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12)
1.
우리 동네에 새로 지어진 3층집의 차고 문은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 차고에 비해 훨씬 더 컸다. 그래서 그런지, 그 문을 골대로 삼아서 공을 차면 철제로 된 문이 철렁 흔들리면서 소리가 훨씬 더 요란하게 울렸다. 우리가 그 차고 문에다 공을 차면 그 집 가정부가 곧바로 뛰어나왔으며, 우리에게 차고에다 공을 차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우리도 마음 같아서는 그 집 앞에서 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집은 우리 동네 한가운데에 지어졌고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가 그 집 앞에서 축구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그 차고 문을 골대로 사용하기 어려웠으므로, 우리는 그 집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후 우리는 그 집 앞을 지나갈 때 축구공을 찰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따금 차고 문을 발로 걷어차거나 엉덩이로 세게 밀고 가기도 했다.
그 차고 문을 골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앞에서 축구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열심히 축구를 했다. 그렇게 놀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피해야 한다거나 우리가 찬 공이 자동차에 부딪힐까 염려할 일은 여전히 거의 없었다.
우리가 놀다가 자동차와 마주치는 것보다는, 이따금 흥분해서 뛰어다니는 우리를 피해서 옆으로 살살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와 부딪히거나, 우리가 찬 공이 예상치 않게 지나가는 사람에 맞을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이것은 허풍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찬 공이 우리 옆집에서 나오는 젊은 아줌마에 맞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것은 절대로 내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공을 찬 순간에 하필 그 아줌마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 젊은 아줌마는 아마 우리 옆집의 방 하나에 세를 얻어서 사는 듯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도 우리 부모님도 잘 알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은 임신한 상태라 배가 꽤 부른 상태였다. 내가 나름대로 힘껏 찬다고 오른발로 찬 공은 하필 정확하게 그분의 배에 맞았다. 그분은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놀라서 두 손으로 부른 배를 움켜잡았고, 나는 너무 당황해서 가슴이 몹시 떨리고 얼굴이 하얘질 지경이었다.
“야, 저 아줌마 임신 중이잖아. 하필 아줌마 배에 맞았어.”
“너 이제 큰일 났다.”
“뱃속 아기 괜찮을까?”
동네 아이들이 약간의 두려움 속에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그랬냐. 하필이면 공이 배에 맞을 게 뭐야.”
거의 울상이 된 나는 혹시라도 아줌마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생길지도 모를 불상사가 떠올라서 겁이 났다. 갑자기 불행한 신세로 전락한 듯이 한탄하면서 중얼거렸다. 아 이게 뭐람.
나도 다른 아이들도 모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말하기도 전에, 또 내가 그 아줌마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젊은 아줌마는 우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배를 두 손으로 감싸고 곧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 한동안 나는 아줌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으면 어쩌나 염려했다. 그러나 그분으로부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 다행히도 아줌마나 뱃속 아이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그분이 얼마 후에 정말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우리 옆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집 마당에서 이따금 담장 너머로 갓난아이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분명 그 아줌마가 낳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줌마의 아이가 아니라면 어느 어린애가 옆집에서 응애응애하면서 그렇게 울었겠는가 말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하늘이 파랗고 햇살 좋은 날 그 아줌마는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가끔 바깥으로 나왔다 아줌마는 꽃무늬가 있는 하얀 기저귀로 등에 아기를 감싼 채 시장에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아줌마와 친하지는 않았지만, 등에 업힌 아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짧은 머리에다 얼굴만 봐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얼굴이었지만 여자 아이라고 했다. 아이의 얼굴에는 다행스럽게도 내가 찬 공에 맞은 흔적은 없어 보였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찬 공에 맞아서 아이의 머리가 찌그러졌다든가 눈이나 코가 비뚤어졌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런 모습은 전혀 없어 보였다. 파란 멍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머리가 듬성듬성 난 아이는 아줌마 등에 한쪽 얼굴을 붙인 채 아무 움직임 없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었다. 잠시였지만, 크고 맑고 검은 눈동자는 깜빡거림도 없었다. 나는 아이가 졸린 건지 안 졸린 건지, 나를 보는 건지 하늘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또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그 아이가 아줌마 손을 잡고 집 앞에서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우리가 축구를 할 때 아줌마가 아기를 데리고 나온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아기가 집 앞에 나왔을 때 우리는 혹시라도 아이가 공에 또 맞을까, 하던 축구를 멈추거나 아예 멀리 이동했다. 그럴 때는, 행여 땀에 젖은 나로부터 먼지나 세균이라도 옮을 새라, 나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아기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그 집 아줌마도 아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담장 너머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집 앞에서 아기가 아장아장 걷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어디론가 이사 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씨 좋은 그 아줌마도 그녀의 아기가 자라는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훗날까지 한동안 나는 여전히 궁금하기는 했다. 혹시라도 내가 찬 공이 임신했던 아줌마 배에 맞았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아이의 몸이나 지능에 나쁜 영향이라도 주지는 않았는지. 또 어디선가 그 아이는 여전히 잘 크고 있는지.
