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13)
3.
내가 학원에 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수년이 지난 뒤부터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난 후,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전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 나는 드디어 처음으로 학원에 갈 수 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명이가 오래전에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정이 지난 직후 정월의 모질게 추운 날들이었다. 차가운 북풍이 하도 세게 불어서 종로 거리 건물에서 나오는 희뿌연 김이 위로 올라가지 않고 모두 옆으로 날리는 햇빛 맑은 아침들이었다. 나는 오전 9시에 시작하는 영어 강의에 들어갔다. 학원은 당시 종로 2가에 있었던 YMCA 건물 안에 있었다. 첫날 교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첫날이라고 10분 정도나 일찍 도착했는데, 교실 안에는 이미 백 명도 넘는 남녀 학생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허겁지겁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마침 어떤 단발머리 여학생 옆이었다. 학원 수업이 처음이라 긴장했는데, 마침 왼쪽 옆에 얼굴이 곱상한 여학생까지 있어서 더욱 긴장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겨우 여학생의 옆얼굴만 훔쳐보았을 뿐인데 마음이 공연히 떨렸다. 공책에 적힌 여학생의 예쁜 글씨에 비해 내 글씨는 너무 형편없어서 나는 내 공책을 보여주는 것이 창피하다고 느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처음으로 여학생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은 것만 해도 가슴이 뛸 정도인데, 여학생 바로 옆에 앉아 있으려니 숨이 가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떠났다.
둘째 날에는 20분 정도 일찍 학원에 도착했는데, 운이 없게도 우락부락한 남학생 옆에 앉게 되었다. 강의실에는 거의 150명 정도나 되는 학생들이 있었으므로, 나는 전날 내 옆에 앉았던 여학생이 어디에 앉았는지 찾을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그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고 강의실에는 또 다른 학생들이 금세 줄지어 들어왔다.
학원 강의는 9시에 시작했지만, 교실에 아이들이 워낙에 많이 들어찼으므로 나는 점점 일찍 가게 되었다. 7시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씻고 아침을 먹고 7시 40분에 나갔으며, 강의 시작 30분 전쯤에 교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가장 뒤에 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찍 가도 교실에는 이미 학생들이 절반 정도나 차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매우 큰 자극을 받았다.
학원은 가르치는 열성과 배우려는 열의가 매우 높은 곳이었다. 학원 선생이 가르치는 수준은 학교 선생보다 월등히 높고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학생들 또한 학교에 비해 훨씬 더 진지한 모습으로 귀를 기울였고 눈이 초롱초롱했다. 문자 그대로 향학열이 불타는 듯했다. 학교 교실에 비해 학원 강의실의 책걸상은 매우 비좁았지만, 바로 옆에 여학생들도 있어서 만족스럽기도 했다. 한 교실에서 여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처음이었다. 게다가 모두 다른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그렇게 한 곳에 모여서 공부하는 것도 신기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예쁜 여자도 많고…
그중에서도 특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참으로 많구나.
나는 비로소 그때까지 내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고 생각했다. 겨우 강서중학교에서 공부한 것만 가지고 만족했음을 후회했다. 영어는 어려웠고 공부할 내용은 너무나 많았고, 똑똑한 사람도 많았다. 나는 그것을 학원에 가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또 하나의 신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명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학원 수업에 대단히 만족했다. 교육의 원래 목적이나 내용이야 어찌 됐든, 학원은 흥미롭고 신기한 곳이었다. 우리가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 학교는 ‘전인적 인간’이 되기 위한 교육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국민적 의무교육의 목표인 듯했다. 그러나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가는 학원은 그런 건 전혀 없다. 오로지 지식 전달의 효율성과 상품적 가치에만 충실하다. 그러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운 ‘전인적 인간’ 교육 목표에 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지식을 요약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측면에서 나는 학원 선생들이 학교 선생들보다 월등히 우수했다고 생각했다.
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내 친구들 가운데 학교 교사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평생 학교에서 일한 그들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 선생들은 수준이 별로 높지 않고, 툭하면 학생들을 윽박지르기나 잘하고, 매우 비효율적으로 가르치는 듯 보였다. 학원 선생이 한두 달이면 가르칠 수 있는 내용을 학교 교사들은 한 학기 또는 1년 내내 질질 끌면서 가르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시에 내가 그렇게 느꼈다 해도, 학교 교사들이 듣기에 거북하고 불편한 이런 말을 할 때는, 약간 귀찮지만 항상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특히 교사로 열심히 일했고, 아직도 일하는 훌륭한 친구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모든 학교 교사들이 그렇게 무능하고 지루하고 비효율적으로 윽박지르면서 가르쳤던 것은 아니라고.
