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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Feb 07. 2024

우리 동네 사람들 - 부잣집

걷거나 타거나 (11)

1.


앞서 밝혔지만, 우리 집 맞은편에는 ‘크라운 맥주’ 회사 부사장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정원이 아주 널찍하고, 단층 기와집이 매우 커서 너끈히 수백 평에 이를 만한 집이었다. 골목에서 우리가 축구를 할 때 골대로 주로 사용했던 차고를 가진 그 집이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만한 차고여서 좁은 골목에서 축구 골대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크라운맥주 회사는 매우 유명하고 역사가 오래된 기업이었다. 지금은 ‘크라운’이라는 브랜드가 낯설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한국의 주류 업계에서 OB맥주와 쌍벽을 이루면서 경쟁했던 회사다.


(이 회사의 전신인 조선맥주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영등포에서 설립됐고, 거기서 일본 맥주인 아사히와 삿포로까지 생산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 이 회사는 미군정에 귀속됐다가, 대주주였던 민대식의 손자인 민덕기가 관리하게 된 후, 1952년부터 ‘크라운맥주’ 상표를 쓰기 시작했다. 구한말 귀족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최고 갑부 중 한 사람이었던 민영휘의 맏아들이 바로 민대식이다.


해방 후,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올바로 가려내고 처단하기 위해 저 유명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이 있었다. 약칭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은행가였던 민대식을 포함하여 수많은 친일파를 조사했다. 그러나 친일파를 가려내고 청산하기 전에 불행하게도, 1949년에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인해 반민특위가 먼저 해산됐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출생에 안겨진 원초적인 불행의 씨앗이기도 했다.


만약 그때 민대식이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로 낙인 받고 숙청되었다면, 크라운맥주 회사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긴 그때 반민특위가 제대로 활동하고 정말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이 제대로 단죄되었다면, 민대식 개인이나 크라운맥주라는 하나의 회사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2차 대전에 이를 때까지 식민지나 반식민지 시기를 거친 나라들은 그게 문제다. 제국의 점령기에 제국에 협조했던 사람들과 제국에 저항하면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 말이다. 제국의 점령지 또는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은 독립한 후에 모두 공통적으로 그런 문제를 안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제국의 점령기에 제국에 협조했던 사람들의 죄과를 묻고 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독립 후에도 주로 그들이 정치권력과 재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독립 후 혼란한 시기에 제국의 앞잡이들과 기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후의 항전을 하면서 버티기 때문이다.


