 들어간 적은 없기 때문에 태양여관의 자세한 구조는 모른다. 완수가 그 여관 안 어디에서 사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태양여관을 지나 좁은 골목에서 벗어나면 여의대방로를 만난다. 골목 입구 바로 왼쪽으로 십여 미터 내려가면 ‘강남중학교 앞’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시내로 나갈 때 우리는 그곳에서 버스를 탔다. 우리 집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면 강남중학교 담장 쪽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 골목을 통해서 가는 것이 낫다. 그러나 나의 누나들이나 우리 동네 여자들은 으슥하고 여관들이 있다고 해서 그 골목으로 다니지 않았다. 나도 나중에 중고등학생 때 그곳으로 다니지 않으려고 했다. 그 음습한 골목에서 혹시라도 불량학생들을 만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 번째 여관은 사실 여관이 아니라 이름부터 00 호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성여관이나 태양여관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큰 2층 건물이었다. 그 호텔은 입구부터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마당에도 여러 대의 자동차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건물의 입구나 외모도 화려해 보였다.


아무튼 그 호텔은 대방교회 위에 있는 넓은 사거리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우리 동네에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때 차도를 건너면 우리 동네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여관이 있었던 사거리 위로 약간 오르막길에 있는 지역을 윗동네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호텔 앞 사거리는 여의대방로처럼 큰 차도는 아니지만, 해군본부 앞 사거리에서 바로 들어오는 넓은 도로였다. 여의대방로이지만 사람들이 해군본부 앞 사거리라고 부른 도로의 가운데에는 늘 군복을 입은 헌병이 서서 교통을 정리했다. 원래는 교통순경이 교통정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곳은 해군본부 앞이라서 헌병이 서 있었던 것이다. 사거리 한복판에는 약간 높은 둥근 단상이 있었고, 철모를 쓴 헌병은 그 위에 올라가서 호루라기를 불면서 절도 있는 손동작과 함께 오가는 차들을 통제했다. 그들이 하는 주된 임무는 해군 장성이나 고위 관료가 해군본부로 들어갈 때 다른 차들을 세우고 본부로 들어가는 차량을 향해 멋지게 경례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이층 호텔 앞 도로는 우리 동네 골목보다 훨씬 넓었고 차도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그래서 차도 동네의 경계로 삼는 우리에게 그 호텔이 우리 동네에 속한다고 해야 할지 윗동네에 속한다고 해야 할지, 또는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생각이지만, 그 당시에 여관 사업이 잘 됐던 것은 통행금지 정책 때문이다. 통행금지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거리에서 경찰관 등 허락된 사람이 아닌 일반인이 다닐 수 없도록 했던 법적 조치였다. 통행금지는 간첩 활동을 방지하고 사회안전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듯하다. 사람들은 자정이 되기 전에 자기 집이든 친구네든 여관이든 어디론가 들어가야 했다. 자정에 시내 전체에 공습경보 같은 긴 사이렌이 울리고, 그 이후에 거리를 단속하는 사람들에게 걸리면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가야 했다. 그렇게 유치장으로 끌려가면 새벽 4시까지 그곳에 갇혀 있어야 했다. 버스나 전철의 막차는 일반적으로 11시도 되기 전에 끊겼으므로, 막차를 놓친 사람은 자정이 되기 전에 밤을 지낼 곳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자정이 가까워지면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역 근처에 있는 여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동성여관이나 태양여관은 내가 그 동네로 이사 갔을 때도 또 그 동네를 떠날 때도 내내 존재했고 영업을 했다. 그걸 보면 그 당시 여관 영업이 괜찮게 됐던 듯하다. 여관 사업이 잘 되지 않았다면, 특히 기와집이었던 동성여관은 그 방들을 전세나 월세로 돌리는 게 좋았을 것이다.



어느 여름날 오후.

축구를 하다가 지친 우리는 담벼락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그 골목의 첫 번째 기와집 할머니가 사는 집의 담장 밑이 마침 그늘이라, 우리는 담에 기대고 땅바닥에 앉아서 떠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난데없는 물세례에 놀란 우리가 벌떡 일어났을 때 담장 위에서 할머니가 바가지를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야 이 놈들아, 여기서 떠들지 말라니까. 왜 여기서 시끄럽게 떠들어? 계속 물바가지 쓰고 싶어?”


우리는 물에 젖은 강아지 모양이 된 채 대꾸도 못하고 도망쳤다. 할머니는 큰 소리를 멈추지 않고 그새 물 한 바가지를 또 가지고 와서 우리를 향해 허공에다 날렸다. 우리는 물을 피해 더 멀리 도망가면서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 할머니에게 대들었다가는 더 큰 화를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공이 그 집으로 넘어간 것도 아닌데 괜히 야단이라고 우리는 멀리 도망가서 우리끼리 그 할머니를 욕했다. 훈이 형 할머니는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큰 소리로 야단만 쳤지 물까지 뿌리지는 않았는데, 그 집 할머니는 우리에게 물부터 퍼붓고 나서 야단을 쳤다.


