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줄거리]
서울특별시 대방동에서 태어나서 자란 나는 그곳에서 성장하면서 얽힌 깊고 오래된 추억을 가지고 있다. 작년 12월부터 나는 그곳에서 자란 여러 추억을 브런치스토리에 연재하다가 잠시 중단했다. 그때까지 썼던 부분은 여기(https://brunch.co.kr/magazine/walkorride)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남중학교 옆에 있는 동네에는 대방교회가 있고, 우리 집은 대방교회에서 남쪽으로 네 번째 집에 있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사라졌고 동네 건물들도 모두 바뀌었지만, 다행히 대방교회와 강남중학교는 그 위치에 그대로 있고 도로 형태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여전히 옛 추억을 되살릴 흔적이 남아 있다. 옛 집들과 거리가 모두 사라진 채 그 위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만 남은 동네에 비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동네에서 네다섯 살 무렵부터 고등학교 2학년 초까지 살았다.
1.
내 어머니 가족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어머니의 형제자매들은 매우 우애가 좋게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였는데, 그때마다 형식을 갖춰 예배를 봤다. 예배를 보기 위해서 가족이 모였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가족이 모인 김에 잠시 예배를 봤다고 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현대 자본주의에 걸맞게 간편화된 개신교 예배는, 기도와 찬송, 말씀 나눔 (설교), 다시 찬송과 기도라는 기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어머니 가족은 큰외삼촌을 중심으로 그런 형식을 갖춰서 30분 정도 예배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예배 후에는 늘 예배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식사와 대화가 이어졌으므로, 나에게는 아무래도 그것이 종교적 모임이라기보다는 가족 모임이라고 느껴졌다. 가족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모이는 김에 기독인들답게 예배를 보았다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맞을 것이다.
어른들이 예배를 보는 동안 초등학생 초년생이었던 나는 주로 마당에서 큰 외사촌형의 아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와 큰외삼촌의 나이 차가 많이 났고, 나는 또한 우리 집에서 막내여서, 나에게는 조카인 그 애의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다. 그와 나는 원래 자주 만나지 않아서 어울리기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특히 나이가 같은데 내가 오촌 아저씨여서, 어린 나이임에도 상대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친족관계로 따지면, 그 애는 나에게 ‘아저씨’라고 불러야 하지만 같은 나이에 그렇게 부르는 것은 서로 거북한 일이었다. 그럴 때는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게 상책이라서 우리는 대체로 호칭 없이 놀았다.
때때로 그 조카가 오지 않는 날 나는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어머니 옆에 앉아서 낯선 예배 시간을 견디어내야 했는데, 가장 당황스럽고 곤란한 것은 예배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성경 구절을 읽는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워서 글자를 읽을 줄 알았지만 어른들이 삥 둘러앉은 곳에서 뜻도 알기 어려운 낯선 글을 읽는 것은 떨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거의 다 그랬지만, 어머니가 사용하는 성경도 글자가 세로로 적혀 있어서 나는 글자 옆에 손가락을 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읽어야 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잔뜩 긴장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성경 구절을 읽고 나면 이모와 외삼촌은 “어이구, 벌써 한글도 잘 읽네”라고 칭찬해 주었고, 나는 뭔가 해냈다는 기분에 가슴속으로부터 뿌듯함을 느꼈다.
어머니는 오빠 둘, 언니 하나, 남동생 하나인 오 남매 가운데 아래에서 네 번째였다. 예배 모임에는 다섯 남매 외에 그들의 배우자들도 두세 명 정도 참석했다. 특히 둘째 외숙모는 거의 매번 왔으며,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셋째 외숙모도 가끔 참석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나의 사촌들도 참석했다. 둘째 외숙모의 아들딸과 이모의 외동딸인 경미누나는 특히 우리 형제자매와 친했다. 그들의 나이가 우리 형제자매와 비슷하기도 했고, 다른 사촌들보다 서로 친해져서 대화를 나누는 데 부담이 가지 않았다. 어머니도 형제자매 가운데 이모와 가장 친했고, 그다음으로 둘째 외삼촌과 가깝게 지냈다. 나도 나중에 그렇게 느끼게 되었지만, 형제자매 가운데도 서로 잘 맞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어머니 가족은 토요일 오후에 큰외삼촌 집에서 모였다. 그 집은 당시에 개량된 기와집이었는데, 짙은 연두색 철제 대문을 지나 안으로 좁고 깊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오른쪽에는 폭이 좁은 화단이, 왼쪽에는 집이 기다랗게 놓여 있었다. 대문이 동향이라 집은 남쪽을 향해 길게 지어진 탓이다. 큰외삼촌은 대청마루를 오래전에 유리문으로 막아놓고, 거실을 큰 방으로 꾸며 놓았으며, 여러 개의 방 앞으로 긴 나무 마루 복도를 꾸며놓았다. 어머니와 이모와 삼촌들은 깨끗하게 정돈된 안방에 둥글게 둘러앉아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으며 성경 구절을 읽은 후에 큰외삼촌이 ‘설교 비슷한’ 짧은 강론을 했다. 큰외삼촌은 장로님이었고 가족의 예배 모임을 이끌었다.
