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정읍 여행기 (4)
1. 고창은 ‘높고 넓은 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서 앉은 나는 약간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비몽사몽 하는 사이에 차에 실려 온 후 고창전통시장에 도착했다고 해서 내렸고, 얼떨결에 친구들을 따라가서 어느새 식당에 앉아 밥을 먹게 된 상황이었다. 배가 고프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배가 고프지 않아도 친구들과 마주 앉아서 한두 숟가락씩 입에 떠 넣다 보니 저절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넷이 둘러앉아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어느새 그릇을 비웠다. ‘벗들과 함께 하는 식사의 힘’이다.
말로만 들었던 고창에 온 것은 처음이다.
한국 떠난 지 오래되어서 그렇다는 핑계를 내세워 말하자면, 고창이 무엇으로 유명한 곳인지 전혀 몰랐다. 고창에 고인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창에 읍성이 있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
고창은 높고 넓은 들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을 보니, 고창군은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이며, 고인돌, 판소리, 농악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나아가, 고창갯벌은 2020년 8월 현재 세계자연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 중에 있다고 한다.
여행 전에 혁국은 이번 여행길에 동학농민군의 발자취를 자주 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창과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다.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하고, 동학농민 봉기,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등 여러 호칭으로 불렸던 이 사건은 1894년에 있었던 일이다.
1860년 수운 최제우(1824~1864)는 도교, 불교, 선교의 교리를 종합하여, 서학에 대항하는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의 깃발 아래 모인 농민들은 토속종교적 색채를 띠지만 썩어빠진 관료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게 됐다. 그것은 처절하고도 자랑스러운 민중봉기였지만, 결국 일본군과 관군에게 처참하게 짓밟힌 패배의 민족전쟁이기도 하다. 이 전쟁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9세기말 풍전등화로 변한 조선에서 서양 사상과 기독교에 대항하는 ‘동학’이 탄생하고 주로 충청도 이남 농민들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동학은 충청도와 전라도 민중들이 모여들어 호국 종교로 발전했다. 급기야 극도로 부패한 조선 관료들에 대항하여 전라도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반봉건 체제투쟁으로 변질된다.
조선 정부는 부패한 지방 관료들을 처단함으로써 농민들을 달랬던 것이 아니라 폭압으로 일관했는데, 그것이 농민들의 저항을 더욱 부채질했고, 그로써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로 발전했다. 마른 들에 불이 번지 듯 농민군이 들고일어나자 조선 관군은 진압이 어려워졌다. 거기서 가장 비참한 일이 벌어졌는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을 때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곧바로 청나라 군대뿐 아니라 일본군까지 진입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청일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다.
그에 앞서 전투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농민군은 현대식 일본군, 특히 일본군이 가진 신식 기관총 앞에서 무기력했다. 수십만 농민군의 지도부는, 아마도 숫자만 믿은 듯 우금치 마루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대결했으며 허무하게 무너졌다. 일본군은 거의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농민군은 기관총 앞에서 완전히 궤멸됐고, 녹두장군 전봉준은 체포되었으며 동학군 지도부는 와해됐다. 이 전쟁은 조선 정부를 살린 것이 아니라, 결국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시간을 앞당겼다. 조선 정부는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학살하고 결국 나라를 잃고 만 것이다.
과거에도 전라도를 여행할 때 동학농민군의 전적지를 가보면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쓰리다. 그 황토를 밟으면 조선 말엽과 일제강점기에 뿌려졌던 수많은 농민의 피와 썩은 육신이 떠오르곤 한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그 피비린내 나는 슬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거기 가면 돌멩이 하나라도 함부로 찰 일이 아니다.
2. 폐지 줍는 노인들이 없는 농촌
어느덧 그것은 백수십 년 전의 과거사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더불어 농촌은 현대화되었다. 비록 주로 노인들만 남기는 했지만, 시골은 어쩌면 도시빈민들보다 공간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여유가 있어 보인다. 상대적 의미에서 말하면, 시골의 땅은 넓고 사람은 적다. 거기에 자작농이나 넓은 토지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지 나는 모른다. 또 빚 없는 농민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다만 너른 들에 집들은 많지 않아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니, 도시빈민의 눈으로 보면, 대도시의 촘촘하고 허름하고 각박한 삶보다 그곳이 낫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전국적으로 폐지를 줍는 가난한 노인이 4만 명도 넘는다고 한다. 아무리 리어카를 밀고 다녀도 그들은 절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무거운 리어카를 밀고 자동차 사이를 오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적한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고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정확한 사정을 모르면서 하는 말이긴 하다. 폐지를 줍는 사람들과 도시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서 그들이 조금 더 여유 있는 지방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면 안 될까.
