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16)
5.
서울에서 내내 자란 내가 청주와 괴산으로 갈 때는 으레 어색하고 번잡한 일들이 벌어졌다. 자주 볼 수 없는 고모 세 분과 큰아버지 두 분,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까지 두루 만날 때 더욱 그랬다. 그들은 한 마을에 모여 사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버스를 타고 이 집 저 집으로 찾아가서 인사해야 했다.
아버지는 육 남매 중 막내였고 나는 오 남매 중 막내였으므로, 친척을 만날 때 종종 난처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를테면, 집안에서 가장 웃어른인 큰고모의 손주들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데서 벌어지는 상황이다. 어머니를 따라서 외가 친척들을 만날 때도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시골에 가서도 나의 친사촌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자녀들 중 다수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시골 친척들은 대체로 대학도 가지 않고 일찍 혼인하고 바로 자녀를 낳아서 더욱 그런 듯했다. 나의 오촌조카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초등학교 초년생인 나는 매우 어색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기껏해야 겨우 일 년에 한 번 보는 우리들 앞에서 어른들은 항상 우리의 서열을 따져서 알려주었다.
“나이는 더 어려도 서울에서 온 오촌 아저씨다. 함부로 반말하지 말고 어른으로 대해 드려. 그게 옳은 법도다.”
혹시라도 내가 나이 어리다고 불편하거나 욕이라도 볼까 걱정해서 나의 큰고모와 사촌들은 나를 위해 그들의 손주와 자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보다 나이 많은 오촌 조카들은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부르기 어려워했고, 나 또한 그들의 이름을 함부로 낮춰 부를 수 없었다. 어차피 대화할 내용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것은 서울에 있을 때에 비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서울에서도 신길동에 사는 큰 사촌형의 딸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는 제사를 지낼 때 외에도 나는 가끔 큰 사촌형 집으로 놀러 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 나의 아버지의 동생 정도로 보이는 사촌형에게 "형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나보다 삼십여 살이나 더 많은 그를 차마 형님이라 부를 수 없었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의 딸들에게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면서 대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아주 가끔은 킥킥거리면서 그들은 어린 나에게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며 놀리곤 했다.
그런데 시골에 가면 그런 어색한 상황이 가는 집마다 벌어졌다. 항렬이 나와 같지만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은 사촌들, 그리고 때때로 나의 형이나 누나 정도 나이지만 나보다 아래 항렬인 오촌 조카들 앞에서, 나는 그저 어리고 수줍은 사촌 동생 또는 오촌 아저씨였다.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쑥스러워서 얼굴만 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숫기가 없고 점잖기만 한 충청도 사람들인 그들 또한 나를 그저 나이 어린 사촌동생 또는 오촌아저씨로 여길 뿐 별말이 없었다.
아버지와 내가 시골에서 이 집 저 집으로 이동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말이 이 집 저 집이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한 번 이동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하루에 몇 차례 없는 버스를 갈아타면서 이동해야 했으므로 그 시골에서는 누구네 집이든 한 번 가면 적어도 한나절 또는 하루 걸리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고모는 도대체 우리가 언제 오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 기억으로는, 아직 전화도 없었던 상황이라 지금처럼 미리 연락하고 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만약 고모 집에 도착했는데 고모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러면 그냥 기다리거나 다음을 기약하고 떠나는 방법밖에 없었을 텐데, 아버지와 내가 시골에 갔었을 때 집에 아무도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아침 일찍 대방동을 떠나도 두세 번 버스를 갈아탄 후 오후가 되어서야 생골이라는 동네에 있는 첫째 고모 집에 도착했는데, 고모는 서울에 있는 막냇동생이 왔다고 반가운 마음에 우리를 꼭 붙잡고 정성껏 식사를 대접하고자 했다. 따라서 아버지와 나는 거기서 저녁까지 있어야 했고, 결국 거기서 밤을 맞았다.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은 이런저런 나눌 말이 있었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나는 거의 처음 보거나 과거에 봤다 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기 어려웠고 대화할 상대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오촌 조카들이나 동네 아이들을 찾아 나가는 편이 편했지만 나이 많은 오촌조카들은 나를 대하기 어려워했고, 나 혼자서는 길거리가 낯설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함부로 바깥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생골 고모는 서울에서 온 동생인 아버지를 만난 반가움에 으레 자고 가라고 했다. 그런 것이 시골사람들의 정서이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어차피 밤에 이동하기 어려웠고 지경으로 가는 버스 편도 마땅치 않았다. 그 당시에는 시골 깊은 곳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청주에는 전기가 들어오던 시절이어서 밤에도 아버지와 어른들은 늦도록 대화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나는 하릴없이 낯선 방구석에서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해야 다. 그래도 그때는 내가 아주 어릴 때였고 피곤해서 그랬는지 낯선 곳에서도 잠자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모두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움직였고, 나 역시 얼떨결에 깨어나서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먹고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버스 시간에 맞춰서 서둘러 나가야 했으므로, 아버지와 나는 고모와 조카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아버지의 본향으로 가기 위해 나섰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정말로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아버지는 혹시 몇 달 지나서 또는 다음 해 이맘때 다시 고모를 만나러 그곳에 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럴 기약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6.
