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정읍 여행기(3)
아산이라고 했는지 논산이라고 했는지 헷갈린다.
또 다른 곳일 수도 있다. 부지런히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아침 식사를 한 곳이.
(아무래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나중에 이 글을 쓰면서 궁금해서 물었더니, 혁국이 알려줬다. 당진에 있는 식당이라고.)
차 안에서 거의 자고 있다가, 아침을 먹자고 하면서 자동차가 어느 도시로 들어갔을 때 나는 비로소 눈을 떴다. 혁국과 재관은 이 도시는 우렁된장쌈밥이 유명하다고 하면서 적당한 식당을 찾았으며, 이윽고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아침 일찍인데도 식당에는 우리처럼 여행객들이 많이 들어왔으며, 일부는 또 우리처럼 아침부터 술까지 마셨다.
미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광경이라 약간 신기했다. 어차피 좁은 국토에 인구가 많아서 그렇겠지만, 10월의 대한민국은 온통 여행 열병에 걸린 듯하다.
그런데 우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재관은 억압됐던 세상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 유난히 막걸리를 찾았다. 혁국은 운전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었고, 나는 수술 이후라 의사로부터 한 달간 금주 명령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 바람에 재관과 종필만 식사와 함께 반주를 마셨다.
종필은 의외로 재관과 막상막하로 그 아침부터 술을 잘 마셔서 내심 놀랐다. 종필은 원래 조금만 술을 마셔도 얼굴이 무척 붉어졌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술에 약한 것은 아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것은 여전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술을 조금 마시자 종필의 얼굴은 금세 붉어지기 시작했다.
우렁된장쌈밥이라는 음식을 나는 처음으로 먹었다. 우렁이는 아마 논이나 호수 등에서 자라는 연체동물일 터인데, 나에게는 먹기에 거북한 낯선 음식이다. 어쩌면 단백질이 많을 듯도 하고, 필경 좋은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입이 짧은 내가 쉽게 씹거나 식도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명색이 ‘쌈밥’이라 다행이었다. 나는 못 먹는다고는 하지 않고, 그냥 상추쌈에다 우렁된장을 싸서 입에 넣고 무조건 씹어 넘겼다. 쌈을 빼고 우렁이만 먹으라고 했다면 먹지 못했을 것이다. 쌈채소에다 강된장과 된장국 등을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 와서도 나는 보통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 그래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밥을 먹는 게 매우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는데, 친구들과 떠들면서 먹다 보니 다행히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또 차를 타고 달렸다. 수도권을 지나서 그런지 주변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어느새 고속도로 주변에 건물들 대신 밭들이 나오고 저 멀리 산들이 늘어섰다. 서울에서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면 주로 들판을 지나가서 좋다. 산이 적은 만큼 터널 통과도 적다. 또한 도로 옆에 공간이 넓어서 조금이라도 멀리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다. 서울에서는 거의 언제나 건물들과 사람들로 시야가 제한되어 있지만, 지방으로 나가면 이렇게 가리는 것이 사라져서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 그로써 그만큼 눈과 마음이 더 시원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여행 전에 혁국이 나에게 물었다.
"여행하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한국을 방문한 김에 친구들과 여행하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까, 1박 2일이라면 전라도 쪽이 더 좋을 것 같았다. 5년 전에 혁국과 갔었던 새만금이 생각났고, 얼마 전에 내가 동기 친구들에게 짧은 글로 소개했던 수라갯벌이 떠올랐다. 정말 기회만 된다면 나는 그 갯벌로 가보고 싶었다.
내 대답을 기억하고, 그는 고창으로 가는 길에 일부러 새만금을 통과하는 방향을 택했다. 군산을 지나 새만금으로 갔을 때 흐릿한 풍경의 바다가 등장했다. 뿌연 하늘 아래 뿌연 바다가 있다고 표현해야 하나. 새만금 바다 풍경은 썰렁하기만 했다. 그런 풍경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던 도중, 어느 다리 중간에 이르러 갑자기 혁국이 차를 세웠다. 아직 토요일의 이른 아침이고, 바다와 새로 생긴 갯벌만 있는 새만금의 어느 지역이었으며, 군산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들은 거의 없었다.
혁국은 우리가 수라갯벌까지 갈 수 없는 형편이라면서, 또 가봤자 갯벌로 들어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라면서, 수라갯벌이 우리가 서 있는 곳 근처일 듯하니 멀리서나마 잠시 바라보기라도 하라고 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다리 위에 불쑥 섰던 것이다. 그는 갯벌 위를 지나는 어느 다리 중간에 설치된 철제 아치 구조 옆에 어정쩡하게 자동차를 세웠다. 거기서 내려서 그냥 도로 위에 서서 수라갯벌을 보자는 것이었다.