국내에 있는 여러 정치 경제 세력들 간에 벌어지는 갈등만 해도 복잡한데, 물러났던 제국까지 예전 식민지에 새로운 영향을 행사하면서 상황은 더욱 혼란스럽게 발전한다. 탐욕을 버리지 못한 제국이 옛 식민지와 점령지에 조금 더 경제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다시 찾아왔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을 ‘신제국주의’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제국들끼리는 자기들만의 동류의식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탐욕도 쉽게 이해하면서 이익관계에 따라 서로 양보하거나 용인해 주기도 하고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다투기도 한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제국주의 시대가 저물고 약소국들이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는 제국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에 기대어 권력을 행사하려는 세력과 독립된 국가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민족주의 세력 사이에 갈등은 계속 유지되며, 과거 피식민지는 독립되었음에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다른 약소국가들도 대체로 비슷한 불행을 경험했지만, 한반도의 경우에는 그 피해가 더욱 크고 참담했다. 다른 신생 독립국들과 달리, 한반도는 하필 미국과 소련에 의해 강제 분단 상황을 맞았다.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졌던 것처럼 전범국인 일본이 분단되었다면 충분히 이해되지만, 엉뚱하게 한반도가 분단되는 괴상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어 남북한의 갈등은 냉전 시기를 맞아 이념의 대립으로 탈바꿈하면서 더욱 복잡하고 색다른 갈등과 대립으로 변천했다. 그렇게 복잡한 상황은 과거 식민지 시기의 문제와 새로운 이념 문제를 포괄하면서 더욱 광범위한 사회적 혼란을 불러왔다. 한국인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6.25 전쟁을 겪고 나서도 지금까지 분단과 대립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그런 혼란을 올바로 풀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나서 수십 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민간 연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반민특위의 정신을 이어받아 뒤늦게나마 친일파를 가려내는 작업을 실시했다. 비록 '처단'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특히 민대식에 대해 재차 조사한 끝에, 2008년에 경제 분야에서 그를 친일파로 분류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과 관계없이, 크라운맥주는 이렇게 저렇게 이어지고 발전하더니, 나중에 하이트맥주 회사가 되었다. 하이트맥주는 얼마 전에는 소주로 유명했던 ‘진로’와 합병하여 지금은 하이트진로 회사가 됐다. 이 정도로 소개하면, 오늘날 젊은 세대도 이 회사의 역사를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크라운맥주 회사의 부사장 집이 우리 앞집이라는 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 집 대문 옆에는 돌로 된 명패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어서 그 집 호주의 이름까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크라운맥주 회사 부사장이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어린 내가 그를 보았다 해도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나는 맥주 상자가 그 집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본 적도 없다. 하긴 맥주 회사 부사장이라고 해서 자동차에 맥주를 싣고 다니거나 맨날 집으로 맥주를 들고 다니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고된 일을 부사장이 할 리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집에 그만큼 들락날락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조용한 편이었다는 것이다.


그 집이 그렇게 조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 그 집에 나와 비슷한 나이의 어린이가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얼굴이 하얗고 말쑥하게 생긴 고등학교 남학생이 있었다. 우리는 오후에 골목에서 놀고 있다가 이따금 가방을 들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 학생을 보곤 했다. 그는 아주 맥이 풀린 모습으로 걷다가 우리가 보는 것을 의식하면 갑자기 사뿐사뿐 빠르게 걸었다. 그렇게 자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를 아는 척하거나 우리에게 말을 붙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은 우리 동네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우리 집이나 옆집 등과 친할 법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은 이웃과 거의 왕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집 사람들은 겨우 세 명에 불과하다. 아침마다 자동차를 몰고 오는 운전사 아저씨와 매일 시장에 다녀오는 가정부 아줌마와 맥이 풀린 모습으로 오가던 남학생 정도다. 집 안에 주인 부부와 할머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넓은 마당이 있는 그 집 안으로 나는 두세 번 정도 들어갔던 적이 있다. 그때 그 집은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넓은 정원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굳이 정원이라고 표현한 것은 겨우 조그만 텃밭에 꽃이나 상추 정도가 약간 심어지곤 했던 다른 집 마당과 명백히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집 네다섯 채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그 집의 마당 겸 정원은 작고 푸른 숲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는 아주 작은 분수가 있는 물받이 장식이 있었고,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장식용 바위들 사이에 있었으며 예쁜 꽃들도 많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닥에 잔디와 자갈들이 있었고, 널찍한 돌판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어서 마루 입구까지 돌판만 디디고도 갈 수 있었다. 그 집도 우리 집처럼 단층 기와집이었는데, 정원을 앞에 두고 남쪽으로 난 거실 마루로 들어서면 왼쪽에 안방이 있었다. 마루 오른쪽으로는 긴 마루 복도와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그 집 대문으로 들어서면 마당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었고,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현관문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처럼 그 집 사람들도 현관으로 다니기보다는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마루로 바로 들어갔던 듯하다.


그 집은 넓은 대문 오른쪽으로 긴 회색 시멘트 담장이 있었고, 그 끝에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철제 문이 달린 차고가 있었다.  그러나 차고에 자동차를 넣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차고 문이 열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그 문을 골대로 삼아서 축구를 했던 것이다. 두세 번 정도 그 차고 문이 열려서 안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박스와 짐들만 약간 놓여 있어서 그냥 창고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듯했다.


