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15)
3.
아버지는 누나 셋, 형 둘, 그러니까 여섯 남매 집안의 막내였다.
경제적으로 거의 몰락한 집안에서 자란 아버지는 일찍이 집을 떠나서 자수성가한 분이다. 그는 겨우 열일곱이 되었을 때 희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남지 않은 시골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정월 초에 막내아들을 보내는 할머니가 눈물과 함께 싸준 감자를 등에 지고 아버지는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에서 사촌 형을 만난 후 그들은 함께 의기투합하여 젊은 혈기를 믿고 만주로 갔으며, 거기서 자동차 정비 사업을 벌였다.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분이 아니다. 자동차 정비는 함께 갔던 사촌 형이 했고,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촌 형은 기술자이고 아버지는 사업가였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만주 체험을 들었을 때, 나는 자동차 정비소를 떠올렸지만 만주의 모습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아버지의 사업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정비 기술이 없다 해도 눈썰미가 좋았고 눈치도 빨랐으며 말주변과 대인관계가 좋은 분이었다. 그 시대에 자란 분들이 모두 그렇듯이 아버지도 떠듬떠듬 일본어를 했는데, 아마 자동차 정비소 고객들이 주로 일본인들이었던 듯했다.
어쨌든 만주에서 여러 해를 보낸 후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꽤 큰돈을 벌고 나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하셨다. 아버지는 먼저 충청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서울로 와서 대방동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때까지도 또 그 이후로도 아버지의 형제자매인 큰아버지 두 분과 고모 세 분은 모두 충북 괴산과 청주 등지에 살았으며, 대한민국에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시기에도 아버지처럼 서울에서 살겠다고 오시지 않았다.
나의 친할머니가 인생 말미에, 시골에 있는 큰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최 씨 집안의 장손이면서 아버지의 큰형이었던 큰아버지의 집에 계시지 않고 서울에 있는 우리 집에 머물렀던 데는 중대한 사연이 있다. 그것은 밝히기 거북한 집안일이긴 하지만, 나와 우리 집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으므로 여기서 밝히기로 한다.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모르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큰아버지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한다. 바람을 피워도 그것을 비밀에 부친다거나, 불륜이 들킨다 해도 일련의 다툼 끝에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조강지처와 이럭저럭 살게 되거나, 아예 대놓고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이 당시 바람났던 보통 한국 남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어쩌면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찾기라도 했다는 듯이 사생결단의 자세를 보였다.
큰아버지에게 그것은 일시적인 바람이 아니어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와 자녀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아예 나가서 그 여성과 따로 살림을 차렸다. 그렇게 되기 이전에, 큰아버지의 여성 편력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친척들이 ‘첩’이라고 낮춰서 불렀던 그 여성과 큰아버지가 살림을 차리기 위해서 어떤 고난을 감내했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또한 그가 그런 어려운 결정을 통해 무엇을 포기했고 어떤 비난을 받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요즘 같으면 그냥 유부남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전처와 “헤어졌다’거나 ‘이혼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런 문제를 놓고, 무조건 큰아버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늘날 이혼한 사람을 예전처럼 비난하는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으니까.
그러나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와 자녀들을 버려두고, 그들을 위해 경제적 책임도 제대로 지지 않으면서, 다른 여성에게 간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큰아버지가 ‘첩’이라는 여성과 살림을 차리기 이전에 그가 그의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어떤 혜택을 주고 있었는지, 또 그가 떠난 후 그의 가족이 어떤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 내가 기억하는, 뒤에 남겨진 결과를 볼 때, 나의 친할머니와 큰어머니와 그의 자녀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살았으며 그 여파가 우리 집까지 밀려왔던 것은 확실하다.
큰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힘겹게 생활을 이어야 했던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결국 지경을 떠나기로 했던 듯하다. 한 마디로 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특히 어머니로부터 큰아버지가 술을 매우 좋아하고 여자를 밝히고 도박을 좋아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분이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그 결과에 따른 피해자였으므로, 큰아버지에 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여러 악담을 퍼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큰어머니와 고모들까지 포함해서 집안의 친척 어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큰아버지에 관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나의 사촌형들인 그의 세 아들들마저도.
그때 들었던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분은 우리 집안의 장손으로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안의 재산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욕심도 많아서 그렇게 물려받은 재산을 아우들이나 누님들과 적절하게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 재산을 술과 여자와 도박과 무능으로 점차 탕진한 분으로 전해진다. 심지어 나의 아버지가 만주에서 번 돈의 일부를 큰아버지에게 주었고, 큰아버지는 그 돈으로 잃었던 선산을 되사고 밭도 여러 마지기 샀다고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듯하다.