개중에는 특출 나고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선생님도 있었노라고.
수십 년간 오로지 아이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노력한 교사도 있노라고.
또한, 학교는 오로지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안다고.
아무튼 그때부터 대학에 갈 때까지 나는 학원을 애용한 편이다. 방학이면 늘 학원으로 갔고, 학기 중에도 새벽반이든 저녁반이든 부족하다 싶은 과목을 배우러 때때로 학원으로 갔다. 어쩌면 그것이 학교 교사들에 관해서, 학교에 대해서, 그리고 그 비인간적이고 비효율적인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내가 오랫동안 회의를 느끼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이 결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교육을 무시하고 사교육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 내가 느꼈던 학교 교육은 그랬다. 내가 학원을 다녔던 후로 지금까지도 사교육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정부의 교육방침이 변경되는 것에 맞춰서 사교육도 진화했다. 잔혹한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므로 그런 사교육이 발전하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나중에 미국에 와서 보니, 비슷한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여기에는 그런 사교육이 거의 없다. 한국에서처럼 아이들이 학교 공부에 심하게 시달리지도 않는다.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심리적 압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학교와 같이 성적에 대한 극심한 압박감은 거의 없다. 교사들도 아이들을 그렇게 다그치지 않는다. 학생들 사이에도 한국의 학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경쟁심은 별로 없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나 잘 못하는 아이나 서로를 친구로 대하는 데 큰 차이가 없다. 잘 사는 아이나 덜 잘 사는 아이나 잘 생긴 아이나 덜 잘 생긴 아이나 모두 비슷하게 어울리고 친하다. 물론 또래집단이니만큼 특정 아이들끼리 더 잘 어울리고 일부 학생들은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사들은 모든 학생을 비교적 동등한 개인으로서 존중하고 각자의 권리를 올바로 보호해 주는 편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차별'은 가장 비난받아야 하고 멀리해야 할 가치이자 덕목이며, 모든 사람이 그것을 역사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에서 사교육이 발전한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을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경쟁으로만 탓할 수도 없을 듯하다. 무한경쟁이란 말은 매우 두루뭉술한 말이고, 특히 학교 교육에 관해서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한 단어라고 믿는다.
하여간 한국과 비교할 때, 미국사회에서 학원 시스템은 별로 발전되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학교 성적을 올리는 것에 관해 무관심하거나 대학에 갈 때 학교 성적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만히 보면, 미국의 학교 선생들이 한국의 학교 선생들보다 잘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양국의 학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 실은 사회가 또는 사회환경이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방금 내가 한 말은 한국의 교육개혁을 위해 이런 뜻을 갖는다. 정말로 사교육이 문제이고, 사교육을 줄이고 공교육 만으로 교육을 정상화하려면, 바꿔야 할 것은 학교가 아니라 사회라는 것이다. 궁극적인 문제는 사회이지, 학교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교육을 줄이고 공교육을 올바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제도만 가지고 떠들어봤자 소용이 없고 결국 사회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과거에 비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학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에서 그런 학원 방식의 사교육 시장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은 주로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왔던 나라에서 경험했던 시스템을 미국사회에서도 정착시키고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아무래도 학원은 사기업이라 돈벌이가 가장 중대한 목적이며, 아이들의 인성 발전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성적 향상에만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나아가, 학원은 학생들의 성적 결과만 중요시하고 학생들 사이의 경쟁심만 부추기게 된다.
그런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물론 성적이 향상될 가능성이 많다. 시험을 잘 보는 방법과 과제 수행 방법 등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학교 성적이나 대학 입학에서 상대적으로 성공적이긴 하다. 뉴욕시에 있는 최상위 특수고등학교나 유명 대학 입학 결과를 보면 아시아인들은 인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단히 많은 숫자가 합격한다.
유명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성적대로만 하면 아시아인들이 너무 많이 들어오게 되므로, 인종별로 쿼터제를 적용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여전히 전반적으로 사교육에 시큰둥하다. 내가 보기에는, 실은 사교육이 없다 해도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은 미국의 여러 인종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 성적이 우수한 편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사교육이 없다 해도 말이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사교육 문제는 매우 커다란 사회 문제다. 그런 문제를 심각하고 중차대한 사회문제로 발전시킨 나라는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 말고는 지구상에 거의 없다. 나는 한국의 사교육 문제가 매우 특이한 현상이고, 외국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 혹시라도 한국의 교육정책 결정자들이 어느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을 열심히 살펴본다 해도 그들로부터 한국 교육문제의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다.