언제 그곳을 다시 들를 수 있을까.
언제 다시 그곳에 가서 고모를 볼 수 있을까.
만약 아버지가 다음 해에 또 나를 데리고 온다면 고모와 사촌들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들이 서울에 올라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돌이켜보면, 그 같은 우려는 사실로 변했다.
고모 세 분 가운데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던 막내 고모는 다행히 서울에서도 몇 차례 보았지만, 첫째 고모와 둘째 고모는 당시에 시골에서 수차례 본 게 전부다. 내가 청주 등지로 가서 만난 이후 나는 그 고모 두 분과 그들의 자녀들을 일생 동안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내가 겨우 열 살도 되기 전에 청주에서 또는 어느 시골에서 겨우 한나절 하룻밤 만났던 그들을 나는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첫째 고모는 자녀들이 서울에 살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서울에 오실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방동에 살지 않았고, 나이 차가 있어서 그런지 우리 가족과도 그리 가깝지는 않은 편이었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는 고모가 혼자서 우리 집까지 찾아올 일은 없었고, 학창생활에 바빴던 내가 일부러 고모를 찾아갈 일은 더더욱 없었다.
아버지의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먼저 돌아가신 분은 둘째 고모다. 아마 미원이라는 지역에 살아서 그렇게 불렀겠지만, 우리가 ‘미원고모’라고 불렀던 그분은 노인성 지병이 있고 형제자매 중 가장 건강이 안 좋다고 하더니 결국 가장 먼저 돌아가셨다.
그다음에 돌아가신 분은 큰아버지다. 나는 큰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모른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큰아버지와 거리를 두었으므로 그의 장례식에 누가 가보기나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필경 그의 아들들인 사촌형들은 지경까지 갔을지도 모르겠다. 큰아버지와 같은 마을에 살고 계시던 둘째 큰아버지 역시 당연히 큰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시지 않았을까.
미원고모는 서울에 있던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돌아가셨고, 큰아버지와 큰고모는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던 듯하다. 거기까지가 내가 들은 소식이다. 둘째 큰아버지와 셋째 고모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미국으로 온 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친척들의 근황을 알지 못했다. 또는 들었다 해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아주 가까운 사촌들이 아닌 바에야 친척이라 해도 서로 멀리 살아서 친해진 적도 없고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고모나 큰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제때에 한국에 가시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하셨다. 고단한 이민생활에서 열심히 일하던 아버지께서 형이나 누나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갑자기 한국을 다녀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칠십 이순에 다가설 무렵, 그러니까 이미 뇌졸중으로 두세 차례 입원 치료하고 심장혈관 수술까지 받은 다음에, 아버지는 비교적 한국에 자주 가신 편이었는데 가실 때마다 "이번 방문이 마지막일지도 몰라."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누구라도 나이가 들면서 노쇠하여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저절로 그렇게 말하게 된다. 아직 은퇴하지 않은 나도 가까운 친구들이 사고와 암으로 사망한 후에 지금은 나이 든 분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아버지의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큰고모는 오히려 동생들보다 오래 살았지만, 어쩌면 큰아버지 이후에 곧 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고모에 관해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아흔둘이었으므로 그 시대에는 장수하신 편이다. 큰 고모 다음에는 둘째 큰아버지가, 그다음에는 나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셋째 고모가 차례로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싶다. 으레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5년 정도 더 살았으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역시 옛말이 맞는 듯하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자매라 해도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 말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형제자매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큰외삼촌이 가장 먼저 돌아가셨지만, 그다음에는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막내인 셋째 외삼촌이 암으로 돌아가셨다.