학교에 가느라고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나는 가끔 그 집 대문 앞에 검은 자동차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운전사 아저씨는 자동차 밖을 돌면서 차를 닦고 있었다. 필경 크라운맥주 부사장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털이 잔뜩 달린 긴 먼지떨이로 자동차를 닦은 후, 허공에다 먼지를 털어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나는 그 집 앞에서 자동차와 운전사 아저씨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크라운맥주 부사장 가족이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사했던 것인지, 아니면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아침 일찍 나갔다 밤늦게 돌아오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집에 살던 고등학교 남학생도 대학생이 되어서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으며, 아침마다 차를 몰고 왔던 운전사 아저씨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이전 가정부와 같은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 집에서 나오는 가정부 아줌마는 여전히 자주 볼 수 있었다. 가정부 아줌마는 매일 낮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노란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팔에 끼고 나와서 종종걸음으로 대방시장으로 갔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녀는 여러 반찬거리를 담은 시장바구니를 들고 허둥거리면서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그 집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우리처럼 밥을 먹고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2.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동차가 있었던 그 집에서 더 이상 자동차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한동안 자동차가 없는 골목에서 더욱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에서 자동차가 보이지 않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대방교회 바로 아래에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높고 더 근사한 3층 집이 건설되었다.


말이 3층이지, 그 당시에 그렇게 크고 높은 집은 극히 드물었다. 더욱이 그 집은  동네 평지에서 적어도 반 층 이상 솟아오른 땅에다 지어서 그런지, 밖에서 보면 4층 높이의 대단히 웅장하고 거대한 집으로 보였다. 시내에 있는 고층 빌딩이 아닌 개인 집으로서는, 아마 당시에 어린 내가 본 집 중에서 가장 높고 큰 집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지붕 세 가족이었던 우리 집에 열세네 명이 살았던 것을 생각할 때 그 집 정도 크기라면 아마 사오십 명이 살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개인 집으로서 넓은 집들은 여기저기 있었지만, 주로 단층이나 2층이었지 3층으로 지은 단독주택은 없던 시절이었다. 올라가 보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 집의 3층이나 옥상으로 올라가면, 동네 인근은 물론이고 대방시장까지 볼 수 있었을 테고, 멀리 서쪽 하늘로 석양이 지는 아름다운 모습까지 매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 일대는 물론이고 대방시장에 이르기까지 그 집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집에는 당연히 매우 높은 담이 있었다. 담의 아랫부분은 매끄럽고 튼튼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담은 축대가 없었지만 평지에서 높이 솟아올라 있어서, 아무도 감히 넘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다리를 놓고도 그 담을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높았다. 대방동에서 축대 위에 짓지 않은 집 가운데 그 집 담보다 높은 담은 없어 보였다. 담의 높이는 담 위에 있는 철제 장치까지 합하면 우리의 키의 세 배도 넘었을 것이다. 그 담은 매우 높아서 축구를 하다가 누군가 잘 못 차도 공이 그 담을 넘어가는 일은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이따금 열린 문을 통해 그 집의 내부를 보았는데, 마당에 매우 넓은 초록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잔디밭 끝에는 장식용 바위들과 높고 푸른 나무들이 둘러서고 있었다. 잔디밭 왼쪽에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거기에 커다란 창문이 있는 1층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밖에서 그 집을 보면 4층 높이로 보였던 것이다.