내가 보기에, 한국은 자신이 만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허구한 날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해결책을 찾아봤자, 그런 곳에 있는 교육전문가들은 한국이 닥친 교육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한국의 정부나 교육전문가들은 교육문제 해결을 위해 곧잘 외국 타령을 하면서 외국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고 외국의 교육제도를 모방하려고 한다.
그런 문제를 두고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논쟁에 논쟁을 거듭했지만 해결될 기미가 전혀 없다. 오히려 예전에 비해 점점 악화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부디 한국사회가 잘 변화해서, 사교육의 의미가 퇴색하고, 공교육만으로도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만족하면서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서 교육제도를 고치기 전에 한국사회가 변해야 하고, 그 해결책은 외국이 아니라 한국 내에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
4.
은상이는 상대적으로 약간 어눌하고 명이나 나에 비해 처지고 허약하고 우울해 보이는 아이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명이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은상이가 성격이 나쁘다거나 멍청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때 은상이는 명이나 나에 비해 똑똑해 보이지 않았지만 순박하고 순진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한 번은 은상이가 나를 부르러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 엉덩이를 물린 적이 있다. 그때 은상이가 아마 2학년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쫑’이라고 부르는 작은 얼룩 강아지가 있었다. 은상이는 언제나 열려 있는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와서 앞마당을 통과하여 내 이름을 부르면서 수돗가가 있는 옆마당까지 불쑥 들어왔다. 그러자 쫑이 불현듯 짖으면서 뛰어나왔다. 은상은 놀라서 밖으로 도망갔고 쫑이 그 뒤를 쫓아갔다.
옆마당 수돗가에 계시던 어머니는 급히 쫑을 부르면서 뛰어나갔는데, 대문 앞에서 은상이가 이미 쫑에게 엉덩이를 물린 뒤였다. 아파서 그런지 놀라서 그런지, 은상이는 길에 서서 엉엉 울고만 있었다. 나도 곧바로 뛰어나갔는데, 어머니는 동네 한복판에서 주저 없이 은상이 바지를 확 내리고 엉덩이에 물린 자국을 확인했다.
햇빛이 매우 환한 낮이라 그랬는지,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간 채 서서 우는 그의 엉덩이가 참 하얗다고 생각했다. 팬티까지 모두 내려갔는데도 은상은 아랑곳 않고 두 손으로 얼굴만 훔치면서 엉엉 울고 있었다. 쫑이 조그만 개라서 그런지, 다행히도 은상의 엉덩이에 물린 곳은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다짜고짜 은상이 엉덩이에 '아까징끼'(머큐로크롬)라고 부르는 ‘빨간 약’을 발라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은상아, 괜찮아. 피는 안 난다. 약 발랐으니까 금세 나을 거야.”
은상의 엉덩이에서 피가 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빨간 약이 은상의 다리로 흘러내릴 만큼 잔뜩 발라서 내 눈에는 그의 엉덩이에서 피가 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아주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개 물린 자리에 된장을 발라야 한다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빨간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은상이는 금세 울음을 그쳤고, 개에게 물린 것은 잊어버린 채 나와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 후에도 다행히 은상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 집 안으로 더 이상 함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쫑은 원래 공격적인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은상이가 들어왔을 때, 쫑은 하필 새끼들을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매우 예민할 때였다. 그럴 때는 나도 무서워서 쫑 옆에는 잘 가지 않았다. 새끼들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쫑 옆에 가면, 평소에는 순한 쫑이 나에게도 슬쩍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 소리를 냈다. 은상이는 그걸 모르고 무작정 나를 찾아 집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하긴 쫑의 엄마인 ‘매리’는 더 크고 무섭고 사나웠다. 매리 역시 사람을 물었던 전적이 있어서 언제나 자기 집에 연결된 줄에 묶여 있었는데, 내가 더 어릴 때라서 그랬는지 매리는 나를 아주 만만하게 보고 으르렁댔다. 그때 나는 매리가 무서워서 엄마 다리 뒤에 숨었을 뿐 매리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언제나 꼬리를 바짝 세우고 큰 소리로 짖어대던 매리에 비하면, 그녀의 딸인 쫑은 매우 여리고 순하고 꼬리도 곧잘 뒷다리 사이로 내리면서 눈치를 잘 보는 잡종이었다.