“저기가 수라 갯벌이 있는 곳이야.”라고 차에서 내린 혁국이 바다 어딘가를 보면서 말했다.
“아니 도로 중간에… 이렇게 차를 세워도 되니? 이러다 티켓 먹는 거 아냐?”
희뿌연하기만 한 바다 어딘가를 보면서 나는 약간의 걱정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러니까 빨리 보고 가면 되지.”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려서 멍하니 흐린 하늘과 흐린 바다를 쳐다보았다. 뿌연 하늘 아래 뿌연 갯벌이 펼쳐져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희뿌연 저편 어디로 시선을 줘야 할지 모르는 채 나는 저 멀리 어디엔가 수라갯벌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초점을 잃은 채 뿌연 허공을 헤맸다. 아무리 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수라갯벌' 다큐 영화 소개 장면에서 소개되는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영화에서 아름다운 철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 흐릿한 바다와 갯벌 위에도 어디선가 날아온 검은색 철새 여러 무리가 떼를 지어 지나갔다.
“저기 어디에 수라갯벌이 있단 말이지.”
나는 낮은 목소리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또 내쉬었다. 군산 새만금에 새로 공항이 만들어진다고 하고, 그로 인해 마지막 갯벌이 사라지고 있음을 고발했던 영화 '수라갯벌' 현장이 저곳 어딘가에 있다고 하나 내 눈 앞에는 온통 희뿌연 바다만 보였고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거기 서서 하염없이 쓸쓸하고 낯선 풍경을 보고 싶어도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리 위에 그렇게 차를 세워둔 채 마냥 하늘과 바다와 갯벌을 볼 수는 없었다. 내가 그러고 싶어도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고 곧 새만금을 벗어났다.
새만금에서 오래 지체할 수 없었던 우리는 곧장 전라북도 고창으로 내려갔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고, 친구들은 또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고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차 안에서 거의 내내 졸거나 자다가 깬 나는 ‘아니, 또 식사?’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달리 하루에 세끼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고 나는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창으로 들어가면서 혁국과 재관이 약간 논의한 끝에 고창전통시장으로 가기로 했다. 전통시장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동의했다. 전통시장에 간다고 하면 왠지 무조건 좋았다. 시골스럽고 전통스럽고 가끔 퀴퀴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더러는 지저분하고, 요즘은 전통시장 일부 상인들이 바가지 상술로 욕을 먹는다 해도 말이다.
고창전통시장은 무척 썰렁했다. 토요일 점심 무렵이라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상가 안에는 점포를 지키는 상인들만 있을 뿐 손님들이라곤 거의 우리밖에 없는 듯했다. 주차 후에 시장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시장 입구에 50세 전후로 보이는 아주머니 세 분이 나란히 앉아서 대화하고 있다가 우리를 자꾸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마도 ‘저 늙수그레한 네 양반이 혹시 우리에게 오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 시장 상인들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그들이 ‘고창전통시장의 삼공주’라고 이름을 붙여봤다. 우리는 그들의 눈길을 피해서 그냥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남성 네 명이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시장 상인들은 혹시라도 우리가 무엇을 사러 왔을까 하고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뭔가 사라고 보채지는 않았다. 우리의 행색이 그래 보이지 않았던 탓일 게다. 우리는 식당을 찾아서 골목 안을 어슬렁거렸지만 마땅히 들어가고 싶은 식당을 찾지 못했다. 그리 크지 않은 시장의 골목을 돌아서 나오다가 결국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마침 우리가 처음에 시장으로 들어갈 때 우리를 바라보았던, ‘고창전통시장의 삼공주’ 가운데 한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다른 두 공주를 그대로 둔 채 곧바로 우리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그녀가 그 식당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식당에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주문을 받은 즉시 그때부터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거의 없으니까 미리 준비해 놓은 음식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먹었던가.
비빔밥을 먹었나. 그것도 헷갈린다.
하여간 그 식당에 술이 없음을 알게 된 재관이 술타령을 했다. 재관은 술을 사 와야겠다고 하더니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혼자 밖으로 나갔다. 조금 후에 재관은 정말로 막걸리 병을 들고 왔다. 그리하여 재관과 종필이 또 식사와 함께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