대문 또한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크고 넓고 튼튼했다. 대문 바로 앞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아래로 희고 밝은 네다섯 개 정도의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은 매우 넓은 편이라 우리가 모여 앉아서 놀기 좋은 곳이었다. 대문 위에 가로로 놓인 시멘트 구조물로 인해 그곳은 여름에 해가 비칠 때는 햇빛을, 비가 올 때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대문 옆으로는 높은 담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 대방교회 마당과 닿는 지점에 큰 차고가 있었다. 그 차고는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 차고의 두 배 정도로 넓었으며 철제 자동문이 있었다. 그 집에도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처럼 검은 자동차가 있었다. 다른 점은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은 운전사 아저씨가 아침마다 자동차를 몰고 왔지만, 이 3층집에서는 자동차가 항상 그 집 차고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차고로 자동차가 들어간 후에 아무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운전기사 아저씨가 그 집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집의 자동차는 주로 오후 대여섯 시쯤이면 우리가 놀고 있는 골목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그 시간에 동네 골목에서 한창 놀고 있었던 우리를 매우 귀찮게 하는 일이었다. 그 자동차는 골목으로 들어와서 축구를 하던 우리를 향해 크게 경적을 울렸다. 그러면 우리는 노는 것을 멈춘 채 그 차가 지나가도록 했으며, 그 차가 차고로 들어갈 때는 차고 문 옆으로 나란히 비켜섰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신기하게 차고 문은 덜컹거리면서 자동으로 올라갔다. 차고 문이 다 열리면 자동차는 어두컴컴한 차고 안으로 쏙 들어갔고, 차고 문은 또 자동으로 덜컹거리면서 내려왔다.


온통 검은 유리로 가려진 자동차는 우리에게 경적만 울려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을 뿐, 아무도 차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중에 아무도 그 집에 누가 사는지, 또 몇 명이 사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집의 규모로 보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집주인이 크라운맥주 부사장에 비해 돈이나 권력이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동네 일이라면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었던 나의 아버지도 새로 지은 그 집 사람들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매우 높은’ 관료일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했다.


하여간 큰 집에 사는 사람들은 그게 문제다. 한 동네에 살면서도 서로 편하게 알고 지내기는커녕, 인사도 안 하고 아는 척도 안 한다. 그 점에 있어서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에 비해 새로 지은 3층집이 더 문제다. 우리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자기들은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처럼 군다. 보통 나중에 이사 오는 집은 떡이라도 맞춰서 이웃집들에게 인사차 한 접시씩 돌리는 게 미풍양속이거늘, 큰 집 사람들은 그런 기본 예의조차 없다.


그 큰 집들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경기도로 이사 갈 때까지도 그대로 거기 있었다. 그 사이에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은 주인이 바뀌기도 했고, 대방교회는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네모난 건물을 지었으며, 동네의 일부 오래된 기와집들도 철거되고 새로운 2층 또는 3층 양옥집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큰 집들은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도 여전히 그 큰 집들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새것도 낡은 것이 되듯이, 그 큰 집들도 모두 천천히 낡은 집으로 변해갔다.



<추신>


여전히 대방교회가 서 있는 동네 골목은 이제는 완전히 탈바꿈하여 예전 모습을 잃었다. 동네 전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건설된 곳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도 너무 많이 변화했다.


우리 동네 골목, 나아가 대방동 일대의 도로와 지형은 여전히 큰 변화 없이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옛 집들은 모두 새로운 건물들로 변했지만 옛 도로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 말인즉, 대방동은 강남을 비롯하여 졸지에 부촌으로 변해간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별 변화도 없이 낙후됐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때는 유명 인사들까지도 모여 살았던 그 지역은 완전히 서울의 낙후된 변두리로 변해 있었다.


대방교회는 그새 또다시 새로 지어진, 그러나 여전히 콘크리트 성냥갑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고 강남중학교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그러나 다른 건물들은 통째로 바뀐 모습이다. 우리가 뛰어놀던 동네의 모습, 내가 기억하는 옛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고, 내가 살던 집터마저 흔적조차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과 새로 지은 커다란 3층집도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과 주차장 등이 들어섰다.


그래서 지금 그 동네 모습을 보면 그곳에서 우리가 축구를 하면서 뛰어놀았다는 추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땅과 길은 예전 그대로인데 그 위에 있는 건물들과 사람들은 모두 변하고, 어린 시절 나의 추억은 모두 땅 속으로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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