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정읍 여행기 (2)
1.
드디어 7일 새벽.
나는 5시 조금 넘어 일어났다.
7시에 모두 만나기로 한 부천으로 가기에 앞서 종필이 6시까지 나를 데리러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온 후 줄곧 9시쯤 일어나는 나는 그렇게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겨우 닷새 전 받은 수술로 인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상태로 지방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무리인 듯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계획되었던 여행이라 나는 그냥 친구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간밤에 방 안에 들어온 모기를 잡느라, 또 몸이 아파서, 게다가 여행 전의 긴장 때문에, 나는 사실 간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이 가운데 특히 모기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어떻게 서울에서 10월까지 모기가 극성인지…
모기가 어떻게 고시텔 4층에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는지 모른다. 다만, 자려고 누우면 때때로 귓가에서 모기가 왱왱거렸다. 그럴 때면 나는 아주 잠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모기를 잡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이곤 했다.
고시텔 방이 작고 밝아서 모기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만 부릅뜨고 잘 찾으면 하얀 벽지를 바탕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검은색 모기는 쉽게 발견되었고, 나는 접은 수건으로 살살 다가가서 잽싸게 모기를 압사시켰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모기가 어딘가로부터 계속 들어온다는 것이다. 분명히 모기를 잡고 누웠는데, 불을 끄고 누우면 금세 다시 왱왱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어나서 불을 켜고 한밤중에 살생을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하룻밤에 잡은 모기가 많을 때는 네댓 마리나 되기도 했다. 물론 매일 그런 상황은 아니었지만, 모기는 계속 출현했다. 창문과 환기구 등 모기가 들어올 만한 곳을 찾아 방 안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나는 모기의 출입구를 찾지 못했다. 나중에는 고시텔 관리자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방 안으로 계속 모기가 들어오네요. 잡아도 또 들어오고.”
그러나 그녀도 거기에 대해서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기상이변인가 봐요. 올해는 모기가 유난히 극성이네요.”라고 그녀는 말했을 뿐이다.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불상사의 원인 대부분이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탓이다.
날이 너무 더워도 날이 너무 추워도,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비가 너무 적게 와도, 모두 지구온난화를 탓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말은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한 듯한데, 하여간 너무나 포괄적이고 두루뭉술하다. 딱히 거기에 대해 반박하기는 어려워서 그것은 마치 만병통치약인 듯 들린다.
2.
고시텔과 내가 묵었던 방에 관해서 간단하게나마 설명하고 싶다.
말만 들었거나 텔레비전에서 보기만 했지, 실제로 고시텔에 가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며, 나처럼 고시텔에서 직접 한 달간 살아본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4년 전과 5년 전에 서울에 왔을 때는 '에어비앤비 사이트'를 통해 강남역 바로 앞에 숙소를 구하면서 한 달에 2천500달러 정도나 지불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에서 두 달을 지내기로 했으므로 나는 서울에서는 '프리미엄 고시텔'에서 묵기로 했다. (프리미엄 고시텔은 고시텔 중에서 최상급에 속한다. 이번 한국 방문 기간 중 나는 첫 한 달간 서울에서는 고시텔에서, 두 번째 한 달간 부산에서는 풀옵션 원룸에서 지내기로 계획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10년 전에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종각역 부근에서 한 달간 고시원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그러니, 이번 강남 고시텔 살기는 나로서는 두 번째 경험이며, 통산 '고시텔 살이' 두 달이다. 예전에 작고한 박원순 서울시장도 옥탑방에서 한 달 살기를 경험한 바 있지만, 나는 친구들에게도 고시텔에서 한 달이라도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고시원 한 달 살기 경험이 딱히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왜 할 만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권하고 싶다. 집 근처가 아니라, 조금 먼 곳으로 가서, 또 누구와 함께가 아니라 혼자서 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해서, 혹시라도 소설가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처럼 기만적인 가난의 경험 정도로 이해될까 무섭기는 하다. 그래서 내 말이, 고시텔에서 '혼자 살면서' 가난을 훔치지 말고 경험해 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의 가치는 경험하지 않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 경험으로는, 아주 밑바닥에 사는 사람에 대한 이해까지는 아닐지라도,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된 듯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프리미엄 고시텔의 방은 최저가 고시원의 방과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하여간 수술 후에 이미 나는 혁국에게 내 상태에 관해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전라북도까지 1박 2일 여행을 활기차게 갈 형편이 안 되고, 그래도 가기로 했기 때문에 가게 된다면 나를 환자로 생각하고 ‘환자 수송’한다는 생각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그것은 다소 과장된 농담이기는 했지만, 정말 내심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여행을 떠났다가 수술 부위가 제대로 아물지 않고 더 아프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웠다. 또한, 내가 아프거나 힘들어해서 여행을 즐기러 온 친구들을 부담스럽게 하면 어떻게 하는가도 걱정스러웠다.
3.
