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인의 마누라 - 김경근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by 사노라면


오늘 저녁엔 국물도 없다.

겨울 찬바람은 턱밑까지 불어왔는데
올해 따라 무릎은 힘도 빠져가는데
군불 땔 장작은 줄어가는데
저 놈의 영감탱이 사랑타령이다.
저 놈의 영감탱이 글 타령이다.

베아트리체. 비너스 당신만 부를 줄 알더냐
베르테르와, 미라보 다리 아래에서
나도 한때는 가슴 저렸었다
당신 만나 이 긴 세월 흘러
호호 할머니가 되기 전까진
나도 한때는 누군가의 메이퀸이었다.

영감탱이 글 쓰는데 춥지는 말아라
그래도 군불은 넣어주마
영감탱이 써놓은 사랑 글이
말라 가는 내 심장에 군불은 넣어주니까

그래도 저 시속에
내가 살았었고
그래도 저 가슴속에
쪼글 해진 할망구라도 있으니까

그래도 장작 준비 안 하는
저 영감탱이
오늘 저녁엔 국물도 없다

노 시인의 마누라 -김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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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광고를 보다가 들린 대사가 피식 웃음을 줍니다.
노부부의 대사입니다
'밥은 좀 밖에서 먹고 들어오지..'
'약속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내용인즉슨 광고하는 제품이 맛이 있어서 부지런히 들어와서 먹는다는 해피엔딩이지만, 정작 마음에 남는 건 이 문장입니다.

'밥은 좀 밖에서 먹고 들어오지..'

집에 있다 보면 삼시세끼 밥 차려먹는 것도 일입니다.
금방 먹고 나면 또 밥때가 오고 그러길 세 번입니다.
그나마 혼자면 대충 때우기라도 하련만, 눈치 없이 식사 때에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번거롭게 밥상을 차려야 합니다.
더구나 오랜 세월의 노부부에겐 그 한 끼 차리는 것도 번거롭기만 한데 말이지요

요즘 청춘들이야 핸드폰만 열면 간단하게 배달 어플이란 게 있어 시켜 먹을 수 있지만 그도 쉽지 않습니다.
살짝 짜증이 밀려올 때쯤 남편이 이야기합니다

'아까 그 국 참 맛있었어.'
입을 삐죽 거리지만 살며시 입가에 미소가 돕니다

이래서 부부인가 봅니다.
이래서 식구인가 봅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그 어느 시절엔 같이 마주하는 식탁 한 끼에 가슴을 두근거렸고,
그 어느 저녁노을 앞에 같이 서있을 땐 행복하기도 했었습니다.

밥때 되면 챙겨 먹으러 들어오는 모습이 귀찮기도 하지만,
힘 빠진 영감의 어깨가 안쓰럽기도 한 것이 부부인가 봅니다.

짧은 광고 한 편에,
같이 살아가는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같이 마주 보는 세월을 생각해 봅니다.

그 광고 같은 시 한 편 같이 올려 봅니다.

오늘은 고마운 당신을 위해 봄 꽃 한 송이 준비해 들어가 볼까 합니다
세상 모든 가족들의 아름다운 시간을 응원합니다 -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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