예배 후에는 곧바로 음식을 먹는 시간이었다. 마당에서 놀고 있던 내가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예배가 끝나면 외삼촌들은 직사각형 모양의 갈색 나무 상을 세 개나 꺼내어 접혀 있던 상다리를 펴서 가족 모두가 둘러앉을 수 있도록 나란히 붙여 놓았다. 그 사이에 어머니와 외숙모들은 부엌으로 가서 미리 준비한 음식들을 접시에 옮겨서 들여왔다.
큰 외숙모는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으레 예배 시작 전에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 정갈한 반찬 몇 가지와 함께 주로 떡국이나 만둣국, 또는 갈비탕 등이 나왔으며, 식사 후에는 언제나 사과나 수박 같은 과일이 등장했다. 회계사로서 가장 부유했던 셋째 외삼촌은 바빠서 그랬는지 아니면 집이 멀어서 그랬는지 가족 모임에 자주 빠진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 교사였던 셋째 외숙모도 아주 드물게 참석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나의 아버지와 이모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외가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 집은 강남중학교와 대방교회 사이에 있었고 큰외삼촌 집은 우리 윗동네에 있었으므로 가족들 중 거리상으로는 가장 가까웠다. 빨리 걸으면 우리 집에서 5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나의 외조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큰외삼촌은 외가에서 부모 역할을 하셨다. 그래서 오빠라고 해도 어머니는 나이 차이가 많은 큰외삼촌을 어른 대하듯 했다. 우리 집과 그렇게 거리가 가깝다 해도 큰외삼촌은 우리 집에 오는 일이 없었고, 어머니는 나를 포함한 자식 다섯을 키우면서 살림을 하느라고 늘 바빠서 평소에는 큰오빠를 찾아갈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한 달에 한 번씩 있었던 외가 모임은 그들이 우애를 나누는 좋은 방법이었다. 큰외삼촌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말이다. 그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외가의 정기적인 모임은 어느덧 사라졌다.
외가 모임에 갈 때 어머니는 주로 어린 나만 데리고 가셨다. 형과 누나들은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았다. 당시에 어머니는 겨우 사십을 갓 넘었을 때였다.
어머니는 이모 집에 가는 것처럼 버스를 타고 외출할 때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얼굴을 자세히 보면서 화장을 하고 가능하면 예쁘고 화사한 옷을 입었다. 평소에는 온갖 집안일을 하느라고 스스로 가꿀 일이 없었던 어머니는 교회 사람들이나 친정 동기들을 만나기에 앞서 감춰진 자신의 미모를 한껏 드러내고자 예쁘게 가꿨다. 나는 엄마가 화장할 때면 때때로 그 옆에 앉아서 엄마의 화장대에 있는 화장품이 하나씩 열리고 엄마의 얼굴에 묻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커다란 화장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화장했는데, 나도 그 거울을 통해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예쁜 화장품 갑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고, 그 냄새는 엄마의 얼굴과 손으로 옮겨졌다.
엄마는 주로 밝은 색깔의 양장을 차려입었다. 엷은 푸른 색깔과 부드러운 분홍색 양장을 입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단정한 파마머리를 하고 밝은 분홍 양장 투피스를 입었던 예쁜 모습이다. 엄마의 피부는 그 시대 여성 치고는 매우 하얀 편이었다. 그렇게 밝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인지 모르지만, 어머니 피부는 햇빛을 직접 받으면 금세 붉어지는 민감한 피부였다. 그래서 햇빛이 밝은 여름날 나갈 일이 있을 때 어머니는 늘 양산을 쓰고 다녔다. 그렇게 예쁘게 꾸민 어머니와 함께 외출할 때 나는 괜스레 기분이 들떠서 나가기 전에 집안에서 이 방 저 방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모 집이나 외삼촌 집으로 갈 때 나는 친척 어른들을 만나게 된다는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지만, 예배 후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나갈 때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다녔는데, 그것은 어린 나에게 안전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큰외삼촌 댁이 아니라 먼 곳을 가게 될 때 버스를 타면 엄마는 한 손으로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키가 작은 내 머리나 어깨를 잡아당겨서 나를 옆에 바짝 붙여서 보호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나는 엄마의 허리를 잡고 버티었다. 엄마의 허리에 나의 얼굴이 닿았으므로 나는 버스가 흔들리는 불안감 가운데서도 엄마 옷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화장품 냄새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언제나 엄마의 냄새라고 기억했다.
2.
어머니를 따라서 외갓집에 가는 것보다 훨씬 멀리 갔던 곳이 있다.
충청북도 괴산.
아버지의 고향이다. 그곳은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갔던 가장 먼 곳이다. 긴 겨울방학이 시작된 후 크리스마스와 신정이 지난 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의 형제자매가 있는 시골로 갔다. 괴산에 있는 큰아버지 집으로 가기에 앞서 청주에 있는 고모 집에 들르기도 했으므로 그것은 매우 먼 길이었다.