저렴한 실버타운 같은 공공시설을 지어서 그들이 함께 저렴한 비용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에게 공공토지를 경작하도록 하거나 공공 생산시설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립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따로 살면서 식생활을 하는 것보다 그런 방식으로 공동생활을 하면 비용을 훨씬 줄일 수 있고 영양식도 가능하다. 게다가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지역 의료시설도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은퇴자의 노령연금이 너무 빈약해서 먹고살기도 어려운 이 나라에서,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이 나라에서, 인구는 초고속으로 감소하고 노인은 초고속으로 증가하는 이 나라에서, 이런 주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물론 나의 이런 아이디어는 지자체와 농촌과 도시빈민의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헛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 아닌가. 수십 년간 지방소멸이 뉴스의 주된 화두가 되고, 시골에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거의 사라지고 외로운 노인들과 빈집만 늘어나고 있다.
나는 지방을 여행할 때 이따금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대형 운동장이나 공원, 그리고 중복적이고 허울만 좋은 문화관광 시설 등을 자주 본다. 그런 시설들이 모두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자체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건설한 시설들이 실질적이기보다 전시적 성격이 강하며,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예산으로 차라리 빈민들과 노인들이 공동으로 어우러져 살 수 있는 경제적이고 자립적인 주거복지 및 공동농지 시설을 제공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범국가적으로 서둘러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3. 고창은 전주보다 광주에 가깝다
고창은 전라북도 남쪽에 위치해서 거리상으로는 전주시보다 광주광역시에 가깝다. 이러한 지리적 이유로 인해 고창은 1914년 이전까지 행정상 전라남도에 속했었다. 지금도 광주나 정읍에 살면서 고창으로 일을 다니는 사람이 많고, 고창에서 전주로 가는 버스보다 광주로 가는 버스가 더 많을 정도다. 고창의 인구는 1966년만 해도 20만 명을 헤아렸으나, 해마다 급속히 줄어들어 2023년 11월 현재 5만 2천 명도 안 된다.
한국의 곡창지대인 만큼, 농업을 위주로 하여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선운사다. 577년에 지었다는 선운사는 도솔산 또는 선운산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쉽게도 선운사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나는 송창식이 부른 노래 ‘선운사’를 무척 좋아한다. 그 노래의 가사에도 나오지만, 사시사철 아름다운 선운사의 자연환경은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도 붉은 꽃송이가 피워내는 동백꽃이 있어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제에 있는 금산사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 알려진 선운사!
기분 같아서는 이곳에 온 김에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선운사에 가보고 싶었지만, 혁국은 선운사까지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모자라고, 내가 걷는 것도 무리라고 해서 선운사 방문은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나중에 언젠가는 다시 방문할 날이 있겠지!
4. 고창읍성은 여자들만 쌓았나
고창읍성은 고창읍에 있는 성이라 해서 ‘읍성’이다. 벽돌을 멋있게 쌓아서 만든 성이 아니라 자연석으로 만든 성곽이다. 왜적 침입을 막기 위해 방장산을 둘러 만들어진 성이라 비교적 무너지지 않고 남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석성이라고 한다.
이 성은 주로 여자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남아 있어서 지금도 여자들만 참여하는 성 밟기 축제행사가 매년 열린다. 실제로 읍성 정문 앞에는 여성 세 명이 머리에 돌을 이고 나르는 모양을 재현해 놓은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
읍성의 총둘레는 1684미터이며 담의 높이는 4~6미터 정도다. 면적이 5만 평 정도인 이 성에는 원래 동서북 문과 옹성 3개소, 치성 6개소, 성밖의 해자 등까지 있었다. 옹성이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문 앞에 (옹기 모양으로) 외부로 둘러쳐진 보호 시설이고, 치성은 적을 방어하기 좋게 성곽에서 밖으로 길게 돌출시킨 구조물이다.
옹성이 있으면 성으로 침입하는 적군을 막는 이중 성문 장치를 갖는 것과 같다. 치성이 있으면 적의 움직임을 관측하기도 좋고 공격과 방어에도 좋다. 나아가 치성은 성곽이 약한 부분에서 성벽을 지지해 주는 받침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치성이 있는 성곽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덜 무너지고 더 오래 남곤 한다.
고창읍성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곽처럼 보인다. 기분 같아서는 성읍을 따라 한 바퀴 돌면 좋겠지만 우리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입구 근처에서만 어슬렁거리다가, “아, 고창읍성이 이렇게 생겼구나.”라고 말하면서 돌아섰다.
새로 잘 꾸며진 성곽에 서서 고창 읍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나서 우리는 숙제를 마쳤다는 듯 서둘러 나왔다. 마치 고창의 고인돌이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다는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