그렇게 물세례를 맞은 이후 우리는 가능한 한 그 집 할머니를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가끔 축구공이 그 집으로 넘어가는 것은 여전했고, 더위에 지쳐 깜빡하고 그 집 담벼락 그늘에 앉아서 떠드는 일도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 할머니는 대문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공을 그 집 안으로 넘겨 넣지 않는 한 그 할머니를 볼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훈이 형 할머니는 저녁에 밥을 먹을 때가 되면 훈이형을 부르기 위해서 곧잘 좁은 골목 바깥까지 나왔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훈아, 들어와. 밥 먹어야지. 이놈의 새끼들, 허구한 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온종일 놀기만 하고 자빠졌어. 니들은 공부 안 해? 앞으로 우리 훈이 불러내지 마. 알았어?”


할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주름이 많은 얼굴을 더욱 잔뜩 찌푸리고 이렇게 소리 질렀다. 도대체 이 할머니들과는 대화가 안 된다고 우리는 푸념했다. 훈이 형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는 그 할머니를 볼 때마다 흡사 동화책에 나오는 마귀할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틀니를 뺄 때 볼이 홀쭉해지는 할머니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훈이 형 할머니의 말에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훈이 형을 불러내기보다는, 거꾸로 훈이 형이 우리를 불러내는 것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무조건 우리에게만 뭐라고 했다. 하여간 그 두 할머니의 성격이 매우 고약해서, 우리는 가능하면 그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3.


이듬해 여름, 그러니까 내가 5학년이었을 때다.

남자애들은 그맘때가 되면 슬슬 남자와 여자의 신체 구조가 확실히 다름을 알게 되고 이성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늘어난다. 그때쯤이면 성 지식의 원천이 어디가 됐든, “나는 어디에서 왔어?”라고 아이가 물었을 때 부모님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만큼, 남녀 간 섹스와 임신과 출산에 관해서도 대충이나마 알게 된다.


겨우 열 살을 갓 넘은 우리가 그렇게 이성과 섹스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동성여관 옆집에 살고 있는 훈이 형은 우리에게 동성여관에 관해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때 우리는 아직 사춘기에 도달하지도 않았고, 2차 성징기에도 이르지 않았지만, 섹스에 관한 호기심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학교에서 그런 쪽으로 조숙한 아이들은 이미 이성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고, 그들이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이상한 짓을 했다는 식의 소문이 돌곤 했다. 여학생 반의 누구가 남학생 반의 누구와 사귀었고 교실에서 뽀뽀하는 것을 봤다는 식의 소문 말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되면서 퍼져 나갔다.


학교 화장실에서도 우리는 이상한 낙서나 그림을 발견하곤 했다. 아이들은 학교 화장실 문이나 하얀 벽에  잘 지워지지도 않는 연필로 괴상한 낙서를 많이 했다. “XX 나쁜 새끼!”처럼 주로 누구를 욕하는 짧은 문구가 많았다. 싫어하는 아이를 그렇게 소극적으로 그러나 널리 또 길이 남기면서 복수하는 방법이었다. 그 대상에는 물론 선생님도 포함됐다. 툭하면 아이들을 혼내고 때리던 선생들이 단골 대상이었다.


아이들의 흥미를 가장 끄는 것은 남녀 학생이 함께 낙서된 것이다. “00랑 00가 뽀뽀했다.” 또는 "00과 00이 사귄다." 또는 "00은 00을 좋아해."와 같은 소문 또는 정보를 적는 것이다. 좋아하는 여학생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적는 아이도 있었다. 자기를 좋아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낙서 내용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가장 자극적이고 난감한 낙서는 남녀 생식기를 과장하여 그린 그림이라든가 노골적인 섹스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이었다. 모두 비슷하게 그려진 그런 그림은 끈질긴 전염병 바이러스처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선생님들이 혼내고 말려도 화장실은 은밀한 지역이었으므로 아이들에게서 그런 행위를 근절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신체적 심리적 발전과 함께 아이들이 자연스레 갖게 되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루기 힘든 욕망일 뿐이다. 당시 대부분의 내 또래 아이들은 이성 친구를 좋아했지만 실제로 사귄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천자문까지 배우지는 않았지만, 일곱 살부터는 남녀가 유별하다고 들었던 고리타분한 시절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남녀가 합반이라, 한 교실에서 남녀 아이들이 쉽게 어울릴 수 있었지만, 4학년부터는 남녀 아이들이 교실을 따로 사용했다. 그때부터는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남녀가 확실히 구별되고 분리되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강조되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남녀 학생이 사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봄이 되면 꽃이 피어나듯이 나이가 들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은 저절로 늘어나는 법이다. 나는 주로 나보다 세 살 많은 골목대장과 한 살 많은 훈이 형으로부터 이성에 관한 이야기를 침을 삼키면서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아직 학교나 가정에서 성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시기에 어린아이들 간에 전수되던 성 지식이기도 했다. 그러한 성 지식은 주로 아이들이 짙은 호기심으로 주워들은 것과 어디서 본 것과 상상력에 기초하여 얻은 결과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여간 훈이 형의 말에 따르면, 자기 집 마당에 있는 장독대로 올라가면 열린 창문을 통해 동성여관의 방 안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동성여관에는 에어컨이 없었으므로 더운 여름밤에 투숙객들은 거의 다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잤다. 그래서 훈이 형은 방 안의 불이 밝고 창문이 열려 있기만 하다면 어두운 장독대에서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했다. 누구라도 방 안의 풍경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지만, 훈이 형은 이따금 여관방에 투숙한 남녀를 몰래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훈이 형 또한 그런 ‘몰래 보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훈이 형의 할머니가 항상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는 자기 집이 여관 옆에 있었으므로 훈이 형에게 절대로 장독대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했고,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훈이 형과 그렇게 오랫동안 어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훈이 형네 집 안에 들어갔던 적은 거의 없었다. 아마 한두 번 들어갔던 것은 훈이 형 할머니가 집에 없었던 낮이었다.