외가든 친가든 나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두 할아버지는 모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또는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에게 그들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단지 친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때이긴 하지만 우리 집에서 살고 계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집이 왕십리에서 대방동으로 이사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할머니의 모습은 이어지지 않는 어렴풋한 흑백 사진들처럼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는 아마 내가 네 살, 또는 많아야 다섯 살이었을 것이다. 거실 마루에 큰 침대가 있었고, 할머니는 늘 거기에 계셨다. 나는 할머니가 일어나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 있거나 침대 모서리 또는 거실 마루 끝에 앉아 계셨다. 매우 연로한 할머니는 그 당시 이미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던 듯하다.
할머니 장례식은 맑은 가을날 치러졌다.
나는 할머니가 언제부터 우리 집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는지, 또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어떻게 치러졌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장례식에 관한 한 어렴풋이 이런 기억만 남아 있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도 없는 어느 맑은 날 아침, 우리 집 앞에 하얀 색깔의 영구차가 와 있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영구차는 장의사에서 시신과 유가족 등의 이동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큰 버스였다. 버스의 외부는 온통 하얀색이어서, 누구든지 그 버스를 보면, ‘아 영구차구나’라고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할머니를 무덤에 묻으러 가던 날 아침, 거대한 영구차가 우리 집 대문 앞에 서 있었고 많은 어른들이 우리 집 안에 있었다. 큰 버스가 대문 앞에 서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대화하면서 오갔으므로 나는 매우 들떠있었다. 큰누나는 어린 나를 돌보면서 나의 옷을 갈아입혔으며, 나는 누나들과 함께 그 영구차에 올라탔다. 그것은 내가 영구차에 탔던 유일한 경험이다. 버스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탔고 어딘지 모르는 장지로 갔다. 시신이 누운 관이 버스 앞부분 운전기사 옆자리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때 영구버스에서는 그렇게 했으니까.
당신도 오래전에 하얀색 버스로 된 영구차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구차를 보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구차를 애써 외면하려고 하거나, 영구차를 빠르게 지나쳐 앞서가려고 노력한다. 영구차에 따라붙는 ‘죽음’이라는 이미지에서 가능하면 피하거나 멀어지려는 심리 탓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 그렇게 기분 좋지 않은 일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매우 특별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은 관습적 사고를 바꾸려는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처음에는 하얀 영구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길바닥에 침을 뱉고 오른발을 든 채 왼발로만 다섯 번 콩콩 뛰었다. 혹시라도 영구차에서 전해질 수 있는 액운을 막기 위한 방법이라고 배웠던 듯하다. 그것은 죽음을 멀리 하려는 본능으로 인해 생긴 희한한 주술의식이었을 것이다.
“영구버스다. 재수 없게.”
영구버스를 보면, 오른발을 허공에 들어 올리고 왼발로만 서서 콩콩콩콩콩 뛰면서 말하곤 했다.
“야, 너는 왜 안 해? 영구버스 보면 이렇게 하는 거야. 안 하면 재수 옴 붙어.”
동네 형이나 친구들이 나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옮겨질 수도 있는 액운을 그렇게 털어내는 것이라고. 그렇게 액땜하는 방법을 배운 이후 나는 영구차를 볼 때마다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초등학생 때의 이야기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는 죽음에 관해서 조금 더 성숙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죽음을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자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거기에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우리의 의식이 약간 성숙해진 탓도 있거니와, 교회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사후 세계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신앙심을 약간이나마 갖추게 된 탓도 있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친해진 광현이라는 친구와 대화하다가 영구버스를 보았을 때 우리는 어릴 때처럼 한 발로 콩콩 뛰는 대신, 더 이상 영구차를 보는 것이 재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영구버스를 보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의 잘못도 영구차 기사의 잘못도 아닌데 굳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으며, 장례식 또는 죽음을 불길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맞지 않는 일이라고 이해했던 듯하다. 영구차는 어차피 모두 죽게 되는 인간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돕는 수단일 뿐인데 그런 것을 보고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후로는 영구버스를 보면 거꾸로 "재수가 좋다"라고 의도적으로 말하곤 했다. 시신을 싣고 다니는 영구차를 보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는 그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꾸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길거리에 지나가는 영구차를 봐도 기분이 이상하거나 나쁘지 않게 되었으며, 심지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도 같았다. 그것은 가령, 시험을 앞둔 날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영구버스를 보면 시험을 잘 볼 것 같은 예감을 말한다.
당신도 한번 그렇게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말해보라.
영구차를 보면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그런 독백을 자꾸만 반복하다 보면 당신도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쁜 징크스 같은 것을 피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불운한 징크스라고 생각했던 것을 어느 날부터 정반대로 행운의 상징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말하다 보면 어느 날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어릴 때 깨달은, 인생의 첫 번째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