7시 정각에 종필이 나타났고 나는 곧바로 숙소 앞으로 나갔다.
종필을 과거에 언제 보았던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오랜만에 본다. 적어도 십 년은 지났을 것이다. 비록 친구들 단체 사진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으므로 그의 얼굴이 낯설지는 않지만, 막상 만나서 대화하려니 약간 어색하기는 했다.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지만. 오래된 친구는 이런 게 좋다.
그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수년 전에 은퇴했다. 이후에는 부천 어딘가에서 공동농장을 관리하는 기관에서 관리인이 되어 다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됐다고 한다. 그냥 편하게 은퇴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농사를 좋아해서 하게 된 일이라고 한다. 대도시에서만 자라서 농사와는 거리가 먼 나와는 달리, 전남 시골 출신인 그는 농사일에 진심인 듯 보인다. 아니, 사실 그는 외모부터 농사꾼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피부는 햇빛에 그을린 듯 색깔이 진하다. 농사를 지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는 원래 그랬다. 그래도 그는 우리 가운데 가장 건강해 보인다. 얼굴 모습을 제외하고 외모만 보면 젊은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로 날씬하고, 움직임도 전혀 굼뜨지 않고 날렵하다. 그는 대학 때부터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붉게 물드는 사람이다. 나도 술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서 한두 잔이면 얼굴이 빨개지는데, 그는 나보다 더하다. 그러나 나와 다르게 그는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고 많이 마신다.
나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 부럽다. 돌이켜보면, 오늘날 성인이 되어서는 어차피 거의 모두 도시 생활을 하는 마당에, 그들은 나에게는 없는 어릴 적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시골과 자연에 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나에 비해 어릴 때 그들은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훨씬 자연친화적인 풍부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어린 날 쌓인 그런 경험은 그들에게 일생을 통해 인간적인 정서를 풍부하게 간직할 수 있도록 할 것 같다고 나는 짐작한다.
4.
부천에 사는 혁국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 재관도 도착한 듯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역시 4년 만에 본다. 은퇴한 교사로서 그는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은퇴 후 맨날 집에 있다고 해서, 그의 성격에 아내로부터 ‘삼식이’라고 욕먹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는 나름대로 그런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즘은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배드민턴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갑자기 너무나 열심히 해서 그랬는지, 그는 얼마 전에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한동안 깁스를 하고 다녔다는…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전했다. 그래도 다시 회복한 그는 요즘에는 다시 한 주에 서너 번씩 배드민턴을 하러 간다.
그가 우리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하자마자 마침 주차장으로 내려온 혁국이 나타났다. 재관과 종필이 자동차를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에 두고 우리 네 명은 혁국의 차에 올라탔다. 재관은 조수석에, 그 뒤에는 종필이, 운전사 뒤에는 내가 앉았다. 재관이나 종필은 승용차를 타지만, 혁국의 차는 그리 크지 않다 해도 SUV이다. 그 바람에 수고스럽게도 이틀 내내 혁국이 운전을 담당했다.
아침 일찍이라, 우리는 모두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므로, 차가 막히기 전에 가능하면 조속히 멀리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고 혁국과 재관이 말했다. 특히 10월에는 주말만 되면 서울 사람들이 교외로 나가려고 하므로 교통체증이 금세 심해진다고 했는데, 우리가 고속도로로 나가면서 보니 그 말이 사실인 듯했다.
나는 미안해서 미리 밝혀두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감기와 수술 핑계를 대면서 내가 피곤해하더라도 ”‘환자를 이송한다는 기분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는데, 친구들은 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농담으로 받아주었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니는 아프니까 그냥 차에 있어. 차 지키면서 누워 있으면 우리만 구경하고 올게.”라고 재관이 특유의 억양과 함께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해라. 내가 차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보고 와. 나는 차에 있어도 괜찮아.”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5.
여행에 앞서 혁국이 짠 계획은 이렇다.
7일 - 고창 전통시장, 고창읍성 방문, 고창 고인돌, 영모정
8일 - 정읍구절초축제, 정읍 쌍화차 거리, 만석보,. 김명관 고택, 정읍근대역사박물관 방문, 아리랑문학마을, 벽제골, 삼례 비비정.
나에겐 모두 낯선 장소였다. 나에게 심리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여행에 앞서 방문지를 미리 조사해 보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 좋았다. (사실 이 여행 기록도 원래 쓸 계획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로 아프고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여행하는 동안 사진도 많이 찍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밤에도 잠을 거의 못 잔 나는 마치 약에 취한 듯 비몽사몽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자동차 뒤에 앉아서 나는 내내 졸거나 잤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도 있고, 아픈 탓도 있고, 마음에 여유가 없는 탓도 있어서 그런지, 나는 그저 매우 피곤하기만 했다. 우리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로 올라 남쪽으로 치달렸고, 나는 마치 꿈결처럼 조용히 차 뒤에 처박혀 실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