그런 할머니인지라, 훈이 형이 장독대로 올라가서 여관방을 들여다본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훈이 형의 할머니 외에 그의 부모님 또한 훈이 형이 장독대에 올라가는 것을 엄금했다. 여관 옆집에 살고 있고 장독대에서 여관방을 엿볼 수 있다면,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주의를 주지 않고 신경 쓰지 않겠는가.


하여간 훈이 형은 너무 어린 나이에 보면 곤란한 여관방 풍경을 몰래 본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는 그의 무용담 아닌 무용담을 침을 꼴깍 삼키면서 들었다. 나는 훈이 형 이야기를 듣고, 혹시 우리도 몰래 볼 수 있는 기회가 없겠냐고 물었지만, 훈이 형 집으로 밤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잊혔는데, 훈이 형이 여관방을 엿볼 수 없도록 그의 부모님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에 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태양여관에 사는 완수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태양여관의 건물 구조상 창문을 통해서 방 안을 볼 수는 없지만 그는 이따금 심부름을 하다가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완수로부터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는 결코 여관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전하지는 않았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상황은 분명히 좋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라면서 저절로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고, 한 번이라도 그런 엿보기를 경험하면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는 법이다. 훈이 형이나 완수처럼 주거 환경상, 남녀의 정서적 사랑은 이해하지 못한 채 육체적인 성애만 몰래 보거나 듣는 일이 벌어진 것은 불행한 일일 것이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면 그것마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이 어릴 때부터 그런 상황에 처했던 것은 결코 유익하지는 않은 일임은 분명하다.


하여간 그 세 개의 여관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 경기도 광명시로 이사 갈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 그 자리에 존재했다. 그러나 훈이 형은 중학생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그 동네에서 이사 갔다. 물론 그가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그 동네에 살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은상이도 중학생이 되면서 곧 이사 갔고, 명이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이사 갔다. 골목대장이었던 정수 형도 고등학생이 된 후 이사 갔다. 그들 모두 이사한 후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 당시 우리 나이의 아이들에게 이사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조금 더 커서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사귀었던 친구들이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이사는 다시는 서로 만날 수 없게 되는 것, 영원히 이별하는 것, 소식도 모르고,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추억이나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물세례를 주었던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가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우리 동네 작은 골목에 있던 세 개의 기와집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에게 큰소리치고 물바가지를 퍼붓던 할머니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다.



<추신>


요즘이라면 이사한다고 해서 그렇게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락을 자주 하든 하지 않든, 개인 전화와 SNS를 통해 우정과 교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보통 그러하듯이, 헤어지고 나서 처음에는 자주 연락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연락이 시들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처럼 이사 가면서 곧바로 영원히 이별하는 것과 지금처럼 교류가 이렇게 저렇게 이어지다가 결국 시들시들해지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나는 모르겠다. 이사한다는 물리적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람 사이의 끈을 잇고자 하는 습관을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번에 헤어질 수도 있었던 것을 꽤 오랫동안 흐지부지해진 후 헤어지게 되었다면 그것이 더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헤어져도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고 다시 우정이나 사랑을 쌓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사한다고 해서 완전히 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결코 낮게 또는 나쁘게 평가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번에 헤어지면 뭔가 아쉬움이 남아서 온전히 예쁜 추억 속에 담아 둘 수도 있는데, 괜히 질질 끌다가 긴 꼬리가 저 먼 어디론가 사라지듯 잊게 되면 추억마저 흐릿해져서 조금 슬프기도 하다. 어느 날, 단번에 이별하여 아쉬움과 후회가 남을지라도, 어쩌면 헤어진 사람을 온전히 아름다운 추억에 남겨두기 위해서는 그쪽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누가 알겠는가.

영원히 이별한 줄 알았던 사람으로부터 돌연히 연락이 오고 완전히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의 끈이 다시 이어져서 남은 인생에서 행복한 인연이 이어질 수 있을지.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동네 사람들 - 여관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