2.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우리 동네에서 나와 친한 친구는 여러 명이다.
지금까지 잘 기억하는 친구는 동네의 골목대장 노릇을 했던 정수 형, 우리 집 맞은편에 살았던 친구인 명이와 은상이, 나보다 한 살 많은 훈이 형 등이 있다. 그들이 나와 가장 가까운 동네 친구들이었다.
명이와 은상이는 특히 나와 같은 나이, 같은 학년생이었다. 내가 교회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5학년 초까지, 나는 그들과 가장 친했고 가장 많이 어울렸다. 첫 에피소드에서 나는 이미 명이에 관해 살짝 언급한 바가 있다. 4학년 학생으로서 내가 대림동 삼거리에서 우리 동네까지 버스와 달리기 경주를 했을 때, 나와 함께 뛰지 않고 굳이 버스를 탔던 아이가 바로 명이다.
내가 혼자 뛰어가도록 하고 자기는 버스를 타고 온 것을 봐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명이는 결코 진정한 의리파는 아니었다. (물론 당신은 명이와 함께 버스를 타지 않은 내가 의리파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때 나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버스를 탐으로써 돈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우리와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약간 개인주의적인 측면이 있기는 했다. 내가 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실제 이름은 ‘명’이다. 그래서 그를 부를 때 나는 “명아”라고 했다.
나와 함께 대방초등학교를 다녔던 명이나 은상이가 어느 중학교로 진학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어쩌면 운 좋게 우리 동네 바로 옆에 있는 강남중학교로 다녔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집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있는 그 학교에 입학하길 원했다. 그러면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천천히 걸어서 학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 추첨 결과는 나의 바람을 무참히 저버렸다. 매우 운이 나쁘게도, 나는 버스를 타고 여섯 정류장이나 가야 하는 강서중학교에 가게 됐다.
강서중학교는 대림동 삼거리에서 두 정류장인가 더 내려가야 하는 곳이었다. 생긴 지 겨우 5년째인가에 불과한 그 학교는 독산동이라는 곳에 있었다. 학교의 첫 소집일에 가보았더니, 아무 건물도 없는 허허벌판에 기다란 4층 건물 하나만 덜렁 지어진 신생 중학교였다. 학교 앞에 그 흔한 분식집이나 중국집도 하나 없던 곳이었다.
겨울에 버스정류장에서 학교 교실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우리는 겨울 코트도 입지 않고 그 길을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잔인한 일이다.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은 모자를 쓰긴 했지만 머리를 빡빡 깎은 데다 겨울에 코트도 입지 않고 다녀야 했으니 말이다. 거기에다 우리는 언제나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으므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도 없었다.
하긴 가방이 없다 해도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금지되었다. 학교 선생들은 우리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것을 매우 불량한 행동으로 간주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주머니에 손 집어넣는 것이 보기 싫다고 아예 주머니 입구를 꿰매도록 했다. 그러니 남학생들은 아무리 손이 차가워지고 시리다 해도 겨우 양손을 모아 입김만 호호 불거나, 손을 겨드랑이나 다리 사이에 넣고 비빌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수학 선생님은 추운 날 수업을 위해 교실에 올 때마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춥지? 모두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넣고 비빈다. 실시.”
겨울 아침 추운 교실에서 그렇게 하면 추위로 곱은 손이 겨우 조금 따뜻해져서 우리는 필기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양손을 열심히 비비면 손에서 닭똥 냄새가 났다는 것이다.
언제나 만원인 버스를 타고 가서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학교까지 한 500미터 정도, 아무튼 꽤 긴 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 길 주변, 텅 빈 들판 위로 봄이면 주변 밭에 뿌려진 거름 냄새가 풍겼고, 겨울에는 눈보라가 차갑게 몰아쳤다. 학교 근처에는 농부들이 거름으로 쓰기 위해 움푹 파인 곳에 인분을 모아둔 곳도 있었다. 그런 곳은 검갈색 언덕처럼 생겨서 언뜻 보면 주변의 땅과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경험은 없지만, 방과 후에 뛰어놀다가 어떤 친구는 뛰어가다가 그곳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그 학교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학교 주변에 번듯한 건물들이 거의 없었던, 몹시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었다.
이름이 강서중학교라면 학교가 강의 서쪽에 있어야 할 듯한데, 어떤 강을 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한강 근처에 있는 학교들은 교가에 늘 한강과 관악산이 들어간다. 학교 주변에 있는 가장 큰 강과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교가에는 왜 꼭 강과 산이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교가는 거의 그런 듯하다. 자연의 정기를 받으라고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왜 굳이 학교에서 자연의 정기를 받아야 하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또 학교마다 천편일률적으로 교가의 가사를 그렇게 만들 이유가 있나 싶었다.