우리 가족은 갑자기 극도로 빈궁해졌는데, 바로 그때가 앞서 적었던 '한 대문 세 가족'에 관한 우리 집의 역사가 펼쳐진 시기였다. 예뻤던 우리 집 마당은 졸지에 파괴되었다. 아버지는 앞마당 대문 옆과 옆마당 우물가에 각각 방과 부엌을 만들고 거기에다 세를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일곱 명이나 되는 우리 집 형편이 핀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돈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면서 마음이 몹시 상할 때마다 과거에 아버지가 큰아버지에게 준 돈을 지금이라도 되돌려 받아오라고 윽박지르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도 아버지는 고개만 숙이고 거기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는데, 큰아버지가 돈을 갚을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큰아버지는 장손으로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밭과 산을 팔고, 나아가 아버지가 준 돈으로 되찾은 선산과 밭들까지 온갖 재산을 처분하셨을 것이다. 그로 인해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그 동네에서 살 수 있는 방편이 마땅치 않았던 듯하다.
그러니 나 역시 인생을 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로 한 번 나간 돈은 다시 돌아오기가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두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돈을 그냥 주면 줬지 절대로 꿔주지 말라고, 꿔주면 의까지 상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쉽게 된단 말인가. 나는 어머니의 마음도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하여간, 큰아버지의 뒤늦은 사랑 타령과 경제적 무능력으로 인해 친할머니는 서울 대방동에 있는 막내아들 집으로 오게 되었고, 큰어머니는 신길동에 있는 큰 사촌형 집으로 와서 살게 되었던 듯하다. 그때가 대충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후 시절의 이야기다.
큰아버지가 큰어머니와 가족을 버리고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대방동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큰아버지의 세 아들 중 첫째와 둘째 두 아들은 모두 괴산을 떠나 서울로 와서 우리 집에 기숙하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큰아버지로부터 한 푼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두 명을 먹여 살리고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나이 겨우 이십 대 후반 또는 서른 무렵의 일이었다. 한국전쟁 후 여러 해가 지났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가난에 찌들어 살 때였다. 그 불행한 사태는 집안에 방이 한두 칸밖에 없었던 시절에 발생한 일이라, 어머니에게 평생을 두고 지울 수 없는 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빈궁하고 고단한 살림에 어머니가 이미 나의 큰누나와 형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이따금 몹시 어려웠던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당시의 처량하고 곤궁했던 신세를 푸념하셨고, 그런 상처를 안겨준 큰아버지와 시댁 가족과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 사촌형들은 우리 집에서 살다가 큰 사촌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또는 중퇴하고 취직하면서 독립했고, 결국 신길동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내가 큰 사촌형 집에 갔을 때 그는 이미 세 명의 자녀가 있었고, 지금 식으로 따지면 신길동 주택가에서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큰어머니도 신길동 집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일과 관련해서, 충청도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막내딸로 곱게 자랐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살림을 차린 후에 겪었던 쓰라린 아픔을 나는 충분히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에게 그것은 대가족제도와 가부장주의 문화에 익숙한 자기 집안의 일이고 의로운 마음으로 장손 집안을 살리고 큰형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노력한 것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로서는 전혀 원하지 않았고 겪지 않아도 될 엄청난 불행이 자신의 운명이라도 되는 듯 덮쳐진 일이고 일생동안 크나큰 상처와 희생으로 남았던 기억일 것이다.
4.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굳이 먼 시골까지 간 데는, 선산에 계신 나의 조부모님과 다른 친척 어른들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나도 내 딸을 부모님이 계신 묘지로 데리고 가서 보여주고 인사드리도록 하고 싶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렇게 했으니까 하는 말이다.) 또는 가난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던 당시 우리 집에서 나만이라도 겨울방학 기간 동안 시골에서 보내도록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 겨울에 눈 덮인 선산으로 어린 나를 데리고 가서 조부모님 묘소 외에도 내가 알지도 못하는 다른 할아버지들의 묘소 앞에서 절하게 했다. 거기에는 필경 증조할아버지 묘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곳에서 백 년 전 조상 할아버지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묘지를 찾아가서 절하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낯선 일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나는 설날 세배 외에는 절을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때 나에게 세배가 아닌 절이란, 아마도 어떤 친척 어른이나 아버지의 친구를 만났을 때 옆에서 아버지가 “어른에게 큰절해야지”라고 말했을 때나 하는 인사였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우리 집에서는 제사를 지낸 적이 없다. 아버지 집안의 모든 제사는 시골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서 지냈다. 나중에 집안의 어른인 큰아버지가 ‘풍비박산’이 난 집안에서 적절하게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일은 신길동에 사는 장손인 큰 사촌형에게 대물림되었다.