명이와 은상이는 한 집에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대문을 이용했다. 그 집은 우리 집 맞은편에 있었던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 집은 희한하게 두 기와집이 하나의 집 안에 있었다. 다시 설명하자면, 그 집 대문을 들어섰을 때 오른쪽에 먼저 하나의 집이 있고, 더 안으로 들어가면 별채 또는 안채 같은 또 하나의 집이 있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집에는 은상이가, 두 번째 집에는 명이가 살았다. (그 넓은 두 집을 합해도 그 오른쪽에 있었던 크라운맥주 부사장 집의 크기에 훨씬 못 미쳤다.)
나중에 추측해 보건대, 아마 뒤에 살던 명이네가 집주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 집도 ‘한 대문 세 가족 또는 네 가족’ 정도 되는 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집의 대문도 우리 집 대문처럼 항상 열려 있었다.
명이와 은상이가 살던 집 바로 아랫집은 우리 동네의 골목대장인 정수 형이 살았던 집이다. 골목대장은 나보다 세 살 위였고 꽤 온순한 사람이었다. 나이도 많고 성격도 순한 편이어서 우리는 그를 좋아했고 잘 따랐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그는 바깥에서 노는 시간이 확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우리 동네 아이들의 ‘조직’ 결속력은 저절로 매우 느슨해졌고, 모이는 시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정수 형은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비교적 자주 바깥에 나와서 우리들과 어울렸다. 정수 형 부모님은 그런 아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바깥에 나가서 세 살이나 어린 우리와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몹시 꾸중하곤 했다. "네가 중학생이 되어서도 어린애들과 뛰어놀 때냐?"
나의 셋째 누나와 동갑인 그가 중학생이 된 후에도 우리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 관해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나잇값을 못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해야 할 나이에 어린애들과 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내가 중학생이 된 후에 나는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 그러니까 중학생 정도 되면 동네 골목에서 노는 것이 예전처럼 재미있지 않고 점차 나가서 뛰어노는 것에 흥미를 잃게 된다. 학교 공부는 초등학교 때와는 아주 달라지고 개인적으로도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수 형이 굳이 밖으로 나와서 우리와 어울린 것은 그만큼 그가 우리를 좋아했으며 바깥에서 놀던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정수 형네 집은 그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오랫동안 살던 단층집을 부수고 거기에다 3층 양옥집을 지었다. 그중 2층인지 3층인지에 살면서 나머지 층은 세를 주었던 듯하다. 그러더니 그가 고등학교 간 다음에는 아예 이사 갔다. 정수 형은 자기 집이 머지않아 이사 갈 거라는 말을 하곤 했지만 그도 정확히 언제 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작 이사 가는 날에는 이별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났으므로 우리는 매우 허탈하고 아쉬웠다. 그렇게 정수 형네가 이사를 간 후 우리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때 우리에게 이사는 그런 것이다.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 말이다.
훈이 형은 정수 형보다는 두 살이 아래이고 나보다는 한 살이 많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서열 2위였다. 비록 내가 그의 할머니를 무서워하고 싫어했지만, 그와 나는 무척 친하게 지냈다. 사실 동급생인 명이나 은상이보다 훈이 형과 더 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매우 활발한 성격이었고 우리 동네의 행동대장이었지만, 정수 형이 중학생이 된 후 그를 대신해서 우리의 골목대장이 될 만큼 리더십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아니, 어쩌면 정수 형이 중학생이 된 후에도 자주 나와서 우리와 어울리면서 골목대장으로서 장기집권 한 탓도 있다. 그래서 정수 형의 골목대장 지위가 완전히 끝났다고 느낄 새도 없이, 훈이 형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정수 형네 집에 비해 엄격한 가풍을 지닌 훈이 형의 할머니와 부모님은 훈이 형이 중학생이 되어서부터는 바깥에 나가서 놀지 못하게 했던 듯하다. 하여간 훈이 형은 할머니에게 꾸중을 들으면서 나와서 놀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더니, 훈이 형은 곧 이사 갔다. 그러니 훈이 형은 우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 동네를 떠난 것이다. 그렇게 떠난 훈이 형이 그리웠지만, 우리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가 떠남으로써 동성여관과 할머니들이 살았던 그 골목은 매우 조용해졌다. 우리도 훈이 형이 떠난 그곳에 가서 놀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그때는 나도 어느덧 5학년이 되었다. 그러자 저절로 골목에서 뛰어노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훈이 형은 떠났고 정수 형은 바깥에 잘 나오지 않았으며 나왔다 해도 금세 집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왠지 모르게 아이들과 노는 것이 점점 재미없다고 느꼈다. 또한, 5학년 여름부터 나는 이미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고 교회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특히 그해 가을부터 어린이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나는 교회친구들과 주로 어울리게 되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녀본 사람은 잘 안다. 교회에서 성가대를 해본 사람은 더 잘 이해한다. 주말에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교회에서 친한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교회에는 또 얼마나 행사가 많은지. 교회에 빠져들면 그것이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나는 교회 예배와 행사 외에 교회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결과적으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어들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동네 친구들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새로운 세계로 들어갔고, 다시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중에 아무도 그렇게 빨리 우리가 변할 날이 올 줄 몰랐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그런 날들은 찾아왔다. 우리는 특별히 작별 인사나 별다른 의식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각자 그런 순간을 받아들였다. 모두 이미 알고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또 아주 당연한 일을 하듯, 모두 각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에게 원래 특별한 조직이나 모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 '우정'이라는 이성적이고도 감정적인 단어를 입에 올릴 만큼 머리가 크지도 않았다. 그래도 동네 골목에서 뛰어놀면서 여러 해 동안 동고동락하던 사이였는데, 그렇게 순차적으로 별 말도 없이 헤어지게 된 것은, 훗날 생각해 보면 약간 놀라운 일이다.