미국으로 이민 온 후 집안 살림만 하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어머니가 겨우 기회를 만들어서 서울에 갔을 때, 회계사였던 셋째 외삼촌은 암을 치료하기 위해 이미 은퇴한 시점이었다. 외삼촌은 미국에서 오랜만에 누나가 왔다면서 자동차를 직접 몰고 전국을 여행시켜 주었는데, 어머니는 그 기억을 우리에게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그 삼촌이 암 치료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도 자동차를 몰고 전국을 여행다니면서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몰라."
어머니가 외삼촌들과 이모를 본 것은 그 여행이 마지막이었다. 셋째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몹시 슬퍼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먼저 갔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도 외삼촌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뉴욕과 서울 사이에는 너무 큰 땅과 바다가 놓여 있다. 어머니는 하동안 슬픔 속에서 혼자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셨다.
셋째 외삼촌 다음으로는 어머니의 언니인 이모가, 또 그다음으로는 둘째 외삼촌이 돌아가셨다고 미국에서 들었다. 특히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셋째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슬퍼하셨다. 거기에는 두 자매만의 남다른 정이 있었다. 어머니나 이모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얼마나 의지하면서 살았는지 나는 아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 이모도 우리 집으로 와서 어머니와 단둘이 대화할 때가 많았지만, 어머니 또한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이모를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어린 내가 혹시라도 들을까 봐 둘이서 속삭이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이제 생각하면 그것도 아쉽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어머니와 이모가 얼굴을 맞대고 속삭이던 그때가 그립다.
아버지와 나는 청주 등지에 있는 고모 집들을 방문하고 나서야 비로소 괴산에 있는 큰아버지 집으로 갔다. 첫째 큰아버지와 둘째 큰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곳은 지경이라는 마을이다. 어찌나 두메산골인지, 아니면 당시 그 일대 교통이 대체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경은 버스가 하루에 겨우 한 번 지나가는 산골 마을이었다. 충북 대부분이 그런 편이지만 지경은 특히 첩첩산중에 있는 듯했다.
하긴 오죽하면 그 지역 이름이 괴산이었을까.
[추신]
괴산의 지명에 관해 오래전에 내가 조사했던 내용을 한동안 잊은 채, 내가 또 괴산을 괴상한 산이 많아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헛소리를 했다. 내 잘못이다.
괴산은 괴이한 산이 많아서 그런 지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괴산에는 마을 입구마다 당산나무가 있었고, 그것은 대부분 느티나무였다. 괴산에서 ‘괴(槐)’는 회화나무(느티나무)를 말한다.
지난 2013년, 괴산(槐山)은 지명이 탄생된 지 600년을 맞았다. 괴산에 회화나무가 많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래된 느티나무는 매우 많다. 1996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에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무려 900년에 이른다. 오가리 느티나무는 높이 20미터 정도의 느티나무 두 그루를 가리킨다. 괴산읍 서부리 괴산도서관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도 수령 800년이라고 한다.
괴산군은 본래 고구려 때 잉근내군(仍斤內郡)이라 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이르러 괴양(槐壤), 고려 때는 괴주(槐州), 시안(始安)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괴산(槐山)으로 되었다.
조선시대에 최고 의정기관인 의정부를 ‘괴부(槐府)’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궁을 ‘괴신(槐宸)’,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정원을 ‘괴원(槐院)’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괴’라는 글자는 어떤 분야, 어떤 인물, 어떤 지명 등에서 ‘으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나중에 교사로서 30년 넘게 한국사를 가르친 친구가 내 글을 읽고 나에게 말했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는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회화나무 ‘괴’를 사용했을까.”
나무에 관해서는 아무 지식도 없는 내가 다시 조사해 보니 정말로 둘은 서로 다른 나무다. 그래서 살펴본 괴산군청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적혀 있다.
" 신라 진평왕 28년(606) 장수 찬덕이 가잠성에서 백제군에게 100일 동안 공격을 받아 성이 완전 고립되었으나 찬덕은 항복하지 않고 성안의 느티나무에 머리를 들이받고 자결하였음.
태종 무열왕(김춘추)은 찬덕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가잠성"을 [괴양(槐壤*)]이라고 부르게 하였음. * 槐:회화나무 괴, 壤:흙 양"
괴산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은 것은 사실인 듯하고, 신라 시대부터 이 지역 이름에다 ‘괴’를 붙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도 그 연관성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 혹시 예전에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혼용해서 불렀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