성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인해 나는 시골에 가기 전까지 제사는커녕 (그때까지 무덤을 본 적도 거의 없었지만) 무덤 앞에서도 절을 해보지 않았다. 시골에 가기 전까지는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의 무덤이 멀리 있었으므로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형제자매 모임에서 외조부모님의 묘지에 가보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기독교인이라 추도식이라는 예배를 보았을 뿐 절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이사 오는 집에서 새집에서 운수 대통하고 잘 살게 해달라고 굿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집에서 이웃에게 돌리는 '고사떡'이 우리 집에 와도 어머니는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귀신이 먹고 난 떡'을 먹을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나도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고사떡을 먹지 않았다.
절은 세배와 비슷한 행동이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거나 묘지에 가서 절하거나 제사에서 절하는 것 등을 조상 신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금지행위로 가르쳤다.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우상숭배를 금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은 서로 다른 입장에 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 해도 천주교인은 오랜 고심 끝에 아시아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그들이 제사를 지내고 절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것은 조상에 대한 추모 의식을 갖춘 동양의 관습일 뿐 우상숭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18세기말에 조선으로 천주교가 처음 전래됐을 때, 제사를 지내고 조상에게 절하는 문제는 새롭게 천주교인이 되고자 했던 조선인들에게 극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19세기말에야 조선으로 들어왔다.) 천주교인들은 제사 문제로 인해 깊은 갈등을 겪었고 신앙의 위기를 맞았다. 정조 시대에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천주교를 굳이 탄압하지 않고 ‘사학’ 정도로 취급하면서 성리학인 '정학'을 잘 가르치면 사학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 천주교인들이 신앙심을 수호한다면서 과감히 제사를 거부하고 신줏단지를 불태워버리면서 천주교에 대한 유화적 태도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이 불가피해졌고, 특히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반서양 쇄국정책과 함께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로마교황청은 제사 문제를 두고 깊은 논의 끝에 1939년에 이르러 동양의 특수성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제사를 동양 특유의 관습이자 미풍양속으로 받아들이고 천주교인들에게 이를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은 비로소 전통적 제사와 신앙 사이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교인들로 하여금 제사와 절을 거부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들에게 제사나 절은 여전히 일종의 우상숭배로 여겨진다. 그들에게 제사에서 하는 절은 설날에 살아있는 부모님이나 어른에게 세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도 충실한 장로교인들이었으므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며, 나는 저절로 그 영향을 받았다.
나는 지금 그것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때 나는 집안의 기독교적 문화와 영향력으로 인해 아버지를 따라 선산으로 올라갔지만 묘지에서 절하는 것을 매우 어색하게 느꼈다. 더욱이 눈도 녹지 않은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서 하는 것이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나는 시골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낯선 무덤 앞에서 아버지를 따라서 넙죽넙죽 절을 했다.
훗날 교회를 열심히 다닐 때에도 나는 큰 사촌형 집에서 치렀던 제사에 가서 아무 주저 없이 절을 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 역시 보수적인 장로교라서 제사와 절이 괜찮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런 문제로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제사에 가서 절하는 것이 나의 신앙에 어떤 영향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절을 하면서 나는 내가 할아버지나 조상 신을 영접한다고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런 과정에서 내 마음속에서 어렴풋이 단단해지고 있었던 신앙심이 위태롭다거나 시험에 들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이미 어느 정도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되어서 나는 귀신이 있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그렇게 큰 사촌형 집에서 지냈던 제사에 참여하고 절까지 하고 난 이후 나에겐 더 이상 그럴 일이 없어졌다. 중학교 2학년이 될 때부터는 큰 사촌형 집에도 갈 일이 거의 없었고, 아버지도 더 이상 나에게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면서 나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기 주관이 뚜렷해져서 주로 친구들과만 어울리려고 하지, 부모님을 따라다니지 않는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제사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다. 제사와 절에 관해 덧붙이자면, 현재 나는 뉴욕주 업스테이트에 있는 나의 부모님 묘지에 가서도 절을 하지 않는다. 나는 비석 앞에 서서 그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념할 뿐이다. 나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종교적 또는 관습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 부모님 묘지에 갔을 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잠시라도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것이지, 절이나 기도와 같은 형식적 행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