나중에 나는 궁금하기는 했다. 우리 동네 아이들만 그랬던 것인지, 혹시 다른 동네 아이들은 우리처럼 돌연히 헤어지지 않고 특별하고 장중한 작별 인사라도 했는지. 그러나 나는 다른 동네 아이들도 우리와 별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동네 친구들은 대체로 그렇게 어울리면서 자라다가 돌연히 떠나갔다.
날마다 온종일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우리의 한 시대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감되고 있었다.
<추신>
오래가는 친구.
나는 가끔 오래가는 친구 관계는 어떻게 탄생하고 유지되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내가 중고등학교를 지나면서 교회친구들과 자주 논의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명확한 결론을 찾았다는 기억은 없다.
친구 관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친함의 성격이나 정도를 판단하고 느끼는 것이 달라서, 일률적으로 어떤 수준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친구를 포용하는 능력은 다르고, 친구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감정이나 생각도 다르다. 친구 관계는 매우 자연스럽고 간단하게 자리를 잡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런 관계로 남기가 극도로 어렵기도 하다.
진정한 친구 관계는 일부러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아무 노력도 안 하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자기의 성격에 딱 맞는 사람만 찾아서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에게 딱 맞는 사람만 친구로 두려는 사람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사람을 금세 피하고 멀리하게 되므로 결국 친구가 별로 없게 된다. 한 마디로, 사람을 너무 가려서 까다롭고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런 사람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고 평가받을 때가 많다.
물론 자기 성격에 잘 맞지 않는 사람과 오래가기도 힘들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서로 맞지 않음을 깊게 느끼면서 돌연히 돌아서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자기에게 잘 맞는 상대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종종 잘해주고 나서 상처를 입을 때도 있다. 그래도 그렇게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어쩌면 더 오랜 친구로 남기도 한다. 서로 다른 점을 알고 보완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서로 갈등이 생기고 극복하는 시련 과정을 수차례 겪으면서 저절로 우정도 단련이 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 관계를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것은, 단 둘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만날 때 그중에서도 특히 가까운 친구를 두는 것이다. 그런 친구는 단 둘의 관계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린다는 객관적 상황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을 준다. 교회 친구들은 그렇게 되기가 편하다. 저절로 여럿이 정기적으로 오랫동안 만나게 되고, 거기에서 상대방을 서로 알아가면서 친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나의 경험상, 너무 어릴 때 만나고 거기에서만 머문 친구는 훗날까지 친구로 남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훗날까지 친구로 남기 위해서는 내가 보기에는, 사춘기 정도는 지나서 만남의 관계를 성실하게 유지할 때 가능한 것처럼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사춘기가 지나면서 한 개인으로서 자아의식이 자라나고, 타인과 명확히 구별되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인간성이 확립되는 듯하다. 그렇게 자기 주체성을 가지게 되고 자기만의 정체성과 주관이 제법 또렷해졌을 때, 바로 그때쯤 이미 유지되고 있었거나 새로 만나서 친해진 사람이 결국 일생 동안 친구나 지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사춘기 이전에 만났다가 헤어진 친구들은 서로 자신의 온전한 주체성이나 객관화된 인간의식이 결여된 채 놀이 단계에서만 어울렸던 관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춘기 이후에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뚜렷한 자아를 정립하면서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또 그런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자아들이 서로 호의적인 관계를 형성해 갈 때 사귀게 되어서, 공통의 경험과 추억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친구나 지인으로 남게 된다.
이런 생각이 꼭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경험을 돌이켜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