하여간 강서중학교는 1999년에 이르러 세일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2001년에는 남녀공학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다닐 때는 한 학년에 학급이 무려 열네 개인가 열다섯 개나 되었고 학급당 학생 수는 70명씩 되었지만, 이제 학급 숫자는 그 절반도 되지 않고, 학급당 학생 숫자도 겨우 20명을 넘는다. 아마 수년 내로 학급 정원은 20명도 안 될 것이다. 강산과 사회는 몰라볼 정도로 변했고, 학생 숫자는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나는 명이나 은상이와 어울려서 놀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싸웠다거나, 서로 싫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갑자기 각자 다른 세계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던 듯하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또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마다 그랬다.
그것은 나무에서 하나의 줄기가 자라다가 갑자기 가지가 갈라지는 것과도 같다. 함께 있다가 돌연히 우리의 환경은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그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듯했다. 그때마다 각자 직면해야 하는 환경이 다르고, 좋든 싫든 각자 주어진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했다. 명이와 은상이는 그들대로 새로운 중학교 생활에 바빴을 테고, 나 역시 그랬다.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학교 외에도 교회 생활이 늘어나면서 주말에도 조용히 쉴 날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명이는 시내에 있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마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 때였을 것이다. 집 앞에서 나는 우연히 학원에서 돌아오는 명이를 만났다. 그는 방학 기간에 시내에 있는 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그는 학교 교사가 가르치는 과외공부를 하는 것보다 학원에 다니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학교 선생에 비해 학원 강사의 실력이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초등학교 때도 학교에서 과외공부를 했었는지 모르지만, 그 두 가지를 모두 알고 비교하는 듯이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때는 담임선생이 학생들을 모집해서 방과 후에 아이들의 청소가 끝난 후 교실에서 과외공부를 했다. 그것은 박봉인 교사들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자기 반 아이들을 상대로 학교에서 사교육을 하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학교는 교사들에게 비일비재한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척했다. 담임선생은 과외공부 할 아이를 모집하기 위해 은근히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과외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뻔히 추측할 수 있는 결과지만, 그렇게 담임선생으로부터 과외공부를 받은 아이들은 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과외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들은 과외공부 시간에 담임선생이 시험 내용을 미리 가르쳐준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은 심지어 시험 시간에 책상 사이를 지나다니다가 과외공부를 하는 아이가 틀린 답을 찍은 걸 보면 손을 뻗어 정답을 짚어주기까지 했다. 그것은 시험 시간에 나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던 사실이다. 담임선생은 그렇게 해서 머리가 나쁜 아이도 과외공부 하면 성적과 등수가 오름을 증명해 보였다.
또 뻔히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과외공부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어느 정도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었다. 공부에 관심 없는 학생들이 굳이 과외공부를 하겠다고 나설 일은 거의 없었다. 과외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학급 내에서 저절로 자기들끼리만 더 친하고 그들만의 배타적 특권의식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어린 마음에 나도 그 과외공부 ‘팀’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들의 리그에 참여하고 싶었다. 결국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나도 학교에서 과외공부 하고 싶다고 했다.
“과외공부는 무슨... 니 형이나 누나는 그런 거 안 해도 공부 잘했어. 다 니가 하기 나름이야.”
어머니는 차분하게 그러나 냉정한 어조로 반대했다. 나는 사실 애당초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집안 형편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하고 금세 포기했다. 실제로 형이나 누나는 그런 거 없이도 공부를 잘했다.
나는 명이가 부러웠다. 시내에 있는 학원이라는 곳에 관해 말만 들었지,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명이뿐 아니라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원 선생이 학교 선생보다 내용을 잘 정리하고 말도 훨씬 잘하고 실력이 더 낫다고 말했다.
학원에서 막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명이는 학원 수업이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듯, 내 앞에서 머리를 앞뒤로 까닥까닥하면서 코를 한껏 높이 들고 거들먹거렸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더니 한 손가락으로 콧속을 후비면서 말했다.
“학원에 다니는 건 좋은데, 시내에 똥차가 너무 많아. 어찌나 매연을 내뿜는지 시내에 나갔다 오면 콧속이 까매져.”
나는 진짜로 시커멓게 변했을 그의 콧속을 상상하면서 대답했다.
“아무렴 그렇다고 콧속이 까매지겠냐?”
“진짜야. 니가 시내에 가봤냐? 나처럼 맨날 가봤냐고?”
시내 학원에 가보지 않은 나는, 코를 후비다가 기어이 코딱지를 손으로 튕기면서 말하는 그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속으로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 콧속이 굴뚝처럼 까매질 만큼 시내에 검은 먼지가 많을까.
아마 5학년 때쯤, 나는 명이와 은상이에게 ‘경험’의 중요성에 관해 설명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그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라고 강조했었다. 경험을 통해서 인간은 발전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자연과 맞서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식으로.
그러면서, 경험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는데, 어린 우리는 직접경험을 많이 하기 힘들므로, 무엇보다 독서를 많이 해서 간접경험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었다. 내가 그들 앞에서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것은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이 그들보다 앞섰기 때문이라고 잘난 척했던 것이다. 그 아이들을 앞에 놓고 그렇게 떠들었던 내가 이번에는 학원에 다니면서 직접경험을 하고 와서 말하는 명이의 말을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해봤다는데,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뭐라고 반박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